메뉴 건너뛰기

close

청주고보 동창생(맨 우측이 신언우, 우측에서 세번째가 오해균)
 청주고보 동창생(맨 우측이 신언우, 우측에서 세번째가 오해균)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친구야, 군에 들어와." 민기식(1921년생)의 제안에도 신언우는 묵묵부답이었다.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주고보(청주고등보통학교) 친구인 민기식은 일찌감치 군에 입대했다. 반면 신언우는 만주의 세무서에 일하다 해방이 되자 귀국했다. 그런 신언우를 만나기 위해 1946년 2월 7일 민기식은 청원군 낭성면 추정리로 찾아왔다. 

민기식은 왜 신언우를 찾아왔을까?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면서 '뱀부계획'에 따라 1개 도(道)에 1개 연대를 창설하는 계획이 세워짐에 따라 민기식에게 충북에서 제7연대를 창설하는 일이 주어진 것이다. 

1943년 만주 건국대학을 졸업하고 학병으로 징집되어 일본군 소위로 있다가 귀국한 민기식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정식 임관했다. 소위의 계급으로 연대장이 된 그는 사병을 지휘 통솔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장교가 긴급히 필요했다. 결국 청주고보 동창과 후배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 

군대가 정식으로 창설되기 이전 미군정 시절과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군대에서 초고속 승진이 가능했다. 1946년 소위였던 민기식은 1949년 중령, 1952년에는 소장이 됐다. 3년마다 3~4계급이 승진한 것이다. 이후 민기식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충주비료 사장과 3선의 국회의원(7~9대)도 했다. 

신언우 가족의 비극
 
청주고보 시절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신언우
 청주고보 시절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신언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한편 청주고보 졸업 후 신언우는 아내 남기정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하얼빈세무서에 취직한 그는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만주에는 마적단이 들끓었다. 마적단은 집단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민가의 재산을 탈취하고 여성을 강간했다. 신언우의 아들 신창식(1942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신언우는 마적단에게도 세금을 받아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만큼 원칙에 충실하게 일을 처리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신창식은 신언우 부부가 만주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돼 태어났다. 그런데 부인 남기정이 1943년도에 조선으로 먼저 귀국했다가 그해 4월 27일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다. 당시에 만연했던 장질부사(장티푸스)였다. 이후 신언우는 만주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귀국했다. 그런 그에게 동창 민기식이 입대를 권유한 것이다.

하지만 입대가 마뜩치 않았던 신언우는 청주고보 절친 오해균에게 "산림사업을 해보자"고 했지만 오해균은 "나는 공무원 할껴"라며 사양했다. 청원군 현도면 중삼리 출신 오해균은 이후 보은군청에 취업, 청원군청을 거쳐 충북도청에 일하게 된다. 신언우는 화물업을 시작했고 경주김씨와 재혼했다. 

신언우 가족이 아산군(현 아산시) 온양으로 이사한 지 1년여 만이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졌다. 신언우는 아들을 천안 고모 집으로 피난보냈다. 10월 12일에 아들을 데려오며 집 바로 옆 온양지서를 지날 때였다. "신언우씨, 잠깐만 봅시다"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사복 형사가 아버지를 연행하는데 소년 신창식은 지서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신창식은 그날 밤이 다 되어서야 아버지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중의적삼을 입은 신언우는 온양경찰서로 이송된다며 소달구지에 실려 있었다. 겁먹은 신창식은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후 신언우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어느 곳에서 학살됐는지 밝혀지지는 않았다. 다만 온양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온양 읍내 부역혐의자 대부분은 아산군 배방면 성재산의 방공호(교통호)에서 온양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신언우도 이곳에서 학살됐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배방면 남리에 살던 최정숙은 이렇게 증언했다.

"밭에 나가 김장배추 벌레를 잡으려고 하는데 온양경찰서로부터 사람들을 실은 트럭이 돌장원 입구(성재산 앞마을)로 왔습니다. 우리 집이 바로 길옆이니까 보았습니다. 차에 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호송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모자들을 쓰고 있었습니다.

… (트럭으로 사람들을 나르기를) 하루에 한 번도 하고 두 번도 하고 그랬는데 두 번 할 때는 아침과 저녁에 날랐습니다. 안 보려고 피해도 너무 가까워서 다 보였습니다. (트럭을 목격한 횟수는) 못해도 5~6번을 갔습니다. 차로 사람들을 나른 다음에는 돌장원 입구 교통호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중에서


신언우가 죽은 후 남겨진 가족은 '부역자 가족'이라는 주홍글씨에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았다. 도민증도 발급받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다 신언우의 어머니와 재혼한 아내 경주김씨가 1951년 1월 4일 온양지서에 연행됐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 이 두 여성은 인공 시절에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말도 안 되는 부역혐의로 학살된 신언우의 어머니이자 아내였을 뿐이다. 

온양지서장은 경주김씨에게 "당신은 돌아가시오"라고 했지만 김씨는 "나는 죽어도 시어머니와 같이 죽을 것이고, 살아도 같이 살 겁니다"라고 했다. 결국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시신은 온양읍 곡교천변에서 발견됐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꼭 껴안은 채였다.

청주고보 동창생 3인의 삶

청주고보 13회 졸업생 민기식, 신언우, 오해균은 해방과 한국전쟁기에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앞서 보았듯 신언우는 청주고보 졸업 이후 만주 하얼빈에서 세무서에 다녔고 귀국해 운수업에 종사했다. 이후 1949년 충남 온양으로 이사해 한국전쟁기 부역혐의로 불법적인 죽임을 당했다.

신언우에게 산림사업을 제안받았지만 공무원의 길을 택한 오해균은 충북도청 재직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전쟁 발발 직후 청주경찰서 무덕관에 예비검속된 그는 청주~미원 간 국도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일찌감치 군인의 길을 걸은 민기식은 7연대장을 거쳐 한국전쟁을 계기로 초고속 승진을 해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올라 4성 장군이 됐다. 그가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것은 1965년으로 불과 44세의 나이였다. 이후 충주비료 사장을 지낸 후 1967년 정계에 입문해 그해 6월 8일 실시된 선거에서 충북 제2선거구(청원군)에 공화당 당적을 갖고 출마했다. 이후 민주당 곽의영 후보를 압도적 표 차이로 이기고 당선됐다.

인연은 참 묘하다. 국가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청주고보 동창생 신언우와 오해균의 자식들이 만났다. 신언우의 아들 신창식과 오해균의 딸 오경희가 5년 만의 연애 끝에 결혼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지만 '만약에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만약에 민간인 집단학살이 없었다면' 청주고보생 신언우와 오해균의 삶은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동창생인 군인 민기식과는 다른 삶이었겠지만 오해균은 공무원으로서, 신언우는 사업가나 직장인으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자식과 가정 역시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증언자 신창식(신언우의 아들)
 증언자 신창식(신언우의 아들)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태그:#청주고보, #현충사, #부역혐의, #국민보도연맹, #육군참모총장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