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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하면 떠오르는 심상이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불렀던, '보름달 둥근달 동산 위에 떠올라 어둡던 마을이 대낮같이 환해요'로 이어지는 윤석중의 '보름달'을 떠올리는 분도 있고, 베토벤의 월광곡이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달빛역사동맹'이란다. 달빛 아래에서 무슨 역사 동맹이람? 알고 보니 달빛은 달구벌 대구와 빛고을 광주의 줄임말이다. '달빛역사동맹'은 대구와 광주가 함께 일구어온 역사의 교집합을 찾아내 단절된 동서의 소통과 단결을 도모하자는 의미다. 

지난 12월 8일, 나는 광주광역시교육청이 주최하는 교사들의 역사 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대구로 가는 88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렸고,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은 노성태(인문연구원 동고송 이사) 선생은 이번 여행의 여정을 해설하였다. 나는 좋은 벗을 둔 인연으로 달빛역사동맹에 동참하게 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만난 이름
 
대구시 중구 삼덕동 삼덕교회 입구에 조성돼 있는 옛 대구형무소 조형물.
 대구시 중구 삼덕동 삼덕교회 입구에 조성돼 있는 옛 대구형무소 조형물.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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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착지는 대구감옥 사적지였다. 감옥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붉은 벽돌로 감옥의 벽을 재현한 사적지가 있었다. 벽돌에는 이곳에서 청춘을 잃은 항일 독립투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육사, 김마리아, 김창숙. 그런데 한말 호남의병장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전해산, 심남일, 양상기, 오성술… 아니, 호남 의병장 이름이 왜 이곳 대구 감옥 벽돌에 새겨져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의아했다. 노성태 선생의 해설에 따르면, 1910년 이곳 대구감옥의 형장에서 40여 명이 넘는 호남 의병장들이 교수형에 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전라도와 경상도를 관할하는 고등법원이 대구에 있었고, 호남의 의병장들은 대구법원에서 항소심을 받았다. 달빛역사동맹의 역사적 줄기가 이렇게 이어져 있음을 우리는 붉은 벽돌을 보며 알게 됐다.

그런데 전해산과 심남일과 양상기가 호남 사람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전수용과 심수택이라고 적힌 글씨가 눈에 띄었다. 전수용은 전해산의 본명이요, 심수택 역시 심남일의 본명이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기록한 것이었다.(이 칼럼을 읽은 대구시 공무원은 벽돌의 이름을 정정하기 바란다.) 노성태 선생은 심남일 의병장의 손자와 증손자를 모시고 이곳에 왔는데, 유족들은 이곳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구감옥(뒷날 대구형무소로 개칭) 정면의 모습.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대구감옥(뒷날 대구형무소로 개칭) 정면의 모습. 서대문감옥(서대문형무소)보다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순국했다.
ⓒ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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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광주와 대구 사이에는 지금과 같은 고속도로가 없었다. 의병장들은 포승줄에 묶인 채 광주에서 영산포까지 걸어가서 영산강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간 다음 여객선을 타고 부산으로 갔고, 다시 기차로 대구까지 기차로 호송되었다. 이후에 유족들은 교수형당한 의병장들의 시신을 어떻게 운구했을까? 시신을 대구에서 고향까지 모셔올 때 겪어야 했던 그 고생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론 대구가 참 부러웠다. 광주에는 '광주형무소 표지석' 하나 달랑 있을 뿐인데, 대구는 대구감옥의 현장을 이나마 복원시켜 놓았다. 바로 뒤편에는 삼덕교회가 있었고, 교회 입구엔 이육사 기념조형물이 보기 좋게 서 있었다. 참 부러웠다.

이어 우리는 대구 중심가로 발길을 옮겼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고택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고택 안에는 이상화를 회고하는 여러 기념물이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절로 읊조렸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사이로". 이상화 시인은 대구 출신으로 국채보상운동의 선구 서상돈의 집이 바로 이상화 고택 맞은 편에 위치하고 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다음 우리는 김광석의 거리로 이동했다. 김광석이 대구에서 산 것은 다섯 살까지란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명지대학교를 나왔으니 김광석을 대구 출신 가수라고 보기 힘들지만, 대구에는 김광석을 추모하는 예술의 거리가 멋들어지게 조성되어 있었다. '문화 수도'라고 부르는 광주에는 왜 이런 거리가 없을까?

안동에서 만난 권오설의 철관

이튿날 버스가 우리를 싣고 간 곳은 안동이었다. 안동 오미리 마을. 그곳엔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를 지낸 김재봉 선생의 생가가 있었다. 생가 앞에는 김재봉의 정신을 새겨 넣은 바윗덩어리가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함'. 안동은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 선생을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로 모시고 있었다.

오미리 마을은 전체가 역사 유적지였다. 마을 언덕을 오르니 오미리 출신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기념탑이 우뚝 서 있었다. 노성태 선생은 김보섭 표지판을 가리키면서 "김보섭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앞장을 선 광주고보 학생이었음"을 힘주어 설명하여 주었다. 달빛역사동맹의 필연을 현장에서 보고 있었다.

버스는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이상용의 고택 임청각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불도저가 보이기도 하고 좀 수선스러웠는데 알고 보니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달려갔다.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들어서면서부터 심상치 않았다.

입구에 독립운동가의 지역별 숫자를 적은 통계표가 있었는데, 경북 출신이 전국 최고란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의 수로 보면 전라도가 최고였는데 허허…. 아직까지 독립운동기념관 하나 없는 내 고장 빛고을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빛고을엔 언제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이 오시려나.

이육사의 '광야'를 형상화한 영상물이 우리를 압도했다. 돌아서니 조선공산당 1차 사건을 알리는 동아일보가 전시관 유리창 너머에서 우리에게 김재봉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옆에는 박열과 후미코가 한복을 입고 판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진술하는 현장이 모형으로 생생하게 재현돼 있었다.

6·10만세운동의 주역은 권오설이었다. 고려공청의 1차 책임비서를 맡은 박헌영이 체포, 구속되자 권오설은 고려공청의 2차 책임비서를 맡았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을 이끈 조선공산당의 맹장이었다. 그런데 전시관에는 권오설의 철관이, 78년 만에 온전히 땅 속에 묻힌 권오설을 옥죄던 녹슨 철관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권오설의 철관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였다.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수형기록카드.
 6.10만세운동을 주도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수형기록카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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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철관.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조차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2008년 부인과의 합장 과정에서 철관이 드러났으며, 현재 경북 안동시 임하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철관.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조차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2008년 부인과의 합장 과정에서 철관이 드러났으며, 현재 경북 안동시 임하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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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8년 4월 14일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1897~1930, 건국훈장 독립장(2005))의 묘에서 철관이 발견되었다. 고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지 78년만이다. 1930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후 고인의 주검은 철관에 담겨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봉분을 쓰는 것과 친지들의 문상이 금지된 채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발견 당시 철관은 부식이 심한 상태로 두껑은 내려앉은 상태였다. 철관은 현재 경북 안동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사진제공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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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광우는 베스트셀러 <철학콘서트>의 저자이다. 1980년대에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와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하여 민주화운동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교 시절 첫 옥고를 치른 이래 20대에는 학생운동에, 30대에는 노동운동에, 40대에는 진보정당운동에 땀을 흘렸다. 지금은 인문연구원 동고송과 장재성기념사업회를 이끌면서 역사정신과 인문정신을 탐색하고 있다.
 

태그:#대구형무소, #달빛역사동맹, #이육사, #권오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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