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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의 종말>의 저자인 제시카 노델은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언론계에 진출하기 위해 애썼다. 기고문을 써서 언론사에 보내고, 기획 아이디어를 작성하여 잡지사에 메일로 보내기도 했다. 꾸준히 기고하며 몇 달이 지났지만, 대부분 싸늘한 답변을 받았다. 

낙담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그는 색다른 시도를 했다. 성별이 이름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J.D.'라는 이니셜을 사용하여 다시 기사를 기고하기로 마음먹었고, 발송할 때 사용하는 이메일 아이디도 새로 개설했다. 그리고 이전 기사와 같은 내용의 글을 언론사에 메일로 다시 발송했다. 

그러자 불과 몇 시간 만에 그의 기사가 채택됐다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단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생긴 변화였다. 이후 2년 가까이 프리랜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그는 성별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쓰자 자기검열도 줄어들어 "자기표현 측면에서도 더 자유로워졌다"는 걸 깨닫는다. 
 
실험을 한 것이다. 새 이메일 주소를 만들고, 이번에는 J.D.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내용물을 보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답장 한 통이 수신 메일함에 들어왔다. 그 기삿거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제시카라는 사람은 똑같은 기삿거리를 전달하려고 몇 달 동안 애썼는데, J.D.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성공했다. - 본문 20쪽 중에서

직접 겪은 '편향'을 토대로 제시카 노델은 더 자세히 연구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5년 동안 편향에 관련된 사례를 찾아 연구한 결과물이 바로 <편향의 종말>이다. 미국에서 2021년 출간된 이 책은 '세계경제포럼 올해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편견이 만드는 차별, 차별이 낳은 혐오
 
제시카 노델의 책 <편향의 종말> 표지 사진
 제시카 노델의 책 <편향의 종말> 표지 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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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찾은 차별의 사례들은 인종·민족·성적지향·성 정체성·종교 때문에 실생활에서 다른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었다. 동성 커플은 이성 커플에 비해 주택 대출을 거부당할 확률이 더 높았다. 범죄 경력이 있는 백인 취업 준비생은 범죄 경력이 없는 흑인 취업 준비생보다 2차 면접을 치를 확률이 더 높았다. 

통계상 라틴계나 흑인 환자는 백인 환자보다 아편계 진통제를 처방받을 기회가 더 적다. 게다가 고전적 연구 실험을 하는 학계에서 교수직을 따내려면,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2배 반 이상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도 여러 사례를 통해 드러났다. 

특히 인종에 관한 편향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끔찍한 수준이다. 미국에서 경찰에 의해 벌어진 총격사건 600건 이상을 분석한 결과, 경찰에게 아무런 위험을 가하지 않은 흑인 민간인이 경찰에 살해당하는 일이 백인에 비해 3배 더 많았다. 책에서는 여러 사건들과 통계를 토대로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 역시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복잡한 판단에 앞서, 인간의 뇌는 본능에 의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휴리스틱'이라고 불리는 머릿속 알고리즘이 작용한 것인데, 우리는 이를 흔히 '직관'이라고 부른다. 위험한 동물이나 갑작스러운 사고를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직관에 따라 행동하여 안전한 길을 찾기도 한다. 

문제는 직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인지하지 못한 채 '악의 없는 차별'을 실행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회사에서는 개인의 역량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경찰이나 의사들의 경우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400개 소가 넘는 병원에서 8만 명가량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어느 연구는 심근경색을 겪은 여성의 치료가 위험할 정도로 지연되며,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사망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심근경색이 일어난 뒤 여성은 심장 재활 과정을 밟거나 올바른 약품을 처방받을 확률이 낮다. (중략) 유색인 여성은 특히 빈약한 치료를 받을 위험이 크다. 여성의 증상과 불편을 무시하는 의료진의 이런 태도는 흑인, 알래스카 원주민, 미국 원주민 여성에게서 산모 사망률이 더 높이 나타나는 원인의 일부다. - 본문 276쪽 중에서

'암묵적 편향' 깨는 해법

스스로는 편견이 없고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낯선 대상을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와 같은 상황에 깔려있는 것이 '암묵적 편향'이라고 분석한다. 지난 수십 년간 사람들이 접한 문화에 수많은 편견이 촘촘히 쌓인 것이 원인이라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편견을 깨기 위한 해법이 '설득'이 아니라 '설계'라고 주장한다. 시스템을 갖춰 암묵적 편향이 작동되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진의 행동 점검 목록을 만들어 실행한 것이 책에 소개됐다.

치료 중 혈류 감염을 막기 위해 "100개 소 이상의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각자 손을 씻고 환자의 피부를 항생제로 닦도록 환기하는 5단계 점검목록" 등 의료진이 실시해야 하는 필수 행동을 정해놓고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

1년 이상 꾸준히 의료진이 점검 목록을 적용하자 수술 합병증은 36% 줄어들었고, 환자 사망률은 47% 하락했다. 시간이 흐른 뒤 존스 홉킨스 병원 의료진이 환자 관련 통계 수치를 다시 점검하자, 인종·젠더에 따른 치료 불균형도 크게 해소된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생각이 아닌 행동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시스템 설계로 효과를 본 사례는 더 있다. MIT의 젠더 할당제, 프랑스 로펌의 승진 시스템 개선 등은 특정 성별·인종이 위축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집단의 능률을 올렸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 그게 가장 눈부신 변화가 아닐까. 각종 차별과 혐오로 몸살을 앓는 한국 사회도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다.

편향의 종말 - 우리 안의 거대한 편향 사고를 바꿀 대담한 시도

제시카 노델 (지은이), 김병화 (옮긴이), 웅진지식하우스(2022)


태그:#제시카노델, #편향의종말, #차별, #편견,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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