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곡물창고 문이 열렸다. 담가(擔架)를 든 두 청년이 창고에서 뚜벅뚜벅 발걸음을 뗀 것은 해뜨기 직전인 오전 7시였다. 하루 중에 가장 추운 해 뜨기 직전이어서인지, 초겨울에 내린 진눈깨비 탓인지 청년들의 귀는 빨갰다.
  
담가에 실려 나간 시동생
 
   
담가에 올려진 것이 지난밤 추위를 이기지 못한 누군가의 시신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가마니로는 꺼멓게 변한 시신 발까지는 덮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따르던 청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좀 쉬었다 가세"라고 말하자, 앞선 청년도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려"라며 응답했다. 담가를 내려놓자마자 진흙투성이들이 담가를 적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들은 얼은 손을 비비며, 귀를 주무르기 바빴다. 어차피 물과 진흙에 젖은 발은 어쩔 수 없었지만, 우선 당장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빨갱이덜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이랴."
"그러니까 말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청년들의 투덜거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더 앉아 있다가는 우리도 공동묘지에 묻힐 신세가 되겠네."

차라리 움직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은 쉽게 모아졌다. 다시 담가를 든 청년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갈 심산이었다. 300미터나 갔을까, 청년들의 귀가 빨갛다 못해 거무튀튀하게 변할 때였다.

"잠깐만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청년들은 발걸음을 부지런히 했다. "나 좀 보시오." 악을 쓰는 소리에 청년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뭐여!" 목소리의 주인공이 여성임을 알아챈 청년이 반말지거리를 했다.

뜀박질을 하다 신발이 벗겨서인지 그녀의 발은 맨발이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시신 위에 덮힌 가마니를 확 제꼈다. "아이고"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시동생 지동목이었다.

"지 시동생이구만요. 지발(제발) 우리 집에 묻게 해주시오"라며 손을 비비는 여성을 본 청년들은 차마 내치지 못했다. 어차피 공동묘지 땅이 쉬이 파질 리도 없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충남 서산군(현재 태안군) 태안면 남문리 지동목의 시신이 태안 공동묘지에 묻힌 것은 1950년 12월 초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태안 보도연맹 사무실 터
▲ 보도연맹 사무실 터 태안 보도연맹 사무실 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아들 본 어미, 남편 못 본 아내
 

곡물창고에 갇힌 이들이 내리 굶고 있다는 소식에 태안면 반곡리 김태순의 어머니는 가슴을 졸였다. 귀한 아들이 '굶어 죽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선 것이다. 그녀는 누룽지를 만들어 가슴에 품고 싸리문을 나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낮에는 주변의 눈이 있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곡물창고 근처로 가자 하얀 물체가 보였다. 보초를 서는 이였다. 태안경찰서의 지시로 태안면의 자연마을별로 차출된 청년들이 곡물창고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었다.

보초에게 다가가 '아들을 불러 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운털이 박히면 큰일이었다. 창고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그녀가 발이 시려 종종거리고 있을 때, 창고 문이 열렸다.

하마터면 '아!'하고 소리를 낼 뻔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김태순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나올 때 그의 어머니가 쏜살같이 아들에게 다가갔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암말 말고 누룽지 얼른 삼켜라"라고 했다. 아들 김태순은 목이 매었지만 눈물 반 콧물 반을 하며 누룽지를 꼭꼭 씹었다. 조금 떨어진 창고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신성우(가명)는 이들 모자의 상봉을 눈감아 주었다.

김태순이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 나가기 전에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던 반면, 만삭의 이남숙(태안면 반곡리)은 창고에 갇힌 남편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남숙은 남편 박병칠이 1950년 9월 말 군경 수복 후 부역혐의로 곡물창고에 갇히자 안절부절했다. 몇 차례 곡물창고로 갔지만 면회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는 문득 대한청년단에서 완장을 차고 다니는 동네 오빠 나칠용(가명)이 생각났다. 그는 태안면 대한청년단 감찰대장으로 악명을 떨치는 이였다. 소위 '부역자'를 잡아들이는 데는 태안경찰서가 진두지휘를 했지만, 행동대장격 역할을 한 것은 대한청년단이었다. 그런 단체의 감찰대장을 맡고 있으니 이남숙이 보기에 나칠용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을 가진 이로 보였다.

"칠용이 오빠, 내 남편 좀 살려 주세요!"
"내가 뭔 힘이 있다고 그러냐."

그녀는 결혼 전에 살았던 태안면 동문리의 이웃집 오빠인 나칠용에게 사정했으나,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마을 곳곳이 공동묘지
 
   
낙동강 아래까지 후퇴했던 군경이 UN군의 참전으로 수복한 직후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 태안면 남문리 지동목 집으로 한 무리의 의용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다짜고짜 지동목을 연행했다. 영문을 모르는 당사자와 가족들은 황당하기만 했다.

지동목이 달구지를 끌고 다니다가 여성 의용경찰 집의 흙담 모퉁이를 훼손했다고 시비가 붙은 게 문제였다. 큰일도 아닌 일이 군경 수복 후 '빨갱이 죄'로 둔갑했다. 그는 곡물창고에 구금되었다가 초겨울의 매서운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담가에 실려 나왔다. 

지동목의 동생 지동우도 황당한 경우로 곡물창고에 구금되었다. 해방 후 호국군에 들어갔던 지동우는 국군 25연대에 입대했다가 경북 안동에서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다. 6.25가 발발하자 그는 아산·평택 전투에서 부상당했는데, 소속 부대 대열이 온데간데 없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총알이 허벅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는데, 당시 수술할 병원이 없어 집에서 자신의 손으로 몸속에 박힌 총알을 직접 빼냈다. 피가 흥건한 허벅지에 빨간약이라 불린 머큐로크롬을 발랐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수복 후 탈영이라는 혐의로 곡물창고에 구금되었고, 형 지동목처럼 창고에서 얼어 죽었다.

태안면 지동목·지동우 형제가 황당한 이유로 '부역혐의자'로 연행되었다면 당시 서산군(현재의 서산시와 태안군) 일대에서는 대대적인 마녀사냥이 벌어졌다. 이른바 인공시절에 북한군을 도운 빨갱이들을 잡아들인다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 8일 서산에 복귀한 서산경찰은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협력해 부역혐의자 1천여 명을 검거해 송치했다. 당시 서산경찰서와 별도로 설치된 태안경찰서는 태안면 부역혐의자들을 태안경찰서 유치장과 인근에 있던 김이환 소유의 영단방앗간과 이상돈 소유의 곡물창고에 구금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부역혐의로 곡물창고에서 얼어죽은 지동목-지동우 형제 동생 지동기
▲ 증언자 지동기 부역혐의로 곡물창고에서 얼어죽은 지동목-지동우 형제 동생 지동기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지동목·지동우 형제의 동생인 지동기(1935년생, 88세, 6.25 당시 태안면 소재지 거주)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의 형들을 포함한 부역혐의자가 구금된 곳은 이상돈 곡물창고가 아니라 '이기팔' 곡물창고였다고 한다.

태안경찰서 유치장과 곡물창고에 구금된 이들은 1950년 늦가을과 초겨울에 얼어 죽기도 하고 태안면 곳곳에서 총살을 당했다. 학살은 장산 공동묘지와 태안여고 인근 교통호, 한티재에서 벌어졌다. 태안면 소재지 곳곳이 공동묘지가 되었다.

그들의 시신 위에는 약간의 흙만이 뿌려졌을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개들이 시신을 물고 다니며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유가족과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개를 쫓아다녔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느티나무 아래에 즐비한 시신

"동기야, 네 매형이 사기실재에서 죽었댜."

둘째 누나 지동해의 울음소리에 지동기는 죽음의 땅으로 뜀박질을 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의 끅끅 거리는 소리에 지동기는 울컥했고, 시신 탄 냄새로 머리가 지끈지끈 했다.

현재 태안군으로 편입된 지역 보도연맹원 약 100명이 태안군 태안면 백화산 아래 사기실재에서 후퇴하는 태안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태안경찰들은 1950년 7월 12일 보도연맹원들을 2인에서 5인씩 묶은 후에 보도연맹원들의 몸에 휘발유를 뿌렸다. 그런 후에 예광탄을 쏘아 보도연맹원들의 옷과 살에 불이 붙자, 사방으로 뛰는 이들을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태안유족회, 태안 민간인학살 백서 2018년)

살아 있는 이들에게 휘발유를 뿌린 이는 누구인가?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김〇환이라는 사람이 뿌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보고서에는 그의 소속과 전력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동기는 그가 일제강점기에 경찰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에는 서북청년회를 후원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지동기는 매형 이종목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나머지 시신들은 소달구지로 면사무소 앞 느티나무로 옮겨졌다. 느티나무 아래에 시신이 즐비했다.

보도연맹원들을 불태우고 총살한 태안경찰들은 태안우체국 앞에서 목탄버스에 몸을 싣고 이북면(현재의 이원면)과 남면 사이에 있는 백사장으로 집결했다. 그곳에서 인근에 있는 배를 동원해 남쪽으로 후퇴했다. 당시 안흥면에 있던 통통배도 동원되었다고 한다.
 
사기실재에서 학살된 시신들을 옮긴 자리(느티나무 아래)
▲ 시신이 즐비했던 느티나무 아래 사기실재에서 학살된 시신들을 옮긴 자리(느티나무 아래)
ⓒ 박만순

관련사진보기

        
국방경비대 입대한 남로당원

1946년 1월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태안면 백화산에 은거하고 있던 이수호(가명)는 즉시 하산했다. 남로당원인 그가 하산한 이유는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 전 태안국민학교에서 서북청년회에 테러당한 이수호를 포함한 태안면 동문리·남문리 남로당원들은 백화산으로 도피를 했었다. 자신들의 신분이 온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다시 면으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에 이수호는 환호를 했다.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울타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수호가 단지 신분 세탁만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대 후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태안면 대한청년단 감찰부장을 맡아 빨갱이 사냥에 앞장섰다. 특히 군경 수복 후 부역혐의자 검거에 앞장서 관련 가족들의 원성을 샀다. 지동기는 "6.25 때 제 형 또래 중에 나칠용과 이수호한테 안 맞은 사람이 없었어요. 내 또래도 마찬가지구요"라고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남로당원이었던 이수호의 동생 이〇호는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사기실재에서 학살당해다는 점이다. 어제의 사상적 동지였던 형제가 6.25 와중에 동생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고 형은 '빨갱이 사냥(?)'에 앞장선 것이다.

 

태그:#담가, #곡물창고, #부역혐의, #남로당, #국방경비대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