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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업 때 만나는 고1 중에 '괴물'이 한 명 있다. 정치나 경제, 시사 상식 등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뺨치고, 영어보다 러시아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며, 교과서보다 신문 읽기를 더 즐겨하는, 참으로 독특한 학생이다. 영어와 수학 성적 때문에 그렇지, 일단 대학만 합격하면 그의 특출난 재능이 빛을 발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제자다. 

얼마 전 갑자기 날 찾아와 수업 한 시간을 자신에게 달라고 했다. 친구들 앞에서 강의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다. 그의 뜬금없는 부탁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가 염두에 둔 강의의 주제는 '대한민국 학살의 역사'였다. 광복 직후 냉전 상황과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원인과 과정, 영향 등을 색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고 싶다고 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을 앞둔 때이니만큼 흔쾌히 승낙했고, 나도 친구들과 함께 수강하겠다고 덧붙였다. 자타공인 '현대사 덕후'인 그는 이따금 어디선가 희귀한 자료를 구해서 교과서의 내용을 반박하며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한다. 적어도 그에게 현행 교과서는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해 심심풀이용 읽을 거리도 못 된다.

그렇듯 남다른 그와 공개적으로 '계급장 뗀' 독서 토론을 벌였다. 같은 책을 읽은 뒤 소감을 나누고 서로의 주장에 대해 논박하는 모습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나아가 서로 문답한 내용을 정리해 교과서 대신 활용해볼 심산이다. 연초 교육 계획에는 없던 '번외 수업'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업'이라는 확신이 섰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으로 '계급장 뗀' 독서 토론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
 조국 교수가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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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고 토론할 책은 최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쓴 <조국의 법고전 산책>(오마이북)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선정이었다. 우리 현대사 속 인물과 사건들의 이면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아이에게 서양의 법고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했고, 무엇보다도 '주홍글씨'로 각인된 저자 조국에 대한 또래 아이들의 평가도 직접 전해 듣고 싶었다.  

말이 독서 토론이지, 서로의 주장에 맞장구치고 살을 붙이는 대담 형식으로 흘렀다. 대체로 나는 질문했고, 그는 답했다. 그는 책을 통째로 외운 듯 자신의 주장을 펼칠 때 400쪽이 넘는 책 속 관련된 부분을 곧장 펼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억을 되짚기 위해 곳곳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아 너저분한 내 책과 비교가 됐다.

대신 그에겐 두툼한 노트가 책 옆에 놓여 있었다. 밑줄 그어가며 읽다가 인상 깊게 다가온 문장을 따로 필기한 것이다. 다 읽고 난 뒤의 복습용이기도 하지만, 다른 법고전의 내용과 대조해보는 맛이 쏠쏠하다고 했다. 실상 그 문장들이 화두였고, 그것에 대한 서로의 해석이 토론의 전부였다. 재미있는 건, 그와 내가 화두로 삼은 문장들이 대동소이했다는 점이다.

참고로, 목차와 상관없이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장 자크 루소, 존 로크, 존 스튜어트 밀을 지나 루돌프 폰 예링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이 활동했던 근현대 시기까지 출간된 열다섯 권의 법고전을 다루고 있다. 주제 역시 사회계약과 사법 통제, 자유와 권리, 시민불복종과 평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책 제목의 첫머리로 내세운 조국 전 장관에 대한 평가로 말문을 열었다. 그가 정치인이기 이전에 법학자였다는 점을 잠깐 잊고 있었다며, 그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조국 전 장관의 정체성을 새삼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언뜻 촉망받는 법학자에서 '내로남불'의 정치인으로 낙인찍힌 현실에 대한 회한이 느껴진다고도 했다.

"이 책 제대로 읽으려면 저자 '조국' 이름 지워야" 

다음은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그와의 독서 토론을 축약한 내용이다. 책 속 손꼽은 문장들도, 바라보는 관점도 대개 서로 엇비슷했다. 그의 참신한 질문과 명징한 주장을 듣다 보면, 교사인 나 역시 한 뼘씩 성장하는 걸 느낀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가르침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 : "세간에는 조국 전 장관이 검찰 권력에 보복을 당한 거라는 여론이 적지 않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대들었다 되치기당했다는 뜻이다. 일부 유죄를 받았지만, 적어도 그와 가족에 대한 법적 처벌이 가혹하다는 견해에는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하다."
학생(학) : "스스로 진보 세력임을 자임해온 그의 업보라고 생각해요. 도덕성이 기반인 진보 세력에겐 티끌만 한 부정도 부풀려지기에 십상인데, 스스로 너무 나이브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람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이야기도 너무 자주 듣다 보니 식상해하는 것 같고요."


나 : "조국 전 장관은 '너를 죽일 수 없는 것이 결국 너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는 니체의 말을 믿고 견디며 쓴 글이라고 했는데, 이 책에 대한 총평을 한 줄로 정리한다면?
학 : "그의 자성과 자책을 수용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그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읽는 내내 '조국 사태'의 편견이 끼어들면 오독할 우려가 있다고 봐요. 그냥 원래 자리로 돌아간 법학자가 법고전을 읽고 쓴 강의록 정도로 이해하면 좋겠다 싶어요."


아이는 책 제목의 조국이라는 두 글자가 거슬린다고 했다. 그의 이름을 내걸어 책이 더 많이 팔릴지는 몰라도 정독하는 데엔 방해가 될 거라고 꼬집었다. 그래선지 토론 도중 '조국 사태'와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될 때마다 그는 화제를 딴 데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법죄의 유일한 척도는 사회에 끼친 해악" 
 
연초 교육 계획에는 없던 '번외 수업'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업'이라는 확신이 섰다.
 연초 교육 계획에는 없던 '번외 수업'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수업'이라는 확신이 섰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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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소개된 법고전 가운데 네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꼽는다면?"
학 : "이탈리아의 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 나오는 '범죄의 유일한 척도는 사회에 끼친 해악'이라는 문구입니다. 형벌은 범죄에 비례하여야 한다는 건데, 잔혹한 형벌은 정의의 본질에 반한다는 설명이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법이란 국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여겨왔는데, '법의 주권'이 사회계약을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에 무릎을 쳤습니다."


나 : "이심전심이다. 다만, 난 그 대목에서 조국 전 장관의 사례가 포개졌다. 그와 가족에 대한 처벌이 과연 체사레 베카리아가 설파한 정의의 본질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들어서다. 그런데, 그보다 '법이 소수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지적엔 화들짝 놀랐다. 마치 대한민국 현대사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다."
학 : "맞아요. 우리에겐 '법의 주권'이 국가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강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국가는 공동체 유지라는 명분 아래에 얼마든지 잔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겠죠. 전쟁 중에는 물론, 독재정권 시절 숱하게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은 그렇게 용인됐던 듯해요. 이유야 어떻든, 그들 모두 법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잖아요."

나 :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조롱에서 알 수 있듯, 국가 형벌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도 거기서 비롯됐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추상같은 법이 독재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한 칼로 활용되다 보니, 결국 정의가 불의 앞에 무릎 꿇고 가치관이 전도된 사회가 됐다고 본다."
학 : "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 줄 알았는데, 출처가 우리나라 법정이었다는 점에 조금 놀랐어요. 1988년 남의 집에서 556만 원을 훔친 죄로 징역과 보호감호까지 도합 17년형을 선고받은 지강헌이 TV 앞에서 한 발언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알았어요. 그는 당시 공금 76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이 징역 7년을 선고받은 사실에 격분해 인질극을 벌이기까지 했죠. 전경환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친동생이었으니, 그의 외침은 공분을 자아내기 충분했던 셈이죠."


고 노회찬 전 의원의 촌철살인대로, '법이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는 건 요즘 아이들도 모두 동의하는 바다. 마치 "네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처럼, 법조차 권력과 재산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실정이다. 근래 화제가 된 재판 관련 뉴스들은 아이들의 뒤틀린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나 : "요즘 들어서는 '유권무죄, 무권유죄'라거나 '유검무죄, 무검유죄' 등의 비슷한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줄 댈 권력이 없으면 없는 죄도 뒤집어쓰고, 검사들은 죄를 지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조롱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온 지도 35년이 지났는데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학 : "저는 '지강헌 사건' 관련 내용을 읽는 순간 '법꾸라지'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법은 권력에 봉사하는 도구를 넘어, 법에 대해 잘 아는 소수가 법을 모르는 다수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보통 사람들이라면 엄벌에 처해질 범죄도 판검사들이 피고가 되면 갖은 핑계로 무죄가 선고되는 게 익숙한 풍경이잖아요."


체사레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에 머문 대화가 자연스럽게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으로 넘어갔다. 기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법고전들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 의무라는 예링의 주장은 결국 책 말미에 '시민불복종'의 정당성을 갈파하는 논리로 귀결될 터다.

나 : "독서 노트에 적힌 네 메모를 보니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오는 문장들이 유독 많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니?"
학 : "그냥 소설책 훑듯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대목이 많아섭니다. 예컨대, '법의 생명은 투쟁'이라는 짧은 문장은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당장 이 문장을 권력자가 본다면, 심기가 매우 불편할 것 같습니다."


"법대로 하자"는 말 꺼내지 않겠다는 아이의 다짐
 
밑줄 그어가며 읽다가 인상 깊게 다가온 문장을 따로 필기한 것이라고.
 밑줄 그어가며 읽다가 인상 깊게 다가온 문장을 따로 필기한 것이라고.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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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루돌프 폰 예링은 '권리 침해에 맞서 싸우는 건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고 역설하고 있다. 법이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라고 한다면, 권리 찾기 투쟁이야말로 법이 존재하는 이유 아닐까. 나아가 예링은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평화를 위해서도 투쟁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학 : "전 1969년 '5원짜리 소송'을 낸 한 시민의 사례를 통해 <권리를 위한 투쟁>이 강조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하게 됐습니다. 고장 난 공중전화가 삼킨 5원을 물어내라고 소송을 낸다는 건 분명 바보짓이지만,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정부의 무능을 경고하기 위한 도덕적 의무라는 식입니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할 사람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만."

나 : "'권리가 자기의 투쟁을 포기하는 순간부터 권리는 스스로를 포기한다'는 예링의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권리를 보호받지 못한다'는 익숙한 금언의 원문이다. 내남없이 권리 찾기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지상 명령처럼 여겨져 가슴이 뜨거워진다."
학 : "전 <권리를 위한 투쟁> 단원을 반복해 읽으면서, 최근 정부에 '백기 투항'한 화물연대 파업 사태가 떠올랐어요. 정부의 강경 대응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다 보니 파업을 이어갈 동력을 이내 상실하고 말았죠. 예링의 주장대로라면, 남의 권리 찾기 투쟁에 내가 반대하고 나선 꼴이죠. 나와 남의 권리를 상충하는 걸로 판단한 거겠죠. 제가 '5원짜리 소송'이 더는 불가능할 거라고 단언한 이유입니다."


예링의 주장에 대해 토론하며, 나는 '저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한'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그는 '나치가 다른 이들을 잡아갈 때 침묵했다가, 정작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 자신을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참회한 마르틴 니묄러의 시 <침묵의 대가>를 떠올렸다.

두 시가 풍자하는 내용은 달라도,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람들이 권력자의 '개돼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루돌프 폰 예링의 처방전이라는 데엔 서로 동의했다. 토론을 매조지을 무렵, 그는 비로소 이 책의 출판 의도를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엄한 법일지라도 완전무결할 수도 없고 불완전한 사람에 의해서 운용되는 법이니, 법 앞에 주눅 들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는 뜻 아니겠느냐는 거다.

그는 앞으로 "법대로 하자"는 말을 일절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입버릇처럼 해대는 이 말은 상호 간의 분쟁 중에 상대방을 무릎 꿇리기 위해 법을 일종의 권위로 여기면서 맹목적으로 의존하려는 행태다. 

애초 법은 오류투성이로 불완전할 뿐더러 불의한 권력에 의해 오남용된 사례가 숱한 마당이니 준법 이전에 의문을 가지는 게 옳다는 거다. 이 책이 고1 '괴물'에게 건넨 묵직한 교훈이다.

조국의 법고전 산책 - 열다섯 권의 고전, 그 사상가들을 만나다

조국 (지은이), 오마이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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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조국의 법고전 산책, #범죄와형벌, #법고전산책, #시민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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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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