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큐멘터리 <나는 마을방과후 교사입니다> 개봉(2023년 1월 12일)을 앞두고, 필수 노동이자 그림자 노동의 영역에서 고군분투 해 온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심을 다해 일하고 계신 필수 돌봄 노동자들의 수고와 존재를 알리고자 8편의 기획기사를 준비했다.[기자말]
각자의 삶을 자유 비행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 착륙해 보니 딴 세상이었다. 부모가 되어 있었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처럼 막막했다. 사막은 아무 것도 없어서 사막이 아니라, 아무 것도 겪어 본 적 없는 세상이라 사막일지 모른다.

우리도 이곳에서 '어린 왕자'를 만났다. 비행사가 만난 어린 왕자는 양을 그려달라고 했고, 우리가 만난 어린 왕자는 소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다. 없는 실력에 여러 장의 소나무 그림을 그려보였지만 어느 것도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했다. 비행사가 어린 왕자에게 양 대신 나무 상자를 그려준 것이 기억나서, 소나무 대신 도토리를 그려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도토리 한 알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들어있다고 한다. 그걸 안 이상 도토리는 더 이상 도토리 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도토리들은 소나무가 되어 가고 있는 도토리 단계의 소나무이다. 도토리 한 알이 어떤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될지 다 자라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

도토리들은 저마다 타고 난 속도와 방향이 있지만, 뿌리 내리는 토양과 싹이 올라와 맞이하는 날씨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성장해 간다. 한 그루의 소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가정이라는 이름의 화분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을이라는 정원이 필요했다.
 
 아이들과 팔씨름 중인 마을 방과후 선생님. 도전을 해오는 아이들도 선생님이라고 봐주지 않고 도전을 받는 선생님도 아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다큐 속 장면  아이들과 팔씨름 중인 마을 방과후 선생님. 도전을 해오는 아이들도 선생님이라고 봐주지 않고 도전을 받는 선생님도 아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코로나 시국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실내에 모일 수 없자, 마을 방과후 다양한 일정들에 제약이 많았다. 대안으로 옥상에 모여 한낮의 태양 아래서 만나 얼굴 보고 회의를 하는 장면.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다큐 속 한 장면. 코로나 시국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실내에 모일 수 없자, 마을 방과후 다양한 일정들에 제약이 많았다. 대안으로 옥상에 모여 한낮의 태양 아래서 만나 얼굴 보고 회의를 하는 장면.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린 왕자가 소행성 B612를 떠나 개성 강한 어른들이 지키고 있는 6개의 행성을 거쳐 7번째 행성 지구에 도착했듯이, 우리 모두는 저마다 여정에 따라 한 마을에 모였다. 어린 왕자가 만난 어른들만큼이나 다양한 삶을 지향하고 있지만 한 가지만큼은 똑같이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도토리가 도토리답게,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자라는 세상이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시착한 무지의 사막에서, 아이가 아이답게 자라는 곳 '도토리 마을 방과후'라는 오아시스를 같이 만들어 가는 이유이다.

주양육자인 경우에 자녀가 취학하는 시기에 휴직이나 퇴사를 결정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은 이르고, 방과 후에 아이들이 갈 곳이 없다는 증거이다. 여전히 취학 아동 돌봄의 공백은 개인의 숙제로 남아 있다. 교육면에서도 가정과 학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원이나 클리닉이 아니라, 아이들은 마을 안에서 일상 안에서 생활 교육이 필요하다.

돌봄과 교육 사이, 도토리 마을 방과후 선생님이 소중한 이유이다. '부모-되기'에서 '학부모-되기'라는 새로운 영역에 진입한 우리들에게도 친구가 필요하고 선생님이 필요했다. 도토리 마을 방과후는 어린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돌봄과 교육을 서로 주고받으며 지내는 곳이다.
 
 한달에 한번 학년 방모임에서 아이들 지낸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만 하지 않고 부모들도 놀이를 한다. 마을 방과후 선생님이 만든 "맥도날드 게임"을 배우고 있다.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다큐 속 한 장면.  한달에 한번 학년 방모임에서 아이들 지낸 이야기를 나눈다. 회의만 하지 않고 부모들도 놀이를 한다. 마을 방과후 선생님이 만든 "맥도날드 게임"을 배우고 있다.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어른들이 나이에 상관없이 이름 대신 별명을 부른다. 아이들도 어른들에게 다른 호칭 대신 별명을 부르며 친구처럼 평어를 쓴다. 터전, 아마, 마실, 나들이, 들살이, 모꼬지, 해보내기 잔치 등 낯선 용어와 활동들이 있다.

매년 신입 조합원 교육 때마다 자세히 설명하지만 경험하기 전에는 해독이 어려운 것들이다. 알고 나면 쉬운데 모를 때는 어려운 암호 같다. 암호를 풀고 문이 열려도 탁 트인 풍경이 아니라 미로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코너를 돌 때마다 문이 아니라 벽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가 만나는 벽도 또 다른 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굳이 출구를 찾지 않아도 되는 놀이 공간에서 지내다 보면, 사막의 오아시스는 점점 넓혀지고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니게 된다.
 
마을 방과후 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작은 산 성미산에 자주 오른다. 깜박하고 물통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는 마을 방과후 선생님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다큐 속 한 장면. 마을 방과후 아이들은 마을에 있는 작은 산 성미산에 자주 오른다. 깜박하고 물통을 가져오지 않는 아이에게 물을 나눠주고 있는 마을 방과후 선생님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어린 왕자는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여우에게 배웠다면, 우리는 도토리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에게서 배웠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장미의 까탈에 숨어 있는 마음 읽는 법을 가르쳐줬다. 선생님들은 부모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지나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시 볼 수 있게 가르쳐줬다. 길들인다는 건 서로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기울이고 수고를 기쁨으로 선물 받는 관계임을 알려줬다.

우리는 서로를 길들이며 같은 것을 바라보고 같은 설렘과 행복을 나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 윗입술이 쭉 튀어 나오는 내 아이의 특징을, 애써 눌러오다가 격하게 터져 나오는 내 아이의 감정 타이밍을 나만큼이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또 다른 어른들이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다. 노란 밀밭을 닮은 어린 왕자의 황금빛 머릿결을 같이 기억하는 또 다른 여우가 있다면, 어린 왕자를 처음 길들였던 여우는 더 크게 설레고 더 오래 행복할테니까.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배운 어린 왕자는 수많은 장미와 같지 않은 단 하나의 장미를 비로소 알아본다. 숲을 이루는 수많은 나무들도 자연이 정성껏 길들여 온 생명들임을, 세상의 모든 도토리도 같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된 우리는 어린 왕자가 정원에서 마주한 장미들 하나하나도 누군가에게는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한 존재임을 안다.

한 아이만을 향하던 사랑이 모두의 아이에 게로 향하는 과정에서 부모와 학부모 사이를 벗어나 비로소 어른이 되어 간다. 아이들이 타고 난 속도에 맞게 성장하고 스스로 배워갈 수 있도록 기다려준 선생님들이 부모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도 기다려줬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이 서로를 길들이는 방식이었음을 안다.
 
나들이는 마을 방과후 중요 활동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밖에서 실컷 놀다 들어오는 아이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 다큐 속 한 장면. 나들이는 마을 방과후 중요 활동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밖에서 실컷 놀다 들어오는 아이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다.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어른이'들의 더딘 성장에 비해 '어린이'들의 성장은 얼마나 빠른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아이들 모습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다.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훌쩍 넘어 왔듯이 아이들은 곧 청년기로 접어들 것이다. 어린 왕자를 떠나 보낸 뒤에 비행사는 하늘의 별을 올려 본다. 수많은 별들 중에 어린 왕자의 별을 보고 있을 것이다. 여우도 장미도 뱀도 같은 별을 보며 어린 왕자를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도토리 마을 방과후에서 만난 반짝이는 순간들을 떠올리듯이. 보통의 단어와 설명에 담을 수 없는 관계, 곁을 나눈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의미를 배웠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둠별로 행주산성까지 다녀오는 자전거 라이딩 미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다른 모둠 아이들과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축하를 해준다.
▲ 마을 방과후 활동_자전거 라이딩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둠별로 행주산성까지 다녀오는 자전거 라이딩 미션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다른 모둠 아이들과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축하를 해준다.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도토리 시절, 같은 기억을 품고 소나무가 되어 가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 긴 호흡으로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응원해 준 선생님들. 도토리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 모습에서 우리를 본다. 육아의 사막을 건너는 동안, 부모가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를 키운 것을 깨달았듯이 모든 가르침이 아이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선생님들에게 동지애를 느낀다.

내 자식도 아닌데 그럴 수 있었다는 것에 존경심이 일어난다. 교육은 가르침을 들이 붓는 게 아니라 촛불 하나를 켜는 것이라고 했다. 촛불에 불 붙이는 일도 어른이 도와주지 않고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낸 타이밍에 자기만의 방법으로 시도할 때까지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일임을, 아이들 곁에서 기다리고 응원하는 선생님들을 통해 배웠다.
 
새학기에 학교 적응 하느라 애쓴 1학년들의 100일을 축하하는 날. 코로나 시국이라 건물 밖에서 백일 잔치를 준비하고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기념 사진 한장을 남기는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
▲ 마을 방과후 활동_백일 잔치 새학기에 학교 적응 하느라 애쓴 1학년들의 100일을 축하하는 날. 코로나 시국이라 건물 밖에서 백일 잔치를 준비하고 아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기념 사진 한장을 남기는 마을 방과후 선생님들.
ⓒ 도토리 마을 방과후

관련사진보기

 
비행사는 사막에서 어린왕자를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어린 왕자를 필연적으로 만나기 위해 사막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곳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부모가 된다는 일에 한 걸음 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운 좋게도 도토리 마을 방과후라는 오아시스를 찾았고, 지혜로운 선생님들을 만났다. 아이와 아이가, 아이와 어른이, 어른과 어른이 서로에게 배워가는 곳. 우리 모두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고, 이웃이고, 마을이기도 한 도토리 마을 방과후는 매일 매일 새로운 배움이 일어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오아시스 같은 기관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2021년 공동육아 초등 방과후는 전국 19개소가 회원기관으로 가입되어 있었으나, 2022년 12월 현재 회원 기관수는 17개소로 감소했고, 전체 공동육아 방과후 교사회원 수 역시 2021년 약 45명에서 2022년 현재 35명으로 급격히 줄어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흐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매월 방과후 대표 교사 회의에서 터전마다 교사 퇴직 소식이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나야 하고, 보내고 싶지 않아도 보내야 하는 현실이다. 마을 방과후가 문을 닫는 만큼, 방과후 교사가 일을 그만 두는 만큼 육아와 돌봄의 영역은 사막화가 되어 간다.

돌봄은 시스템 안과 밖을 오가며 어디에서나 필요하고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어디서나 필요한 돌봄이 언제나 가능하려면, 어디서나 일어나는 돌봄에 사회적인 이름을 부여하고 권리를 지켜내는 지속가능한 지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돌봄도 돌봄이 필요하다. 아이들을 돌보는 부모들도 돌봄이 필요했고, 선생님들도 돌봄이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꼭 필요한 노동으로 우리 사회 전체를 돌봐준 돌봄 노동자분들에게 이제는 우리가 돌봄을 전해야 할 차례다.

그들의 존재와 수고를 알아보고 제도적 개선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 개인의 고난은 물론 국가적 재난에서 돌봄은 오아시스가 되어 줄 것이다. 서로의 돌봄을 주고 받으며, 돌봄이 돌봄을 돌보는 선순환이 이 사회를 안전하게 만들어 갈 것이라 믿는다.

글_황다은(별명:하수오)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을 쓰고 일상의 영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듭니다. 성미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협동조합 도토리 마을방과후' 안에서 두 살 터울의 형제를 키운 '아마'('아빠+엄마'의 합성어)'이기도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기사는 영화 속에 출연한 도토리 마을방과후 선생님들이 쓰고 엮은 책, <아이들 나라의 어른들 세계>에 실린 글 중 일부입니다. 1월 출간 예정
* 다큐멘터리 <나는 마을방과후 교사입니다> 1월 12일 극장 개봉합니다. 


태그:#돌봄, #노동, #교육, #육아, #방과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대본을 쓰고, 다큐멘터리를 만듭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