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어린이가 됩시다, 나는 습관적으로 우리 반 학생들에게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정작 교사인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밤은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는 나의 자유시간이었고, 아침 잠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고등학교에 0교시가 있었던 시절, 이른 등교가 너무 힘들어서 '부모님의 가게 운영 때문에 등교를 늦게 해야 합니다' 하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대학에 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도 취침과 기상 시각을 내키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수면 패턴을 기준으로 인간을 크게 '미라클 모닝족'과 '올빼미족' 두 부류로 나누어 본다면, 나는 단연코 올빼미족에 속했다.
나의 하루 계획에는 대개 '심야의 딴짓'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정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은 하기 힘든 시간이므로 드라마를 보거나 스포츠 하이라이트, 유머 게시판을 훑으며 긴장을 풀었다. 십 대 시절부터 지속된 '밤에 소소하게 놀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일상으로 자리 잡았는데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았다.
내 시간을 보상 받고 싶어서
밤에 놀고 싶어서라도 그날 해야 할 일은 낮에 가급적 해치워 버려야 한다는 묘한 채찍 심리가 있었기에 '심야'는 나를 위한 작은 선물쯤으로 남겨두었다. 와사비 콩이나 메이플 시럽에 절인 견과류를 안주 삼아 맥주를 홀짝이는 밤은 때때로 노동의 이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진이 빠질 정도로 지친 날이 아니면 나는 보통 잠보다 자유를 골랐다.
직장에서 시달리고, 아이 둘을 키우는 육아의 회오리 같은 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혼자만의 정적이 보장되는 '심야'를 기다렸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시름시름 떨어져 가던 체력은 이상하게도 달이 떠오르면 다시 되살아났다. 독특한 늑대인간 증후군이랄까. 장기간 반복된 특정한 행동 패턴으로 인해 나의 신체 시계가 적응해 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시침이 숫자 11을 넘어서면, 나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불에서 나와 서재로 향했다. 헤드폰을 쓰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 화면에 빛이 돌면, 순수한 개인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운이 몸속에 쫙 퍼져나갔다. 그렇게 개인 시간을 누리다가, 새벽 한 시 늦으면 두 시 무렵에 잠들었다. 직장인으로서 나의 기상 시간은 고정되어 있었다. 출근과 아이들 등교 준비로 반드시 일곱 시 전에는 일어나야만 했다.
내가 선호하는 수면량은 7시간 이상이므로 당연히 피곤이 몰려들었다. 홍삼농축액을 퍼먹고, 모닝커피를 마셔야지만 정상 모드로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여태 느껴보지 못한 컨디션이었다. 일시적으로 며칠 처지는 정도가 아니라 종합적인 활력이 감퇴하는 듯한 명백한 후퇴의 감각이었다.
지금껏 나는 여섯 시간만 자도 괜찮았다. 퇴근 후 소파에서 잠깐 눈 붙이고, 커피 타이밍을 조절해주면 일상의 과업을 처리하는데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피로 회복 속도가 더뎌지더니 급기야는 누적된 피로로 나도 모르는 사이 눈꺼풀이 내려앉고는 했다. 한 달 복용 분량이 십만 원이 넘는 독일제 프리미엄 비타민도 소용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 건가. 갑자기 차갑고 습한 위기감이 관자놀이 부근을 스쳐갔다. 당혹스럽게도 몸의 변화는 확실하고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내가 선명하게 의식할 수 있을 정도라면 이미 체력 저하는 물밑에서 상당 부분 지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활에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그게 현재의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지금껏 나의 컨디션 관리 수단은 커피였으므로, 커피 섭취 시각을 조절해 보았다. 오후 세 시에 마시던 커피를 두 시로 당겨보거나, 네 시로 늦춰 보았다. 그러나 마시는 양이 동일한 탓인지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식후 졸음을 쫓기 위해 점심 식사량을 줄여보기도 했지만 무의미했다. 그냥 피곤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빨리 인정해야만 했다.
컨디션이 저하된 원인
'잠을 더 자야만 한다.'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밤에 노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꼼수를 찾았던 것뿐이다. 피곤해서 아이들 재울 때 같이 곯아떨어진 다음 날은 그렇게 에너지가 넘칠 수 없었다. 불로불사의 영약을 마시기라도 한 듯 모든 활동에 거침이 없고 자연스러운 기쁨이 체내에 감돌았다. 여섯 살 딸처럼 열 시간이나 잤으니 에너지로 가득한 상태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푹 자면 모든 것이 좋았다.
여러 모로 점검해 보아도, 근래에 나의 컨디션이 저하된 원인은 수면 부족이 확실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급작스레 생활을 바꾸기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내게 심야의 개인 시간은 취미이자, 긴장을 푸는 여가활동이 아니었던가. 강제로 눈을 감고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긴다고 해서 단기간에 수면 패턴이 바뀔 리는 만무했다.
'잠이 안 온다. 놀고 싶다.'
가만히 누워서 최대한 오래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뜨면 일어나게 될까 봐 버틴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누워 있어도 졸리지 않았다. 목이 타서 물을 마시러 나갔더니 시계는 이미 열 두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약간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대로 다시 정신을 차려 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숙면을 다루는 도서에 제시된 대로 두유를 살짝 데워 마신 후 이를 닦고 누웠다. 속이 따듯해지는 기분 탓인지 나는 곧 잠에 들었다.
수면 시간은 7시간 20분. 나쁘지 않은 수치였다. 몸을 움직이는데 위화감이 없고, 찌뿌둥한 느낌도 없었다. 역시 잠이 보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싶어 <수면의 과학>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저자 헤더 다월-스미스는 인간 웰빙의 조건이 숙면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런던 수면센터에서 심리치료사로 근무하며 불면 환자를 상대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책에 녹여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로 밤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경우를 찾아보니 '과한 카페인'과 '블루라이트 노출' 그리고 '밤에 노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믿음이 숙면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개별 상담을 받는 마음가짐으로 각 항목에 맞는 대응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먼저 카페인. 커피 러버인 나에게 커피를 끊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기존에 마시던 양으로 오전에만 커피를 즐겼다. 카페인은 대략 여섯 시간 이상이 경과하면 배출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오전에 마시는 커피는 숙면에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나는 카페인 과민성도 없으니 커피를 마시는 행위 자체를 중단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블루라이트 노출은 스마트 폰을 찬장 높이 숨겨두는 방법으로 해결했다. 모니터와 스마트폰 화면을 '읽기 모드'로 설정하는 것도 유효하지만, 가장 좋은 방안은 디스플레이 자체와 멀어지는 것이다. 나의 경우 집안 조도를 낮추고 책을 읽었더니 금세 꾸벅꾸벅 졸게 되었다. 자극적인 시각 정보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도 몸에게 '이제 잘 시간이야' 하고 다독이는 효과가 있었다.
드라마 몰아보기의 재미는 사라졌지만
마지막으로 내 마인드를 다스리는 일만 남았다. '밤 열 한 시에서 새벽 두 시 사이에 면역 물질이 다량 생성된대' 같은 말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사람은 몸에 안 좋은 걸 몰라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밤에 빈둥거리고 싶었던 이유는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그 느낌에 무언가 보상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십 대, 이십 대의 생활 패턴이 몸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고, 깨어있는 동안의 기분이나 컨디션에도 악영향을 주고 있었다. 왝더독(wag the dog), 꼬리가 몸통을 흔들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행복한 사람이 되자, 신나는 느낌을 팍팍 살리면서 하루를 재밌게 살자. 나는 만트라처럼 반복해서 되내었다. 그것은 내 몸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였다. 그리고 곧 응답을 받았다.
세븐 일레븐.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수면 법칙 이름이다.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 한시까지만 깨어 있고, 나머지는 잠 자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잠을 자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젊은 육체를 믿고 '제발 재워줘'라고 외치는 몸의 목소리를 외면해 왔다. 잠을 적게 잘수록 인생을 알차게 보내는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도 일부 갖고 있었다.
일 하다가 갑자기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진 선배 사연을 듣고도 나는 아직 멀었다며 방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세븐 일레븐 라이프를 한 달간 실천하면서 나는 감탄하고 있다. 규칙적으로 여덟 시간 가까이 푹 자는 것이 얼마나 힘이 넘치는 즐거움인지 절절히 실감 중이다.
체질적으로 베개에 머리만 뉘여도 잘 자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의 사적인 이유로 인해 밤잠을 설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나는 이번에 세븐 일레븐 실험을 하면서 잠도 나름의 공부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잠에 정답은 없다. 밤잠이 길지 않다면 낮잠을 삼십 분 자는 것도 괜찮다. 자기 몸에 충분한 수면량을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충실히 채우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이 설정한 수면량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지는 않은지, 건강이나 일상생활에 부정적이지는 않은지 점검해볼 필요는 있다.
잠을 줄여서 놀던 시절에는 밤에 놀려고 낮 시간의 나를 몰아세웠는데, 심야가 없는 지금의 나는 해가 떠 있을 때 즐거움을 찾는다. 예전보다 야외에서 더 자주 걷게 되었고, 미술관이나 전시회도 시간을 알뜰하게 쪼개어 다닌다. 드라마 몰아보기의 재미는 사라졌지만, 탄탄한 다리와 힘을 얻었다. "후아암, 졸리다." 낮에 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