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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조력자살' 대신 '조력존엄사'라는 한국식 신조어에 설득되어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합법화를 찬성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존엄'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낄 사람이 누가 있으며, '존엄하게 생을 마감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 까닭이 없으니까요.

극한의 고통에 몸부림친다 해도 결국 회생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의식이 명료할 때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는 것이 생사에 대한 존엄한 결정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거지요.

제가 지난해 8월, 스위스에서 조력사를 택한 세 번째 한국인과 동행한 후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란 책을 낸 계기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를 대동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선택이 글로 남겨지기를 원하셨던 건데, 저로서는 고인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지만 송구하게도 스위스를 다녀온 후 제가 그만 조력사를 반대하는 쪽에 서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권리.
 죽음에 대한 권리.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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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분은 자신의 선택이 왜 기록되기를 원하셨을까요? 자신이 있었던 거지요. 선진국마다 속속 합법화가 진행 중인 추세를 볼 때 우리나라에 조력사가 합법화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여겼던 거지요.

호주 빅토리아 주에 이어 그분이 사셨던 뉴사우스 웨일즈 주도 내년이면 합법화를 코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차제에 대한민국도 때가 되면 본인이 바람직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유언처럼 드러냈습니다. 지금 공주에 영면하고 계시는 고인은 조력사 선택을 자랑스럽다고까지 하셨지요.

이미 가신 분의 선택에 대해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고, 참으로 힘겨운 결단으로 함께 자리했던 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뒤늦게나마 조력사 입법화를 찬성하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는 싶습니다.

조력사 법안의 대상자는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 말기 환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본인이 원할 경우 의사의 도움을 받아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지난 6월 실시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본인의 육체적 고통 때문에 조력사를 택하고 싶다는 응답자는 전체 응답자 중 불과 13%에 그쳤습니다. 그보다는 '가족이 겪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 그로 인한 고통(20%)'이 보다 큰 이유였습니다.

이른바 '웰다잉'이라고 부르는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권리'도 비슷한 비율을 차지했지만, 웰다잉의 내용은 다분히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는 조력사법 제정에 의미있는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가족이 겪는 고통의 경감을 위해 조력사를 택하는 경우가, 질병으로 인한 본인의 고통으로 인한 그것보다 높다는 지표는 무엇을 반영합니까. 무슨 의미일까요.

조력사에서 가장 근간으로 삼는 지표, '자기 결정권 보장'에 대해 처음부터 어긋나는 화살을 날리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순수한 내 의지, 자유로운 내 결정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다 지친 가족들의 무언의 압력이 조력사를 택하게 할 확률을 현저히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조력사를 찬성하는 다른 소수는 '남은 삶의 무의미'라고 응답했는데, 제가 스위스에서 배웅한 그분은 당신의 남은 생을 '아무리 재미있어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 책'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책장을 덮듯 삶을 여기서 그만 덮겠다고 끝내겠다고 하셨지요.

아마 생전에 설문 조사를 했다면 그분은 '남은 삶의 무의미'에 답하셨을테니, 그분 역시 수용하기 어려운 말기암의 고통이 조력사를 택한 직접 이유는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조력사에 관한 논의, 다음 회에 더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태그:#스위스안락사 , #조력자살 , #조력존엄사, #스위스안락사현장에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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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저서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강치의 바다』 『사임당의 비밀편지』 『내 안에 개있다』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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