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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 창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마음이 무겁다며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추천하자, <주간조선>이 문 전 대통령이 최근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빨치산' 책을 추천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냈다. 문 전 대통령이 왜 마음이 무겁다고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빨치산 책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주인공인 화자와 정지아 작가가 '빨치산의 딸'인 것은 사실이니(작가는 1990년에 <빨치산의 딸>이라는 소설도 썼다) 빨치산과 아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이 책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고상욱의 활약상이나 빨치산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책은 전혀 아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

평생 빨치산의 딸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고아리에게 아버지는 원망스러운 존재였다. 물론 아버지의 삶이 순탄할리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선택의 여지없이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던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딸은 매사에 진지하고 비장한 사회주의자 아버지를 조금은 냉소어리고 한심해하고 못마땅해 하는 시선으로, 애써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사회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으로 무장한 아버지였지만 술 없이는 노동의 힘듦을 견디지 못했고, '문자로 짓는' 아버지의 농사는 번번이 망했다. 아버지는 뼈가 삭게 일을 해서 모은 돈을 번번이 보증 서줘 날려 버리고 그 빚을 딸에게까지 물려주면서도 '오죽흐믄' 그랬겠냐고, 그 돈 있으면 아파 잠 못자는 나 병원이나 보내주라는 어머니에게 "혼자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에서 목심을 걸었냐"고 호통치는 사람이다.

그런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 수 없었던 사정을 안고 산 작은 아버지가 온다.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지냈지만 아버지 때문에 평생 소원해진,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사촌오빠가 온다. 빨치산 혁명 동료들도 온다. 군인으로 지리산에 파견돼 혹시 자신의 총알이 형과 누이와 친구들을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평생 안고 산 친구가 온다. 생판 남인 주제에 친자식보다 더 자식 같았던 학수가 온다.

"베트콩들허고 싸우다가 다리 뱅신이 된 나헌티는 땡전 한품 안 줌시로 뽈갱이놈 멩 끈어졌다고 군수에, 국회의원에, 화환이 씨방 말이 되냐"며 지팡이로 화환을 후려치는 노인도, 베트남 출신 엄마를 둔 아버지의 담배친구 오거리슈퍼 손녀 딸도 온다.

동네 머슴을 자청한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 아버지를 도와준 사람, 아버지를 원망한 사람, 딸은 한번 보지도 못한 각양각색 사람들이 온다. 그들을 통해 딸은 혁명가였고 빨치산이었지만, 그 전에 자식이고 형제였으며, 남자이고 연인이었고, 어머니의 남편이고 나의 아버지였으며, 친구이고 이웃인 아버지,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 자신의 희미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아버지를 본다.

이상주의자 아버지와의 화해

그래서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딸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다고 한마디로 정리하지 않지만 필자는 그가 이상주의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신념을 위해 혈육을 버리고 목숨을 걸었다. 결국 패할 것을, 자신이 염원했던 세상이 오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이상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때의 이상과 신념을 배반한 대가로, 혹은 한때의 투쟁을 훈장삼아 출세한 사람들에게 고상욱은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그의 삶의 태도에는 숭고한 무엇이 있다. 물론 아버지의 이상은 딸에게는 굴레였고, 혈육을 원수로 만든 괴물이었다. 전쟁과 분단, 그리고 그걸 이용해 군림한 권력은 그들의 시간을 빼앗고 관계를 뒤틀었다. 안타깝지만 그들은 그걸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아버지를 원망한 작은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 아버지의 유골함을 안고 오열했다. 뼛속까지 유물론자답게 "죽으먼 싹 꼬실라서 암 디나 뿌레삐리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대로, 딸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들과 함께 아버지의 뼛가루를 뿌리며 비로소 눈물을 흘린다.

지독한 이념대립이 휩쓸고 간 한반도에 아직도 너무나 많이 남아있는 아물지 못한 상흔을 생각하며 함께 울었다. 아, 오해는 없기 바란다. 꼭 작가처럼 역사의 질곡을 겪지 않았더라도 저마다의 아버지를, 아들을, 딸을, 남편을, 아내를 떠올리며 읽을 수 있으니 무거운 작품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가지지 마시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작가의 넘치는 유머 덕에 웃다 울다, 화나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슬프고 안타깝고 아픈 여러 감정들이 순간순간 교차하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태그:#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빨치산의 딸, #빨치산 책, #문재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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