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기준으로 전세계의 기독교 인구는 약 25억6천만 명으로 집계되며 세계인구의 무려 32% 가량을 차지한다. 이는 불교, 이슬람 등 전 세계 모든 종교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숫자로 알려졌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구분하는 한국과 달리, 서구권에는 신구교를 아울러 모두 기독교로 분류한다. 현재도 기독교 인구는 꾸준히 성장중이며 2050년경에는 30억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의 종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위상이다.
 
서양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오늘날 하나의 종교를 넘어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사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 거대한 사상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기독교가 자리잡기까지는 수많은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는 지난 18일 기독교의 박해와 그런 와중에서도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역사를 조명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꼽히는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는, 기독교의 탄생과 박해, 세계화에 있어서도 모두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도시다. 로마는 제정 시대에 돌입하면서 이른바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로 불리는 200여년의 전성기를 열었다. 기독교 탄생의 역사적 뿌리는 바로 이 제정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일상의 모든 영역에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한 사람의 다양한 신을 조화롭게 숭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다신교 사상이 일반적이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신전들을 정비하는가 하면 지배체제 강화의 일환으로 자신을 비롯한 황제 일가를 신격화하는 데도 앞장섰다.
 
하지만 유대인은 로마인들의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천지만물의 창조자인 야훼를 유일신으로 신봉하고 스스로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며 메시아의 도래를 믿는 '유대교'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은 로마의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로마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고 황제를 위한 기도를 약속했고 '유대인세'라는 특별세를 납부하는 친로마 정책을 내세워 타협했다. 로마 제국도 이를 받아들여 유대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해주며 평화적인 공존을 선택했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예수의 탄생'이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부모로 알려진 가난한 목수 요셉과 아내 마리아는 나사렛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아우구스투스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 정책 때문에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하여 고향인 베들레햄으로 향했다. 만삭이었던 마리아는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숙소를 찾지 못하여 베들레햄의 마구간에서 출산을 해야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예수였다. 

오늘날 역사는 예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 전후'를 나누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역사가들은 예수가 실제 탄생한 시기가 기원전 5-6경이었다고 보는 게 정설이다. 6세기의 신학자였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라는 인물이 예수 탄생시기를 기원후 1년으로 잘못 계산한 것을 미처 수정하지 못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수많은 기적을 행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병든자와 눈먼자를 고치고, 보리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오병이어의 기적) 일화 등이 유명하다.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겸 역사가 요시푸스가 쓴 유대 고대사에 따르면 '주지하는 바대로 예수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였고 많은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그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서술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을 주장했고,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이며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세상을 설파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이는 황제를 신성으로 여기던  로마인의 세계관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많은 대중들이 예수를 유대를 외국으로부터 독립시켜줄 메시아(구원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배계층 입장에서는 예수가 유대인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면 유대 땅에 대재앙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예수는 유대의 전통 '율법(십계명 등, 하느님이 모세에게 내렸다는 유대인의 종교 및 생활규칙)'에 새로운 해석을 내놓으며, 기계적으로 안식일에 얽매인 율법은 형식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면 기존의 세상은 무너지고 성전이 필요없어질 것'이라고 설파했는데 이는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것을 주업으로 하던 유대인 대사제들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가 메시아를 사칭했다는 혐의로 로마 총독에게 고발했다. 당시 사형을 선고할 권한은 오직 로마 총독에게만 있었다. 속주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수에게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했고 예수는 적극적으로 변론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결국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예수가 당한 십자가형은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마저 '가장 잔인하고 역겨운 처형방식'이라고 비판했으며, 현대의 해부학자들도 연구한 결과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극심한 고통을 주는 고문에 가까운 형벌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예수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과 영향력은 사후에 더욱 확산됐다. 사람들은 예수가 머지않아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할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성경에 예언된 정한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예수를 추종한 이들은 기독교에서 분리된 새로운 종파를 만드니 바로 예수 메시아로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자는 현대 기독교(그리스도교)의 시작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크게 증가했다. 기원후 65년, 기독교 역사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로마제국의 5대 황제 네로가 기독교 박해를 지시한 것. 이는 역사상 로마가 기독교를 탄압한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되어있다.

네로는 현대 역사에서 흔히 폭군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는 수많은 귀족들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지만 백성들 사이에서는 친평민정책을 펼치며 인기가 높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64년 7월, '로마 대화재' 사건이 발생하는데 당시 휴양지에 있던 네로가 고의로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까지 발생하며 민심이 흉흉해진다.
 
네로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종말론을 신봉하던 기독교도들은 로마 대화재를 종말의 징조로 여겼고, 이는 로마인들에게는 가뜩이나 큰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나 마찬가지여서 여론이 악화된 상태였다. 네로는 로마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자, 이를 기회로 삼아 기독교인들을 아예 자신의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 등도 이 당시 순교를 당했고 많은 이들이 십자가형과 화형 등 각종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네로의 기독교 박해는 로마 시내에 국한하여 비교적 단기간에 끝났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기독교vs 로마 사회'의 갈등 구도가 본격적으로 두드러지게 된다. 로마인들은 이제껏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만 여겼던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인지하면서 경계하게 됐고, 이후 수백년에 걸쳐 수시로 이어진 기독교 박해의 출발점이 됐다.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세계관은 애초에 사상적으로 절대 공존할 수 없는 관계였다. 고대 사회는 민족이나 종족별로 자신과 다른 민족을 동등하게 보지 않았고, 전쟁과 노예가 정당화되었으며, 신분과 남녀성별에 따른 계급질서가 존재하는 차별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평등'을 기반으로 신분차별에 반대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꾼 기독교와는 상극이었다.
 
또한 기독교는 독신을 이상적인 삶으로 여기고 금욕을 장려했다. 기독교인들은 결혼을 거부하는 경우가 늘어났는데 이는 로마의 전통에 반하는 행위였다. 이미 결혼한 여성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남편의 가부장권을 부정하거나 이혼을 요구하는 사례도 늘어나며 '여성 인권 의식'의 성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이 거듭되면서 기독교는 점차 로마의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드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로마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이 확산됐다. 예수와 열두 제자의 '최후의 만찬'에서 유래한 기독교 성찬식에서 "빵은 나의 몸이고, 포도주는 나의 피"라는 비유적인 표현을 왜곡하여 기독교인들이 '식인'을 한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또한 음주가무를 즐기고 자유롭고 개방적인 성생활을 선호하던 당시 로마인들의 문화와 달리, 기독교는 도덕성과 금욕을 중시했다. 사도 바울은 "술에 취한 자와는 상종도 말고 음식도 함께 먹지말라"는 가르침을 남겼을 정도고, 기독교인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비난을 받거나 출교를 당하기도 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제3의 종족'이라고 칭하며 로마인 자신들이나 유대인과도 다른 비정상적인 별종으로 취급했다.
 
로마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의 황제중 한명인 트라야누스(98-117) 시대에 이르러 기독교는 공식적인 불법 종교로 낙인이 찍히며 사형을 받을 중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황제의 치세에 이르러서 기독교는 역사상 최악의 '대박해'를 당하게 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로마 역사상 최대혼란기이던 50여년간의 군인 황제(234-284) 시대를 청산하고, 제국의 4분할하여 효율적으로 개혁한 치적을 남긴 유능한 황제였다. 초기에는 기독교에도 우호적이었고 여러 기독교 신자들은 주요 관직에 기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치세 말기에 이르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살인을 하지말라는 교리를 앞세워 전투참가와 병역의무를 거부한 게 발단이 되었다. 이는 로마의 군사력 약화로 주변에서 계속된 외적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기의식을 느낀 황제는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에 돌입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에 따르면 '로마는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높은 관직에 있던 기독교인들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은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뒤를 이어받은 갈레리우스는 이전부터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주장해왔던 강경파였다. 갈레리우스는 각종 잔인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기독교를 탄압했지만, 기독교인들은 끝까지 순교를 감수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당시 로마인구 600만 중 기독교인의 숫자는 60만으로 거의 10%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중에는 주변의 가족, 친구, 동료까지 죽여야 하는 상황에 로마인들이 반발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갈레리우스는 결국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꺾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기독교 박해을 중단하라는 명을 내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모진 핍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 투쟁으로 결국 기독교를 지켜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306-337)의 치세에 이르러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4두 정치를 청산하고 로마제국을 재건한 콘스탄티누스는 1세는는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를 인정한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원래는 태양의 신인 미트라교를 믿는 신자였다. 그런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로마제국의 패권을 놓고 경쟁자인 막센티우스와 운명을 건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비롯됐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를 앞두고 꿈에서 그리스도(Chistos)를 의미하는 'XP' 표식을 하라는 계시를 받았고, 실제로 병사들의 방패에 표식을 그대로 새기고 출전하여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콘스탄티누스는 "내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신이 날 도왔기 때문"이라며 기뻐했다.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기로 허용했고, 이는 이후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로마 제국의 재통일을 노리던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제국내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던 기독교인들을 제국의 일원으로 인정하는게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는 정치적 야심도 크게 작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에 물적 후원과 성직자 부역 면제, 취약계층 지원기구 설치, 성경 보급으로 기독교 전파 등 각종 정책으로 기독교를 적극 지원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일요일을 '주일'로 여긴 것을 받아들여 일요일을 아예 로마의 공식 휴일로 지정했고, 오늘날 현대사회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것도, 모두 콘스탄티누스의 결정에서 비롯됐다.
 
심지어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직전에서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정치적 계산이나 숨은 의도야 어찌됐든 콘스탄티누스의 공인 이후 기독교가 세계사의 근간으로 올라서는 중요한 분수령이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기독교는 결국 로마의 국교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392년 당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 이외에 모든 종교를 금지하라는 칙령을 내린다. 이런 정책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는 로마 인구내 기독교인의 숫자가 80%까지 증가한 상태였던데다가, 황제 역시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고려하여 내린 결정이었던 것.
 
이로써 로마인은 강제로 모두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황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이전에 존재하던 문화유산인 로마의 신전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또한 기독교 국교화 이후 로마에서는 그리스 신들을 숭배하는 운동제전이었던 고대 올림픽이 한동안 금지되기도 한다. 이후 올림픽은 무려 1500여년의 시간이 흘러 1896년 초대 올림픽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390년 이후 기독교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이들은 이전의 기독교도들이 당했던 것만큼이나 모진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오랜 투쟁 끝에 그토록 갈망했던 '종교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지나친 독선과 권력화는 오히려 '종교의 강요'라는 또다른 억압을 불러왔다는 사실이 조금 아이러니하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기독교의 가치를 설명한 바 있다. 오늘날 서구권에서 기독교는 동방정교, 천주교, 개신교 등으로 나뉘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의 종교로서 초심에 걸맞게 인류애적 역할과 책임감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부분이다.
벌거벗은세계사 기독교 예수 밀라노칙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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