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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눈을 뜨자마자 집을 나섰다. 속초에 볼 일이 있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패스트푸드 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고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이른 시간이라 차가 없어서 좋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서서히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큰길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차량들이 어느새 도로를 가득 메웠다.

모두 연휴에 진심인 것 같았다. 월요일까지 이어지는 연휴의 첫날이니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초조함과 조급함을 지웠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니 8시가 돼서야 첫 번째 휴게소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침을 해결하려고 했지만 휴게소 진입로 훨씬 이전부터 차량 행렬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빠른 판단이 필요한 순간, 과감하게 그냥 지나쳤다.

지나며 바라본 주차장은 빈 틈이 없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처럼 보였다. 40km를 더 가서 나타난 두 번째 휴게소도 같은 이유로 지나쳤고 결국 밥 때가 한참 지나 마지막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해결했다.
 
바람의 속도에 따라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파도소리가 묵은 체증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 낙산해수욕장 바람의 속도에 따라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파도소리가 묵은 체증을 내려주는 것 같았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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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인파가 사라진 동해의 바닷가는 갈매기들의 휴식터였다. 바람의 속도에 따라 규칙적으로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파도를 갈매기들이 유유자적 즐기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파도소리는 묵은 체증을 내려주는 듯 시원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바다와 모래사장의 어울림이 근사했다.

작년부터 남편의 항암치료로 인해 먼 거리는 움직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는데, 실로 오랜만에 나들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언제나 가능했던 작은 일상, 그 소소한 것들이 남편이 아프고 나서야 비로소 귀하고 소중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새벽에 나온 보람도 없이 5시간 가까이 걸려 겨우 도착했지만, 함께 있으니 충분했고 동행 자체가 우리에겐 큰 의미가 된 것 같았다.

약속된 일정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속초까지 와서 차에서만 보내다 그냥 가기는 서운했다. 이전에도 자주 오갔던 길이었지만 한 번도 들른 적이 없었던 백담사에 가보기로 했다. 단풍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어도 백개의 담(潭)이 있다는 계곡은 궁금했다.

백담사는 매표소부터는 셔틀버스로 이동해야 했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길, 계곡이 나타나는 순간 버스 안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백담사로 올라가는 계곡에는 투명하게 맑은 물웅덩이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슬아슬하게 좁은 도로를 유연하게 지나가는 버스의 곡예에 몸을 맡기며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풍경에 이미 마음을 빼앗겼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달리니 백담사가 나왔다. 이미 매표소에 수십대의 관광버스를 보았던 터라 사람이 많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백담사 관람이나 내설악 등산을 마치고 나가는 차를 기다리는 줄이 까마득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오니 막상 백담사 경내는 널찍하고 한산했다.
 
계곡으로 내려가니 누군가 쌓은 돌탑의 무리가 가득했다.
▲ 백담사 계곡으로 내려가니 누군가 쌓은 돌탑의 무리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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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으로 내려가니 누군가 쌓은 돌탑의 무리가 가득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함이 모이고 인연이 만들어지고 생애가 완성되는 듯한 염원의 탑. 야트막하게 흐르는 계곡 물과 어우러진 돌탑의 풍경은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 같았다. 물가의 바위에 앉아 물소리에 몸을 맡기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도 관련이 깊은 절이다. 처음 머리를 깎고 출가한 곳이며, 백담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나오는 오세암에서 불교 수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불교 유신론>과 <님의 침묵>도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최근에는 만해 기념관과 만해당, 만해 교육원이 건립되면서 만해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의 장도 마련되어 있다.

만해 기념관도 둘러봤다. 기념관 내에는 그의 독립을 향한 행적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조선의 주권 회복은 그의 최우선 과제이며 일생의 과업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한용운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 지사이며 시인이자 민족지도자였다. 현재 정치권에서 진행되는 친일 논쟁에 그의 글이 인용되는 것을 안다면 그는 어떤 말을 할까 싶었다.
 
회갑날 지었다는 즉흥 한시, 말년에 병을 얻고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배급까지 받지 못한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지인들이 열어 준?회갑잔치는, 스스로도?어쩌지 못하는 풍상 앞에 회한에 젖게 했던 것 같다.
▲ 한용운 한시 회갑날 지었다는 즉흥 한시, 말년에 병을 얻고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배급까지 받지 못한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지인들이 열어 준?회갑잔치는, 스스로도?어쩌지 못하는 풍상 앞에 회한에 젖게 했던 것 같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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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작품들과 행적을 돌아보는 가운데 회갑날 지었다는 즉흥 한시가 눈에 들어왔다. 독립투사로, 위대한 시인으로, 선사로 살아온 그가 말년에 병을 얻고 일제의 호적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배급까지 받지 못한 궁핍하고 절박한 상황에서 지인들이 열어 준 회갑잔치는,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풍상 앞에 회한에 젖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단심은 영원하다는 말에서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변함없는 굳은 신념이 느껴지기도 했다.
 
총총육십일년광悤悤六十一年光  운시인간소겁상云是人間小劫桑   
    빛 같이 빠르게 지나간 예순 한 해. 세속에는 소겁의 긴 세월이라도 덧없다 하네.
세월종령백발단歲月縱令白髮短  풍상무내단심장風霜無奈丹心長  
    세월은 희머리 짧게 하였더라도, 풍상도 어쩌지 못하니 단심은 영원하구나.
청빈이각환범골聽貧已覺換凡骨  임병수지득묘방任病誰知得妙方  
    가난에 내맡기어 범골을 바꾸었고, 병에 의지하여 묘방을 얻었음을 누가 알랴.
유수여생군막문流水餘生君莫問  선성만수진사양蟬聲萬樹趁斜陽  
    흐르는 물 같은 여생 그대여 묻지 마소, 숲 속 가득 매미소리 지는 해 쫓는구나.

백담사를 나서자 버스를 기다리는 줄은 더 길어져 있었다. 두세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는 그냥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7Km, 도보로 1시간 40분의 거리. 내려오는 길은 백담의 속살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크고 작은 웅덩이와 그곳을 흐르는 물줄기, 산세와 어우리진 구불구불한 길과 나무들이 모든 시름을 잊게 했다.  
 
7Km, 도보로 1시간 40분의 거리. 내려오는 길은 백담의 속살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 백담사 계곡 7Km, 도보로 1시간 40분의 거리. 내려오는 길은 백담의 속살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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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내려왔다면 느끼지 못했을 백담사에 대한 감흥이 길을 걸으며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맑은 계곡과 푸른 정취만으로도 마음까지 충분히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거창한 여행은 아니었어도 불시에 몸을 가볍게 하고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이었지만 오감을 만족시키는 최고의 결과로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아직 단풍이 물들지는 않았지만, 초가을의 정취로는 그만이었다. 단풍이 물들었을 때 온전히 하루의 시간을 할애해서 오세암과 봉정암을 거쳐 내설악의 진수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한용운의 행적과 자취도 속속들이 살피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백담사, #한용운, #백 개의 웅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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