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16 18:18최종 업데이트 22.10.1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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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재명(왼쪽)과 그의 기습을 받은 매국노 이완용 ⓒ 자료사진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해에 이완용도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안중근 의사의 10·26 의거 2개월 뒤인 1909년 12월 22일, 51세 된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의 기습을 받았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추진하던 한일 양국 두 거물이 두 달 간격으로 세상을 떠날 뻔했다.

22세 청년 이재명의 이완용 공격은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벌어졌다. 이완용이 그곳에 간 것은 벨기에왕 레오폴 2세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구한말 역사서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전한다.
 
"이때 이르러 완용은 비리시(比利時) 황제가 사망하여 종현교회에 설치된 추도회로 갔다. 재명은 교회당 밖에서 엿보고 있다가 완용이 인력거를 타고 나타나자 칼을 휘두르며 인력거 인부 박원문을 찔렀다. 그가 상처를 입고 쓰러지자 재명은 몸을 날려 인력거에 뛰어올랐다. 완용이 급히 피하는 사이에 그의 허리와 등 세 군데를 잇달아 찔렀으나, 순사들이 재명을 찔러 인력거에서 떨어트린 후 완용을 여럿이 들고 갔다."
 
이완용은 세 군데나 칼에 찔렸다. 이재명이 인력거에 뛰어올라 그의 신변을 확보한 상태에서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이날 그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이완용까지 그렇게 됐다면, 이 시기 대한제국 정세는 한층 긴박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이완용이 목숨을 건진 것은 순사들의 도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당부분은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때문이기도 했다. "완용은 머리를 깎은 데다가 양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붙들기가 불편했고, 융전(絨氈)으로 두껍게 단장을 하고 있어서 급소를 찌르지 못한 것"이라고 <매천야록>은 전한다.


두꺼운 모직물에다가 짧은 머리와 양복이 이완용의 목숨을 건진 측면도 있었다. 머리카락이 좀 더 길어서 이재명이 붙들기 용이했다면, 이완용은 자신이 팔아버린 나라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관찰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건졌고 한민족의 뒤틀려가는 운명도 목격하게 됐다.

가까스로 살아난 이완용이 목격한 것은 일제 침략이 심화되는 장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곳간이 채워지는 장면도 함께 목격하게 됐다. 이듬해에 있은 대한제국 멸망은 그에게 비약적인 재산 증식 기회가 됐다. 나라를 판 대가로 그 뒤 떼돈을 벌었다는 점에서 그는 친일파인 동시에 매국노였다.

'알뜰살뜰' 이완용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이완용은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 1월 13일 15만 원짜리 은사공채를 상금으로 받았다.

일제 백작 작위와 함께 공채를 받은 일과 관련하여 다음 날 발행된 <매일신보> 기사 '공채본권(本券) 교부'는 이완용이 수령증을 작성한 뒤 정무총감실에 들어가 공채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1910년 10월부터 1912년 5월까지 강원도 영월군수로 부역한 친일파 최양호의 월급은 50원이었다. 이 월급의 3000배 되는 상금을 이완용이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15만 원이 일본 정부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15만 원은 공채 형식으로 지급됐고 이완용은 이 목돈에 대한 이자를 수령했다. 식민지 한국인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이자가 지급됐으니, 식민지 한국 대중이 이완용에게 상금을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이완용은 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고문으로 부역한 대가로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연수당 1600원을 받았다. 매월 130원 이상을 받은 것이다. 또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중추원 부의장으로 부역하면서 연수당 2000원 내지 3500원을 받았다.

중추원은 실권은 약했지만, 중추원 의원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의 국회의원 못지않거나 능가했다. 총독부 정무총감이 중추원 의장을 겸직했기 때문에, 한국인이 선임될 수 있는 최고 지위는 부의장이었다. 그런 부의장직을 14년간 수행하면서 경제적 안정을 보장받았다.

이완용이 매국의 대가로 금전을 취득하는 모습은 '알뜰살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일거일동이 역사에 기록될 위치에 있었던 사람치고는 '명분'보다 '수입'을 상당히 우선시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완용은 자신이 무너트린 대한제국 관직을 그만두면서 퇴직금을 챙겨갔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해 잔무를 처리해준 것에 대한 대가 역시 수령해갔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1907년 한국을 방문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와 기념 촬영한 각료들.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완용이다. 그보다 앞에 선 사람들은 왼쪽부터 왕세자 요시히토, 영친왕이며, 맨 오른쪽이 이토 히로부미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자료

 
1993년 8월 <역사비평>에 실린 임대식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이완용의 변신 과정과 재산 축적'은 그가 수령한 금전 항목을 열거하는 대목에서 "(1910년) 10월 3일 퇴직금으로 1458원 33전을 받았고, 합병 전후 3일간(28일~30일)의 잔무처리수당으로 60원도 받았다"고 설명한다. 국권침탈의 잔무를 사흘간 처리해준 대가로 군수 월급 비슷한 수당을 받아 간 것이다.

매국노라는 이유로 1909년에 가톨릭 성당 앞에서 죽임을 당할 뻔한 그였다. 그런 일까지 겪은 사람이 바로 그 이듬해에 대한제국 퇴직금을 수령하고 잔무처리수당까지 받아 갔다. 훗날의 역사적 평가에 개의치 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결과, 그는 식민지 한국인 중에서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김윤희 경원대 연구교수의 <이완용 평전>에 따르면, 68세 나이로 죽기 1년 전인 1925년에 그는 친일파 민영휘에 이어 한국인 부자 2위에 기록됐다. 현금 보유액은 그가 최고였다. '경성 최대의 현금 부호'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평생 관료로 생활한 사람이 그런 대부호가 되기는 쉽지 않다. 위에 설명된 은사공채나 연봉만으로는 그의 곳간 규모를 설명할 수 없다.

그에게는 양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있고, 고종과 순종이 하사한 금전도 있었다. 이에 더해 친일 대가로 받은 비공식적인 금전도 상당했다. <이완용 평전>은 이재명에게 찔려 입원한 일로 인해 부조금을 받은 것을 포함해 그가 치부하는 과정에 관한 언론 보도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대한매일신보>와 <매천야록> 등에 의하면, 이완용은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그리고 한일병합 등으로 이토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한미전기회사 설립 때 모스로부터 1만 5천 원의 리베이트를 받았고, 옥새를 위조해서 고종의 내탕금 40만원을 횡령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제시된 적이 없어서 확인할 길이 없다. 이 외에 이완용이 지위를 이용해 관직 매매와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에 뒤이어 세상을 떠날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난 이완용은 그 뒤 일제의 비호하에 거부를 축적했다. 가까스로 생명을 구한 그에게 펼쳐진 것은 한민족이 고난을 겪는 장면과 그의 통장에 잔고가 늘어나는 장면이었다. 그는 관료 출신치고는 이례적으로 자산 순위 1, 2위를 다투는 갑부 반열에 올랐다. 친일매국이 그에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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