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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 아들 고종후·고인후를 모신 사당이다.
▲ 포충사의 옛사당 앞에서.(왼쪽부터 필자 박용규와 광주유족회 강성진 회장.)  포충사는 의병장 고경명, 아들 고종후·고인후를 모신 사당이다.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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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필자는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에 있는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일대를 답사하였다. 답사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장옥삼의 후손인 장원석 성균관 고문, 동학농민혁명 광주유족회 강성진 회장,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 동학농민혁명 광주유족회 김균태 사무국장이 참여하였다.

빛고을 광주는 5·18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유명하다. 독자 여러분이 광주에 가게 되면,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에 있는 '국립 5·18 민주묘지'를 살펴보고,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일대를 여행하기를 바란다.

광주 동학혁명의 특징... 항일투쟁의 일환

광주 동학농민혁명은 임란 의병을 계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등장한 항일의병이 302년 뒤인 1894년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으로 계승되었다. 임란 의병장 고경명의 12대 직계 후손인 고광문 3형제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봉기한 항일투쟁이었다. 임란 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의 공통점은 척왜(斥倭)를 내세운 항일운동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전라도 광주의 의병장 고경명 3부자는 임진왜란 때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다가 순절하였다. 먼저 고경명 3부자의 순절에 대해 살펴보자.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광주(光州) 압보촌(鴨保村)에서 태어났다. 고경명은 여섯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고종후(高從厚), 둘째 아들이 고인후(高因厚), 셋째 아들이 고준후(高遵厚), 넷째 아들이 고순후(高循厚), 다섯째 아들이 고유후(高由厚), 여섯째 아들이 고용후(高用厚)였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1592년 금산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 1561∼1592)와 함께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경명의 첫째 아들인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1593년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김천일·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했다. 이렇게 의병장 고경명 3부자의 순절이 나왔다.
 
(광주 남구 원산동 775 소재)
▲ 포충사 모습 (광주 남구 원산동 775 소재)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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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년 뒤인 1894년 6월 21일 침략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권을 침탈하였다. 일본군이 남의 나라의 궁궐인 경복궁을 점령한 뒤에,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기존의 민씨 정권을 타도한 데서 나아가 친일 개화파 정권을 세웠다.

이에 국권 수호 운동 즉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는 갑오의병(1894), 2차 동학농민혁명(1894∼1895)이 일어났다. 이때에는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 직계 후손인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형제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고광문 동학 3형제의 활동에 대해 살펴보자.

고광문(高光文, 1860.∼1898.5.8. 자는 응삼(應三)은 임진왜란 때 금산 7백 의사(義士)의 지도자로 알려진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이었고, 고경명의 다섯째 아들인 해사공 고유후(高由厚)의 후손이었다.

고경명에서 고광문까지의 가계는 이렇다. 고경명(중시조 고말로의 19세)→고유후(20세)→고부언(高傅言, 21세)→고두기(高斗紀, 22세)→고가빈(高可賓, 23세)→고한성(高漢星, 24세)→고욱(高昱, 25세)→고정필(高廷弼, 26세)→고시철(高時喆, 27세)→고윤진(高潤鎭,28세)→고제만(高濟萬, 29세)→고은주(高殷柱, 30세)→고광문(高光文, 31세)으로 이어졌다.
 
(<삼면 고영두>, 2015, 495쪽.)
▲ 제주 고씨(장흥 고씨) 고광문 가계도 (<삼면 고영두>, 2015, 495쪽.)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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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문은 고은주(高殷柱, 1843∼1869)의 아들이었다. 고은주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고광문, 둘째 아들이 고광인(高光寅, 1862∼1936, 자는 응선(應善), 셋째 아들이 고광룡(高光龍, 1867∼1938, 자는 응오(應五)이었다.

20대 말, 30대 초중반 나이 세 형제가 참여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형제는 모두 동학에 입교하였다. 고광문 집안은 누대로 광주시 남구 이장동 순생 마을에서 살아왔다. 고두기(제주 고씨 중시조 고말로의 22세)부터 고영두(34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1894년 9월 전봉준이 반일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광주 이장동에 살고 있던 고광문 3형제도 선조인 고경명 의병장이 분연히 일어났듯이, 분연히 나라를 위한 동학농민혁명에 일어나 참전하였다. 그 때 고광문이 35세, 고광인이 33세, 고광룡이 28세 나이였다. 고광문 3형제의 집안은 당시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농이고 부잣집 중 하나로, '장흥 고씨 고가빈파'의 8대 종가였다.

특히 첫째 고광문은 동학군에 전 재산을 바치며 1백여 병력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형제는 광주의 이장마을과 주변의 농민들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의 대열에 앞장섰다. 고광문 3형제는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화중·최경선의 농민군 부대에 참여하였다.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안의 ‘동학농민혁명기념비’ 아래 부분에 새겨져 있음.)
▲ 고영두가 2004년 10월에 세운 <동학 3형제기>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안의 ‘동학농민혁명기념비’ 아래 부분에 새겨져 있음.)
ⓒ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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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동학농민혁명을 지휘한 손화중·최경선 장군은 광주와 나주에서 일본군의 바닷길 공격에 대비하고, 전봉준의 항일 봉기를 배후에서 보장해 주었다. 이에 반해 정석진과 김창균은 나주의 수성군(농민군 토벌대) 출신으로 손화중·최경선의 항일 동학농민군을 압살하여 이름을 날렸다. 정석진과 김창균은 각각 1895년의 을미의병 참여로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손화중이 이끈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은 패배하였다. 손화중은 1894년 12월에 동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이후 고광문은 고향인 광주 이장동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당시 열여섯살이 된 아들 고재언과 함께 곡성군 옥과면 용머리로 피신하여 은둔하였다. 조선 정부는 광주 이장동에 있는 고광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았다고 한다. 고광문의 처는 남편이 피신한 후에 친정인 담양 한재고을로 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타계하였다. 1898년 고광문은 곡성 옥과에서 울화병으로 39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아들 고재언도 곡성 옥과에서 살다가 피신생활 15년 만에 고향 광주 이장동으로 돌아왔다. 이장동에서 초가삼간 담장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유일한 재산이었다. 고재언은 남의 땅을 빌려 소작하여 식구들을 연명시켰다.

이처럼 고광문 3형제는 동학농민혁명 패배 이후 집안이 망하였다. 나라를 구하려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대가는 혹독하였다. 그때부터 고광문의 집안은 가난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고광문의 후손은 이렇다. 고광문→고재언(高在彦, 1879∼1942)→고흥석(高興錫, 1910∼2000)→고영두(高永斗, 1930∼2006)→고병삼(高秉三, 1976년생, 생존)으로 이어졌다.

고광문의 증손인 고영두가 선대의 유훈인 충정(忠貞)과 근면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고영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과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의 살림이 어려울 때마다 큰 돈을 보내주었다. "뒤늦게 밥술이나 먹게 된 것은 순전히 농민군 할아버지 덕분인데 그 돈을 농민군을 위해 쓴다는데 무슨 생색을 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고 한다.  

고영두의 아내 정영숙과 아들 고병삼은 광주시 남구 이장동 216번지 일대에 있던 고영두의 땅 1500평을 국가에 기증하여,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조성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2017년에 완성되었다.
 
(왼쪽부터 강성진 회장, 장원석 고문, 김재기 교수, 필자 박용규) 강성진 회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강영희의 고손자이다.
▲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기념탑 앞에서 (왼쪽부터 강성진 회장, 장원석 고문, 김재기 교수, 필자 박용규) 강성진 회장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강영희의 고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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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3형제 가운데 고광문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심의를 거친 뒤에, 아래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아울러 고광문의 후손들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유족 등록이 이루어졌다.
 
'고광문(高光文, 1860.∼1898.5.8.) : 고광문은 3형제가 함께 동학농민군으로 참가하여 1894년 10월과 11월 광주에 근거지를 둔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의 전투에 참여한 후 피신하여 1898년 화병으로 사망함(참여지역 : 전라도 광주 나주)'

-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유족등록 신청 안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278쪽

참고로 전라도 광주지역과 그 주변 일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45명)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봉희, 강영희, 고광룡, 고광문, 고광인, 곽윤중, 김덕구, 김복환, 김용택, 김종태, 노병철, 문달현, 박병옥, 박용운, 손상옥, 오권선, 유광화, 윤주은, 윤태한, 이겸호, 이춘영, 이몽근, 이병기, 이성호, 이수갑, 이응범, 이의호, 이인숙, 이중전, 장경삼, 장공삼, 장옥삼, 전유창, 정일채, 정평서, 조승현, 조영운, 채봉학, 최성칠, 최윤주, 최장현, 최평집, 한달문, 허원, 홍자범 등이 있다.

필자는 답사 참여자 분들과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살펴보았고, 기념공원 맞은 편에 있는 마을 안의 고영두 회장 생가를 답사하였다. 때마침 고영두 회장의 배우자인 정영숙 여사가 계셔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박용규, 광주유족회 강성진 회장, 정영숙 여사, 김재기 교수, 장원석 고문)
▲ 고영두 회장 생가 (왼쪽부터 박용규, 광주유족회 강성진 회장, 정영숙 여사, 김재기 교수, 장원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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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전남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이번 답사를 통해 필자는 광주의 임란 의병장 고경명의 12대 직계 후손인 고광문 3형제가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였다. 고광문은 동학 접주로써 고광인·고광룡 동생과 함께 1백여 병력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화중·최경선의 농민군 부대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임란 의병을 계승한 광주 동학농민혁명은 3·1운동,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은 인간 평등의 민주주의와 반외세 자주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났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운동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의 뿌리는 128년 전에 일어난 광주 동학농민혁명에 있었다.

독자 여러분께서 만약 빛고을 광주를 가게 되어 시간이 된다면, 광주시 남구 이장마을에 있는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태그:#고광문, #광주 동학농민혁명, #의병장 고경명,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 #고영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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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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