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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8월 3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지난 8월 3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론스타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 판정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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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31일, 세계은행(World Bank)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가 한국 정부에게 론스타에 대해 내린 2억1650달러(이자 제외) 배상 판정을 계기로 부각된 국제통상무대 상 한국의 협상 태도를 1996년 대우전자의 프랑스 국영 가전업체 톰슨멀티미디어 인수 시도와 비교대조해 보고자 한다. 협상 태도에 대한 논평인 만큼 협상의 세부적 내역은 생략한다. 

필자가 프랑스에 체류하던 1996년 10월, 프랑스 정부는 국영 가전업체 톰슨 멀티미디어(TMM)를 대우전자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집권 초기였던 우파 쟈끄 쉬락 정부는 적자 경영에다가 총 160억 프랑(2조6000억 원)의 부채로 시달리고 있던 TMM을 매각하고자 프랑스 국내에서 1차 매각공시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입찰에 응하지 않았다. 인수 후 정리해고의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국외를 대상으로 2차 매각공시를 하자 유일하게 인수 의사를 밝힌 회사가 대우전자였다. 대규모 감원이 없는 것은 물론 추가고용에 부채의 일부를 떠안는 조건이었다.

대우전자 인수 결정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발표되자 프랑스 언론과 정당, 노조, 국민여론이 '프랑스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들끓었다. 물론 노사정 사전 협상과 조율 없이 정부가 일방적 발표를 한 점에서 그들의 반발과 분노는 수긍할 면이 있었다. 그러나 충격적이었던 것은 신문·방송 할 것 없이, 대우가 소속된 국적(세계 변방의 생소한 나라, '꼬레' Corée)을 들먹이며 물불 안 가리고 융단폭격 하듯 마구 힐난하던 장면들이었다.
 
프랑스 야당 등이 대우의 톰슨 멀티미디어 인수를 반대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절차의 투명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질적 이유는 "프랑스 시각에서 보면 이류국가 한국의 이류기업 대우가 선진국 프랑스의 자존심이 걸린 국영기업을 인수할 자질이 있느냐"는 국민감정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쉽게 말해 아직까지 후진국인 한국이 선진국인 프랑스 대표적 기업을 감히 인수한다는 사실이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 <부산일보> 1996. 12. 5.
 
"대우 사냥"

TMM 인수에 대해 특히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던 세력은 노조와 그들을 적극 지원하는 사회당이었다. 한국 고속철 최초도입에 있어 독일 ICE, 일본 신칸센과 프랑스 TGV가 입찰경쟁을 한 결과, 한국 정부가 후자를 최종선택한 때가 불과 2년 전인 1994년 6월, 사회당 정권 때였다. 1993년 프랑수아 미떼랑은 세일즈를 위해 프랑스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고문서 한 권을 들고 방한하기도 했다. 이런 프랑스 사회당의 행태가 한국 입장에서는 감탄고토(甘呑苦吐), 배은망덕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정부의 무대응은 물론, 국내언론에서도 큰 이슈로 취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프랑스 정부의 톰슨멀티미디어 대우인수 발표 후,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 1996년 11월 8일 자 1면 전면 기사. 제목은 "대우사냥" ("마녀사냥" 패러디), 부제는 "한국 그룹(대우)의 톰슨 인수에 대해 각계에서 격렬한 저항"
 프랑스 정부의 톰슨멀티미디어 대우인수 발표 후,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 1996년 11월 8일 자 1면 전면 기사. 제목은 "대우사냥" ("마녀사냥" 패러디), 부제는 "한국 그룹(대우)의 톰슨 인수에 대해 각계에서 격렬한 저항"
ⓒ 리베라시옹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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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슨 멀티미디어의 대우전자 인수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대우는 프랑스 주요 일간지 1면 하단에 대우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선입관 해소와 톰슨 인수 후 자구 계획을 설명하는 전면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이 광고문을 '리베라시옹'(1996.11.8)이 전부 옮겨와서 지면을 할애해 조목조목 시비조 비판과 조롱을 하고 있다.
 톰슨 멀티미디어의 대우전자 인수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대우는 프랑스 주요 일간지 1면 하단에 대우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선입관 해소와 톰슨 인수 후 자구 계획을 설명하는 전면광고를 대대적으로 실었다. 이 광고문을 "리베라시옹"(1996.11.8)이 전부 옮겨와서 지면을 할애해 조목조목 시비조 비판과 조롱을 하고 있다.
ⓒ 리베라시옹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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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 언론과 한 덩어리가 돼 대우는 물론 그 기업의 소속국인 한국과 한국인에게 치욕적인 모멸감까지 주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그들의 맹공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거의 3개월이 지속됐다. 당시 프랑스 주재 한국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격분한 상태였다. 나중엔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프랑스 언론과 재계, 정계가 한국 정부와 여론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피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에 대해 별 큰 파장이 없었다.

1996년 10월부터 약 6개월간 프랑스에서 엄청난 논란거리였던 TMM 매각은 결국 대우전자에 의한 인수가 무산된 후 공기업으로 남아 2년 후 정상 회복했다.
 
2011년 3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유리창에 외환은행 매각 반대 구호가 붙여있다.
 2011년 3월 30일 오전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유리창에 외환은행 매각 반대 구호가 붙여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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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모술수의 현장... 5월 바이든 '프렌드 쇼어링' 이후 지금은 어떤가

외환은행 매각 지연과 방해 혐의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2022년 ICSID는 후자가 전자에게 2억1650달러(이자 제외) 손해배상을 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2003년 당시 외환은행이 론스타에게 넘어갈 때에도 금융자본이 아닌 론스타의 인수자격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외환은행 노조만이 이의제기를 할 뿐, 그다지 국민여론 환기가 되지 않았다.

인수 3년 만인 2006년, 론스타는 외환은행 매각을 공시했고 2012년 하나은행이 이를 인수함으로써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 금융위원회가 인수를 승인하자마자 론스타는 2007~2008년 한국정부의 방해로 HSBC로의 매각지연과 계약 파기가 일어났다면서 ICSID에 손해배상 중재를 신청했다.

비금융자본으로서 인수자격부터 문제가 있던 일개 외국 사모펀드가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챙긴 시세차익 4조7000억 원도 모자라, 매각 지연을 이유로 정부상대 손해배상 신청을 한 것은 한국을 우습게보거나 한국 측 심사관계자들의 약점을 잡고 있었다는 것으로밖엔 설명할 길이 없다.

국제무대와 그 위에서 벌어지는 국제관계에선 고사성어 '송양지인'(宋襄之仁)처럼 신사협정보다는 권모술수와 '뒤통수 때리기'가 난무하는 일이 더 많음을 한국인들은 인식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정부와 정치권, 경제계, 언론, 학계가 국내에서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글로벌 에티켓이나 세계 다양성, 국제 규범 존중 등 나이브한 용어는 국제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무시되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놀드 토인비의 저서 <역사의 연구> 속의 "외교에 '은혜'란 단어는 없다"는 문구를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당장 지난 5월 바이든 대통령 방한 시 '프렌드 쇼어링(동맹·우방 중심 공급망 재편)에 기반한 포괄적 전략동맹 차원에서 한미 공동성명 채택과 삼성·현대 그룹이 안겨준 거액투자 약속 선물 보따리에 대해, 미국 정부와 의회는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법'과 제약·바이오 제조 기반 구축이라는 '메이드 인 아메리카' '미국 우선주의' 기조로 응답하고 있음을 보지 않는가.

국내에서의 선진국 자화자찬 속에 과연 한국이 국제무대에서 노련하고 자주적인 협상기술과 태도로 진정한 선진국의 면모를 보여줄 수 있을지 시험대 앞에 선 모습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신만섭씨는 평화통일시민연대 남북경협위원장입니다. 프랑스 국립 뚤루즈 사회과학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후, 국내 다수 대학에서 강의했습니다. <프랑스식 사회민주주의의 한국 적용 가능성> <사회적 경제의 이론적 고찰> <유라시아 물류통로의 정치경제적 파급효과> 등 다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태그:#론스타 먹튀, #톰슨 멀티미디어(TMM), #대우전자,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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