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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침실에서 몇 달간 잠자던 책상을 안방으로 옮겼다.

책상은 원래 문간방에 있었다. 그곳은 나의 작업실이자 서재였다. 지난 가을 아이가 태어나자 나에게는 도무지 책상 앞에 앉을 시간과 정신적 여유도, 특별히 하고 있는 작업도 없었다.

아기 침대 옆 남는 공간에 책상과 책상 두 개를 쑤셔 넣고, 문간방은 주로 야간 육아를 담당하는 남편을 위한 휴식의 공간으로 바꿔주었다. 남편의 게임용 TV와 플레이스테이션, 로잉머신, 그리고 거실에서 이동한 반려묘의 캣타워가 곧 방을 채웠다. 몇 달 뒤에는 시누네서 얻어온 싱글 침대까지 들여 남편의 '하숙방'을 완성했다.

신생아를 키우며 저절로 각방을 쓰게 되자 안방은 나 혼자 쓰는 공간이 되었다. 집에서 가장 넓은 안방을 홀로 차지했지만 그닥 누리지는 못했다. 나는 하루종일 거실에서 아이를 돌보거나 주방에서 집안일을 돌봤고 안방은 씻고 자는 공간에 불과했으니까.

한쪽 벽면이 온통 아기용품으로 어수선했던 안방. 여기에 책상을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이곳은 내 방이되 내 방이 아닌 공간이었다.

거실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 아기용품들을 '우선' '일단' 여분의 공간이 있는 안방에 갖다 쌓아두다보니 어느새 산을 이뤘다. 볼풀공으로 가득한 아기욕조와 사고서 한 번 밖에 쓰지 않은 아기 등산 캐리어와 장난감 바구니와 당근마켓에 내놓았지만 아직 팔리지 않은 자질구레들을 들어내니 책상을 놓을 만한 공간이 나왔다. 다시 '내 자리'가 생겼다.
 
@Nick Morrison, unsplash
 @Nick Morrison, unsplash
ⓒ Nick Mo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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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앉는다. 마지막으로 여기 앉은 게 언제였더라? 추석 때 비행기를 타야 해서 아이의 신분증인 등본을 발급받아 인쇄했을 때다. 그 전에는, 어린이집 보육료 결제를 위한 공인인증서를 다운받느라고 컴퓨터를 켰다. 그 전에는, 종합소득세 신고를 했었지. 아이가 자는 시간을 피해 도둑처럼 방에 들어가 할 일만 냉큼 해치우고 나왔더랬다.

내가 이 책상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신혼 가구를 보러 다닐 때, 예산 범위를 다소 벗어나는 아카시아 원목 책상의 가격에 남편이 주저하자 '내가 이 책상에서 일 많이 해서 책상 값 금방 뽑을게!'라고 큰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은 일도 많이 했던 책상 그리고 컴퓨터지만, 지금으로는 안팎으로 먼지만 잔뜩 쌓였다.

막연히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고, PC카톡에 로그인해본다. 단톡방 두 군데서 대화가 오가고 있다.

'육아방' '지역맘'

아이 등에 올라온 트러블이 수족구의 증좌일지 묻는 질문. 새로 산 아기 소파가 만족스럽다는 후기. 국민 문짝 이제 들이기에는 좀 늦었을까요? 뭐 그런 이야기들. 1년 전의 나였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 했을 대화에 자연스레 끼어 본다. '수족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 직장을 다닐 때 쓰던 USB와 도장, 각종 노트와 외장하드 몇 개가 들어 있다.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오래된 영수증, 서류 들을 버린다. 언젠가 고쳐서 쓰려고 놔두었던, 망가진 수정테이프도 분리수거해 버렸다. 분홍색 플라멩고 장식이 마음에 들어서 잉크심을 갈아 쓰려고 했었던, 다 쓴 펜도 버린다. 벌써 몇 년째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들이다. 이게 다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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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를 비워낸 자리에는 지난주 병원에서 받아온 약봉투를 넣어뒀다. 복약 안내문을 고이 접어 부적처럼 봉투 속에 끼웠다. 언제든 힘들면 이걸 먹을 수 있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육아우울증, #육아번아웃, #육아일기, #자기만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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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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