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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가족법 개정안이 찬성 67%, 반대 33%로 통과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공개된 뒤 쿠바 사회의 논쟁을 촉발한 가족법 개정안은 그 분량만 100쪽이 넘을 정도로 방대하다. 가족법 개정안에는 성평등, 젠더폭력 대책 강화, 여성, 아동, 노인 권리 강화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이번 가족법 개정안 내용 중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시 동성결혼 법제화에 관한 부분이었다.

1975년에 제정된 기존 가족법은 결혼을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은 결혼을 "두 사람 사이의 결합"으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쿠바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되고, 동성 부부의 입양 역시 가능해진다.

독재국가 쿠바

모두에게 익숙한 것처럼 쿠바는 공산당이 이끄는 독재국가다. 북한이나 중국에 각각 최고인민회의나 전국인민대표자대회 등 형식적으로나마 야당이 존재하는 것과 달리, 쿠바의 인민주권민족회의는 605석 의석이 모두 공산당 소속 의원으로 꾸려져 있다. 무소속 의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쿠바 혁명을 일으켜 집권한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거치며 2008년까지 쿠바의 정치를 장악했다. 50년에 가까운 장기 독재였다. 피델 카스트로가 물러난 뒤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였다. 라울 카스트로 역시 쿠바 혁명에 참여한 혁명 1세대였으나, 사실상의 세습이었다.

성소수자 인권에 있어서도 쿠바는 통제적인 정책을 이어갔다. 쿠바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성소수자를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재판 없이 구금해 강제노역을 시키는 등 구조적인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그러나 쿠바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었다. 2018년, 라울 카스트로가 은퇴하며 국가평의회 의장의 자리를 미구엘 디아즈카넬이 이어받았다. 디아즈카넬 의장은 이듬해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였던 쿠바에 사유재산권과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개헌안을 제시했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 통제로 악명이 높았던 쿠바에 인터넷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는 개헌안을 선보였다. 국가평의회 의장 대신 5년 중임제의 대통령직을 만들어 장기독재를 막고, 총리직을 신설해 정부 운영 권한을 분산하겠다고 말했다. 디아즈카넬 의장이 제시한 개헌안은 국민 90%의 지지를 받으며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쿠바의 가족법

쿠바 사회는 그렇게 변화하고 있었다. 2018년 통과된 개헌안에는 원래 동성 간의 결혼을 법제화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가무신론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그렇듯 가톨릭의 영향은 짙었다. 당시 쿠바 정부는 종교계의 반발로 해당 조항을 개헌안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쿠바 의회는 다시 한 번 동성결혼 법제화를 시도했다. 언급했듯 쿠바는 1970년대까지 성소수자를 탄압했으나, 1979년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비범죄화했다. 동성 간의 결혼이 허가된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를 이유로 처발받지 않는 국가가 된 것이다. 이후 2010년 피델 카스트로 전 의장이 언론을 통해 탄압받았던 성소수자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의료복지가 발달한 국가인 쿠바는 2009년부터 성별 위화감을 겪는 성소수자에게 무료로 성전환수술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라울 카스트로의 딸인 마리엘라 카스트로는 동성결혼 법제화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쿠바의 국립성교육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마리엘라 카스트로는 쿠바 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성전환수술 무상화에도 큰 힘을 보탰다.

결국 쿠바 정부는 이번 가족법 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국민 3분의 2의 지지를 받으며 동성결혼 법제화에 성공했다. 마리엘라 카스트로는 "법의 통과가 자랑스럽다"고 밝혔다. 디아즈카넬 대통령 역시 국민투표 이전부터 이 법안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의사를 표해 왔으며, 국민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제 사랑은 곧 법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더 나은 나라가 되었다"고 말했다.

변화의 물결은 어디에나

현재 라틴아메리카 국가 가운데 에콰도르, 콜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 18개 국가에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에콰도르의 경우 2019년 헌법재판소 판결에 따라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고, 2020년에는 코스타리카가 동성결혼을 법제화했다.

동성결혼 법제화를 비롯한 개혁의 물결이 거세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쿠바의 가족법은 "가장 진보적인 가족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반발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번 가족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고, 결국 국민투표에서도 33%의 국민이 반대표를 던졌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제안한 법률에 90% 이상 찬성표가 나오는 쿠바의 정치상황을 생각하면 완전한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꼭 동성결혼 법제화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쿠바 정부의 의도에 의심의 목소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트워치(HRW)에서는 쿠바 정부가 "동성애자를 비롯한 개인이 차별에서 자유로울 권리를 미인대회처럼 투표에 부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쿠바 정부가 인권 탄압 문제를 감추기 위해 성소수자 인권 개선을 방패막으로 사용하는, 소위 '핑크 워싱'에 나서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여전한 진보

물론 쿠바는 정치적으로 통제되어 있는 국가다. 그것은 쿠바의 성소수자 인권이 개선된다고 해서 감춰지거나 용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쿠바 정부가 얼마 전까지 코로나19를 비롯한 국제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에 능숙히 대처하지 못하며 이례적인 반정부 운동에 직면했고, 이를 강력히 탄압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쿠바에 살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성소수자 개인에게, 이것은 역시 그런 잘못으로 감추거나 덮을 수 없는 분명한 진보다. 일회성의 진보도 아니다. 쿠바 사회는 그간 정치구조를 비롯한 여러 개혁을 시도해 왔고, 이번 가족법 개정안은 그 방향성에 포함된 일이었다. 쿠바 정치의 핵심 세력들이 모두 함께 지지해 만든 성과였다. 쿠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사회 전체가 보수성의 틀을 벗고 사회 개혁에 나서고 있으며, 쿠바는 이 물결에 동참한 것이었다.

쿠바의 사회통제와 일당 독재정치는 분명 규탄할 일이다. 그러나 성소수자 인권 개선으로 그 모든 잘못을 덮을 수 없듯, 다른 잘못으로 이 진보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 부자유한 사회 속에서 고통받고 있을 성소수자 개인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이것은 여전히 진보다. 삶 전체를 바꿀 수 있는 획기적인 진보다. 그 변화마저 폄하할 수는 없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미국과 대치하며 한때 세계를 전쟁의 위기로까지 몰아갔던 이 공산국가도 이제 변화의 바람 앞에 섰다.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이 통제국가까지도 인권과 성적 지향성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국제사회 앞에 섰다. 이제 또, 그 다음의 물결과 다음의 차례가 어느 국가에든 돌아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쿠바, #카스트로, #동성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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