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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6일 비가 내리는 저녁, 청년의 생존과 행복을 논하는 수원청년정책포럼에서 초대를 받았다. 어느 샌가부터 '불안'과 '두려움'이 한국청년들의 대표 심상으로 자리 잡은 세태 속에 행복을 탐구하는 공론장이 있다는 소식이 기껍게 다가왔다.

발제를 위해 앞선 모임들의 대화록을 살피다가 '불안과 두려움'이 '위험 신호를 나타내는 경고'라는 문장을 발견했다. 아마 그 날 참여했다면, '행복의 부재는 곧 생존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의 위기를 상징하며,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은 우리 사회가 처한 위기를 경고하는 메시지'라고 덧붙이지 않았을까 한다. 일정량 스트레스는 감내할 필요가 있지만, 오늘 날 청년세대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과잉을 넘어 치사량에 도달했다. 과도한 불안이 병리적 우울로, 심지어 자살까지로 이어지고 있다. 인간군집의 총체인 사회가 직면한 위험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기자말]
MZ세대의 욕망은 '평범한 일상'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 위해 소비를 경쟁하는 게 주류 문화가 된 건 하루 이틀만의 일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매시간 초를 다투며 SNS로 누군가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전시되고 있다.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라 인정받기 위해 사진의 픽셀 하나하나에 매달려 시간을 보내고, 세련되고 트렌디한 이미지를 갖기 위해 '아는 사람은 아는' 장소에서 수십 번의 셔터를 누른다. 두어 번이면 몰라도, 이런 삶을 자주 노출하려면 꽤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심지어는 요즘 대세로 떠오른 스타의 명품을 달고, 경제력에 비해 과한 외제차를 끌다가 개인회생에 처하는 일도 더러 회자된다.

그런데 2020년도 통계청이 임금노동자 월평균 소득을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30대는 40대보다 12.5%가량 낮은 수준이고, 20대는 40대 소득의 58.3% 밖에 되지 않는다. 21년도 말의 만 18~39세 서울 거주 청년 실태조사를 보아도, 생활비 부족을 경험한 비율이 30.2%, 아예 부모로부터 생활비 일부를 지원받는 비율은 45.4%나 된다. 저소득청년과 고소득청년의 소득격차는 무려 7.7배에 달한다. 소비트렌드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MZ세대의 생활양식은 대체 누가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물론 부족을 느끼며 무언가를 탐한다는 의미의 욕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때로는 삶을 진취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원초적인 욕구와는 달리 욕망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라 설명한다. 명품이 갖고 싶다면 그 명품 자체의 효용을 탐하는 것이기보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물건을 갖고 싶어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지라르의 말마따나 욕망이 내면에서 생겨난 게 아니라 타인을 통해 비자발적으로 이입된 것이라면, 자기만의 고유한 특질이라 여겼던 욕망이 어떤 경로를 타고 온 것일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SNS에 게시된 순간들이 행복의 척도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거다. 어떤 인생이든 뽐낼 수 있는 순간 보다 견뎌야하는 시간이 더 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SNS에 전시된 '평범한 일상'은 그럴듯한 겸손으로 포장된 '과시'일 뿐이니, 청년세대보다 MZ세대라 불리는 게 익숙한 젊은 소비자들은 그릇된 '과시욕'과 '모방욕'의 경쟁에 내몰려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르네 지라르는 욕망이 경쟁과 갈등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논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나 시공간적 거리가 멀어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 경쟁이 불가한 경우에는 폭력과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형제, 친구, 이웃처럼 욕망의 주체와 중개자 사이가 가까운 경우에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 욕망까지 모방하는 '소유모방'이 일어난다. 이 경우 상호 간의 지향하는 욕망의 대상이 동일하게 되므로 경쟁의식과 열망이 더욱 커지게 되어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욕망의 주체는 매개자에 무관심한 척하거나 욕망하지 않은 척하기도 하고, 때로는 중개자를 '제거'하거나 '제압'하려고도 한다. 중개자가 방해물처럼 느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욕망의 주체의 관심이 '무엇을 욕망하는가'에서 '중개자를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로 바뀌는 '목적전도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 대목을 확인하는 동안 이른바 '공정한 능력주의 경쟁'을 적극 옹호하며 갈등하게 된 '이대남·이대녀 현상'을 떠올렸다.

승자독식 사회의 다른 표현은 '고립을 욕망하는 사회'

미디어가 묘사하는 '이대남·이대녀'는 공정의 질서를 해치는 모든 특권과 불의에 분노하며 무한경쟁의 승리자를 욕망하는 세대다. 여느 연령층보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소비를 즐기며 자기만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다가도, 타자에 대한 질시와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소환되곤 한다. 온 사회가 돌연변이를 보듯 놀라워하며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청년층의 세대주의적 특질에 기인하기보다 우리 사회가 견지하는 경직된 욕망이 청년층의 선택에 반추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게 보다 적절하지 않은가 한다.

한 사회의 젊은이들이 품는 욕망은 기성사회의 욕망에서 전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층이 지극히 이기적이고도 부도덕한 욕망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면 고개를 돌려 그 사회의 이상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주류 이데올로기와 도덕 수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능력주의와 결합한 상품물신주의는 '과시가 가능한 삶'을 '평범'이라 부르며, 대기업에 근무하며 브랜드 아파트에 거주하는 걸 예삿일로 취급한다. 독식하는 승자를 추앙하는 사회에서 승자의 길을 가지 말라는 말은 팔자 좋은 위선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현대청년의 불행은 승자독식의 경쟁에서 승리하더라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데서 또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디지털문명의 이기는 생생하게 살아숨쉬는 삶을 욕망하도록 권하기보다 값비싼 순간을 과시하며 주변과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본질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길이다.

행복을 가로막는 진짜 불행의 씨앗은 자가 복제를 거듭하는 현대인의 욕망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가치'로 열매 맺기보다, '승자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착취'와 '자발적 고립'으로 귀결되어진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허한 각자도생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태에서 경쟁에서의 승리 여부는 진정한 행복과 무관할 수밖에 없다.

청년의 욕망을 제물로 한 희생양 삼기

전염병이나 전쟁과 같이 집단적 긴장과 공포심이 만연하여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 가장 취약한 계층은 주류사회로부터 추방되며 극심한 낙인과 소외를 겪는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이를 두고 희생양 삼기(scape goating)'라 명명했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공동체는 혼란에서 질서로 이행하기 위해 제의적 희생물을 추방하고 폭력을 가하며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표출한다. 추방된 희생물에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내부 갈등을 제어하고 공동체 화해를 도모하는 방식이다. 희생양 의식은 자기보존의 관점에서 심리적 불쾌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고안된 까닭으로, 집단적 위기의식과 죄책감을 소수의 희상자들에 전가함으로써 공동체의 위기를 모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하재성(2021)은 코로나19에도 공동체 스트레스와 분노의 환기를 위한 공격적인 낙인 행동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초기 감염자들에 가해진 사이버불링이 그 사례다. 코로나 상황의 낙인과 추방은 실제 임금 감소와 실직으로도 이어져 더욱 위험했는데, 물론 이 과정에서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경청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수법, 어딘가 익숙하다. 주류 사회의 언론과 정치권이 청년담론을 굴려온 방식과 꼭 빼닮아 보인다. N포 세대, 니트족, 캥거루족, 달관 세대, 이대남·이대녀 등 청년세대의 욕망을 힐난하는 딱지붙이기는 내용만 조금씩 다를 뿐 멈춰진 적은 없다.

세대 정체성은 다양한 사회정체성이 시간적 층위로 중첩된 까닭으로 그 자체로 내부이질성의 한계에 봉착한다. 같은 청년 나이대더라도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기성사회에 의해 타자화된 '청년'은 기성세대의 욕망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을 요구받으며, 각 개인이 처한 사회 환경적 맥락을 이해받기보다 개개인의 처세와 대응에 보다 많은 이목을 집중 받는다. 쏟아지는 관심과 의심의 눈초리의 병존 속에 기존 질서를 흩트리는 이질적인 존재는 분란을 일으키는 '분쟁자'일 뿐이다.

공동체적 삶의 부재가 당연시되고 승자독식이 만연한 현대사회의 아노미(Anomie)에 넘실대는 사회불안을 진정하기에 돌출된 청년은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제물이다.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추방하고 나면, 공동체에 남은 집단은 극적인 화해를 겪고 위기를 모면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추방자를 찾아야 할 테다.

무의미한 추앙과 추방의 굴레에 벗어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승자독식이 심어 둔 불행의 씨앗을 거두고, 더 나은 행복을 가져다줄 새로운 씨앗을 찾아 심는 거다. 타자(他者)에게서 눈을 돌려 우리 스스로 가진 욕망을 직조(直照)하고, 혼자가 아닌 다 같이 생존하는 길을 찾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안이다.

각자도생의 경쟁을 거부하고 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할 권리

지난 2년간 20대 우울증 환자는 45.2%나 급증했고, 2021년 말 기준 전년대비 20대 다중채무자는 21%가 늘었다. 다른 연령대는 감소한 카드 대출 연체액도 20대는 40.11%나 급증했다. 이는 검색창에 '청년'만 두드려도 쏟아지는 지표들이다. 청년정책 수립을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으니 적어도 이전보다는 '청년세대가 처한 사회상에 대한 인식'이 나아지며 관심도가 훨씬 높아진 것 같긴 하지만, 정부의 처방만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안타깝게도 정부와 정책전문가의 지식과 권위를 통한 청년문제 길들이기(taming)는 제도권 통계 수치의 증감에 열중한 정책만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고통의 층위를 나누고 싶지 않다만, 그럼에도 가장 극렬한 사각지대에 내몰린 누군가는 통계로는 연결될 수 없는 원자화 된 개인일 확률이 높다. 더구나 통계지표는 노출된 사회문제의 심각성을 추산하는 데 쓰일 순 있으나, 저마다의 고통을 발견하거나 방치된 삶을 치유하는 데 쓸 순 없다. 때문에 한국사회를 들쑤시는 얄팍한 청년담론에 만족하지 못한 입장에서, 젊음을 무기로 한 주도적인 목소리와 공동체적 연대는 단연컨대 여느 때 보다도, 앞으로도 절실하다고 강조하고자 한다.

혼자 살아남아 자족하는 삶은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평범한 일상'을 그리는 이들에겐 더욱 요원한 일이다. 이타적 삶은 고사하고 선의의 경쟁조차 요원해진 사회에 진정 필요한 건, 본보기로 삼을 우수한 개인이 아닌 롤모델이 되어줄 이상적인 공동체다. 그러니 옛 선조들이 읊조리던 양심·겸손·예의·정의·수양 등의 고루한 덕목들을 꺼내어 먼지를 털어내고, 존중·신뢰·연대·협력·상생의 가치로 라이프 스타일을 무장하는 일이 가장 빠르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방안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신승리로 끝나지 않으려면, 현실을 제약하는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개선하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많은 삶들이 존엄성을 회복하고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사회공동체가 당장의 쾌락에 취하기보다 해소되지 않은 사회적 병폐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 또한 혼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상생의 가치로 무장한 공동체적 연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 않은 즐거운 과정이 될 수 있다.

생각보다 행복의 조건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행복하기'보다 '행복의 자격을 얻기'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는 듯 하다. 혼자라면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함께 행복하기'를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보다 손쉬운 일이 행복을 욕망하는 걸지도 모른다. 우리의 욕망을 보다 다채롭고 풍부하게,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종류로 가꿔나가는 길이야 말로 '모두의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는다

참고문헌

- 김옥진. (2021). 르네 지라르의 관점에서 본 청년들의 소확행 심리. 신학과 실천, 77, 195-218.
- 이민주·박민진.(2022). 서울 청년의 행복격차: 잠재프로파일분석의 적용. 도시연구, (21), 227-271.
- 하재성. (2021). 트라우마, 희생양, 공동체 서사성: 코로나19 트라우마 이해와 공동체 회복을 위한 연구. 목회와상담, 37, 278-308.

덧붙이는 글 | 본문은 글쓴이가 2022년 9월 16일 수원청년정책포럼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태그:#청년문제, #행복, #공동체, #MZ세대, #이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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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주도 거버넌스를 실천하고 연구하는 대학원생 활동가입니다. 협동조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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