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끝을 모르고 오르는 물가에, 역대 최강이라는 태풍 '힌남노'의 북상까지. 풍성하고 즐거운 한가위라는데,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2022 추석 풍경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마감 세일, 마감 세일! 5개에 3000원, 5개에 3000원!"

지난 8월 9일 서울 동작구 남성사계시장에 폭우가 덮친 지 이제 약 한 달이 지났다. 인파로 북적이는 시장의 모습에 수해 흔적은 희미해 보였다. 추석을 앞두고 방문한 남성사계시장은 겉보기엔 활기를 되찾은 듯했다.

그런데 내부 사정은 제각각이다. 빗물은 한 달 전에 빠졌는데도 여전히 빗물과 씨름하고 있는 상인들이 있다. 명절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이들은 대목을 잡기는커녕 수해로 인해 발목 잡혔다.

폭우가 쓸고 간 자리... "수해 손실만 6000만원 정도"
 
 이성분(76)씨 가게에 있는 빗물에 젖은 면 티. 이씨는 "썩은 옷은 세탁해서도 팔 수 없다"며 "썩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곤혹스럽다"고 했다.
이성분(76)씨 가게에 있는 빗물에 젖은 면 티. 이씨는 "썩은 옷은 세탁해서도 팔 수 없다"며 "썩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쓰레기를 치우는 일도 곤혹스럽다"고 했다. ⓒ 이현성
 
"2200원에 가져와서 3500원에 파는 런닝을 1000원에 팔아요. 전부 세탁소에 맡기고 건조까지 해서 파는 겁니다. 런닝은 비에 안 젖었어요. 그런데도 습기 때문에 냄새가 배서 세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2일 남성사계시장에서 속옷을 파는 이성분(76)씨의 말이다.

수해가 남긴 흔적은 속옷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곰팡이가 핀 속옷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빗물은 포장을 비집고 들어가 썩어버려 누런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걸레처럼 내던져진 속옷은 그 수만 300벌은 족히 넘겼다. 처분에 처분을 거듭했는데도 손이 부족해 아직 처분하지 못한 옷들이었다. 이씨는 "수해로 인해 6000만 원 정도 손실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이성분(76)씨 가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곰팡이 핀 속옷. 이씨는 "수해 이후 가게가 습해졌다"며 "상태가 괜찮던 속옷도 다음날이면 곰팡이가 피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했다.
이성분(76)씨 가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곰팡이 핀 속옷. 이씨는 "수해 이후 가게가 습해졌다"며 "상태가 괜찮던 속옷도 다음날이면 곰팡이가 피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했다. ⓒ 이현성
 
수해는 마트 식자재 창고를 털기도 했다. 150평 규모 마트를 운영하는 장주영(61)씨는 "수해로 지하에 마련한 식자재 창고 천장까지 빗물에 잠겼다"며 "식자재만이 아니라 냉장고까지 훼손됐다. 가게를 새로 차리는 심정으로 식자재 창고를 복구하고 있다"고 했다.

수해를 입은 지 약 한 달 후인 지난 2일 장씨가 운영하는 마트 안팎 풍경은 딴판이었다. 얼핏 원상 복구한 듯한 마트 내부와 달리 건물 뒤편에는 쓰레기 봉지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물에 잠긴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처분하지 못한 쓰레기였다. 복구 작업이 한창인 식자재 창고는 공사장 냄새와 곰팡내로 채워져 있었다.
 
 지난 9월 2일, 장주영(61)씨가 운영하는 마트 지하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가 수리되고 있다.
지난 9월 2일, 장주영(61)씨가 운영하는 마트 지하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가 수리되고 있다. ⓒ 이현성
 
복원할 수 없는 삶의 터전... '대목'은 남 이야기

이씨와 장씨 모두 장사와 복구 작업을 넘나들며 삶의 터전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명절 대목은 찾아오지 않았다. 명절에 팔 물건을 빗물이 휩쓸고 간 탓이다. 명절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대목을 잡기는커녕 수해로 인해 발목을 잡혔다. 이들의 한숨은 더 깊어졌다.

"추석 대목에는 손님들이 내복 많이 사가죠. 빗물에 직접 닿지 않은 내복만 골라서 세탁소에서 빨아오긴 했는데 그래도 잘 안 팔립니다. 효자 상품인 양말도 물에 젖어 썩었어요."
 
 이성분(76)씨 가게에서 양말은 효자 상품이다. 한 켤레에 500원이다. 그런데 수해로 인해 양말이 썩어서 팔 수가 없게 됐다.
이성분(76)씨 가게에서 양말은 효자 상품이다. 한 켤레에 500원이다. 그런데 수해로 인해 양말이 썩어서 팔 수가 없게 됐다. ⓒ 이현성
 
수해 이후 이씨는 세탁비로만 40만 원을 썼다. 명절마다 손님들이 자주 찾는 물건이라도 팔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한편 비는 그쳤지만, 수해는 계속해서 이씨를 괴롭히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속옷에 곰팡이가 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게 안 습기를 타고 번지는 곰팡이 속도를 따라잡기란 이씨에게 벅찬 일이었다. 결국 하루바삐 판매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2200원에 가져온 런닝을 1000원에 판매하는 배경이 여기 있다.
 
 이성분(76)씨는 "명절에는 내복이 잘 팔린다"고 했다. 그런 그가 비에 젖은 내복 상자와 곰팡이가 핀 내복을 들고 있다.
이성분(76)씨는 "명절에는 내복이 잘 팔린다"고 했다. 그런 그가 비에 젖은 내복 상자와 곰팡이가 핀 내복을 들고 있다. ⓒ 이현성
 
정씨가 운영하는 마트도 비슷한 처지다. 식자재 창고에 보관하던 명절 선물 세트는 빗물에 잠긴 뒤 쓰레기가 됐다. 지난 2일 마트 뒤편에는 각종 식용유와 참치·햄 통조림이 버려져 있었다. 정씨는 "명절에 판매하려고 창고에 보관해 둔 명절 선물 세트와 멸치 박스에 구더기가 들끓었다"며 "명설 선물 세트를 새로 주문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9일까지 장주영(61)씨가 식자재 창고에 보관 중이던 참치 통조림. 장씨가 추석 대목에 참지 통조림을 판매하려 했지만, 수해로 인해 참치 통조림은 쓰레기가 됐다.
지난 8월 9일까지 장주영(61)씨가 식자재 창고에 보관 중이던 참치 통조림. 장씨가 추석 대목에 참지 통조림을 판매하려 했지만, 수해로 인해 참치 통조림은 쓰레기가 됐다. ⓒ 이현성
 
한편 마트에 명절 선물 세트를 제공하는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마트에 선물 세트를 제공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소요된다"며 "판매 기간을 고려한다면 마트는 적어도 두 달 전에는 주문해야 명절 대목을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재난지원금' 마련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  

남성사계시장에 빗물이 빠진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에 태풍 소식이 전파를 탔다. 태풍 '힌남노'가 시장을 강타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상인들은 잠을 줄여가며 자구책을 강구했다. 정씨는 "태풍 소식을 들은 남편은 새벽 3시까지 모래주머니를 쌓아 올렸다"며 그 자신도 "새벽에 나와 바깥에 둔 소주 박스들을 가게 안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남성사계시장 이재열 회장은 "수해를 입은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상황에서 들려온 태풍 소식에 상인들은 불안에 빠졌었다"며 "그런데도 상인들의 불안을 해소할 정부 대책은 요원했다"고 말했다.
 
 장주영(61)씨가 운영하는 마트 식자재 창고에 수해가 들이닥쳤다. 지하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는 천장까지 빗물이 찼다.
장주영(61)씨가 운영하는 마트 식자재 창고에 수해가 들이닥쳤다. 지하에 위치한 식자재 창고는 천장까지 빗물이 찼다. ⓒ 장주영
 
재난 앞에서 정부가 꺼낸 카드는 '돈'이었다. 남성사계시장 상인에게 동작구청은 오늘(8일)부터 '재난지원금'을 순차적으로 지급한다. 동작구청은 집중호우 피해 소상공인에게 점포당 재난지원금 500만 원을 8일부터 순차적으로 지급할 계획이다. 이번 지원금은 당초 계획된 긴급복구비 200만 원에 정부 지원금 200만 원과 시 지원금 100만 원이 추가된 지원금이다.

일회성에 그치는 재난지원금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회장은 "재난이 시장을 덮칠 가능성이 언제든 열려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며 "정부는 사후적인 접근보다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침수를 막을 설비를 마련해달라"고 했다.

국민대 행정학과 김종범 교수 역시 "남성사계시장 사건은 홍수피해지도를 최신화할 필요성을 일러준다"며 "적실성 있는 홍수피해지도를 만들고 수해를 예방할 설비를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추석#수해#홍수#남성사계시장#전통시장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