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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행을 떠났습니다. 무비자로 머물 수 있는 보름의 일정, 인도차이나 반도 남단 호찌민시티부터 북방에 위치한 수도 하노이까지 종단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일정은 반으로 나뉘었습니다. 절반은 함께 출국하는 친구들과의 관광, 다른 절반은 반드시 찾고 싶었던 곳들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행이 낯선 것과의 만남이리라 기대하곤 하지만, 실은 그 반대일 경우도 많습니다. 어느 여행지든 우리는 각자의 고정관념을 갖고 그곳으로 향하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우린 제가 원하는 것을 낯선 땅에서 확인하려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찾고 싶은 여행지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지게 마련이죠. 저와 제 친구들에게도 그럴 것이었습니다.

제 여행은 사람과 역사, 그리고 문화와 예술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오늘의 베트남에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단 보름의 일정으로 확인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했습니다. 제 친구들의 베트남은 또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을 게 분명했죠.

여행의 시작점에서 우리는 합의했습니다. 나눌 수 있는 것은 같이 하고 그럴 수 없을 것은 따로 하기로요. 따로 하는 며칠의 시간 동안 저는 제법 많은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번 기사에서 소개할 장소입니다.

한-베트남 현대사의 악연, 그 현장을 가다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대량 학살지를 가리키는 표지판.
▲ 낌따이촌 대량 학살지 표지판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대량 학살지를 가리키는 표지판.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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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과 한국은 떼어놓을 수 없는 나라입니다. 사실 세계에서 한국과 가장 닮은 나라를 꼽으라고 하면 저는 베트남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겁니다. 고대 한나라부터 수나라, 당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거친 중국의 영향권 아래 한반도와 베트남은 비슷한 역사적 행로를 걸어왔습니다. 한나라가 한반도에 네 개의 군을 설치했던 시기 베트남엔 9개의 한군현이 있었고,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던 시기엔 베트남 역시 수나라의 침공을 당했습니다.

중국으로부터 거듭된 침략을 당했고 또 그로부터 다양한 문물을 접한 역사는 한반도와 베트남이 유사합니다.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문화와 융합해 사회체제를 뒷받침하는 지배이념으로 발전시킨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전래 이후 체제를 위협하는 종교와의 전쟁을 벌였고 서구열강의 침탈에 고통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사정이 비슷한 베트남 사신을 만나 필담을 나누는 광경도 흔했습니다.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한반도의 역사는 우리에게 월나라쯤으로 알려진 그들의 역사와 유사하며 동질감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한국의 현대사는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기 고통스러운 기록입니다. 특히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하기를 자청한 한국이 그들의 현대사와 만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낡은 관점에서야 자유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전쟁이라고 가르쳤다지만 '통킹만 사건'의 조작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참한 사실을 부인하긴 어려우니 말입니다.

개중에서도 특히 괴로운 것은 한국군에 의해 이뤄진 전쟁범죄행위를 목도할 때입니다. 베트남 현지엔 여러 증오비가 서 있는데, 개중 일부는 한국군을 향한 것입니다. 베트남 중부 도시 뀌년에도 그런 비가 여럿 있습니다. 국군 맹호부대가 상륙한 이 지역 곳곳에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피해가 있었습니다. 1966년 낌따이촌과 떠이빈사 고자이마을, 쯔엉탄마을 등지가 대표적인 피해지로 유명합니다.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학살 집단묘지와 사당 출입구가 잠겨있는 모습.
▲ 낌따이 학살 집단묘지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학살 집단묘지와 사당 출입구가 잠겨있는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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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의 현장

그중 저는 낌따이촌을 찾았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후보지를 물색했고 낌따이촌에서 증오비가 있던 자리에 집단묘지를 세우고, 사당과 위령비를 건립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증오비를 철거하고 한 걸음 나아가 이뤄진 베트남인들의 추모가 어떤 방식일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인터넷에선 도무지 정확한 주소지를 알 수가 없어 현지에서 한베평화재단에 메일을 보내 위치를 문의했습니다. 재단 사무처에선 기꺼이 주소인 '빈딘성 안년현 년퐁사 낌따이촌 (thôn Kim Tài, xã Nhơn Phong, huyện An Nhơn, tỉnh Bình)'과 구글지도 좌표를 보내주었습니다. 뀌년시에서 바이크를 빌린 뒤 40분은 달려야 들어설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낌따이촌 학살은 1966년 1월 9일 벌어진 참극입니다. 이 마을에서 베트콩 병사가 쏜 총에 국군 한 명이 죽었습니다. 부대는 마을로 진입해 주민들을 공터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43명을 포박해 한 가옥에 가두고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일부 주민이 목숨을 건진 덕에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전쟁 뒤 이곳에 집단묘지가 세워졌고 1985년 그 자리에 증오비가 건립돼 국군에 대한 원한을 새겼습니다.

아쉽게도 제가 찾은 날엔 사당이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이틀을 연속해 찾았으나 문은 굳게 닫혔고 주민들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찾아온 적이 많다며 호의적이진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저는 희생자들의 명단이 적힌 비석이 보이는 담장 밖에다 사들고 간 꽃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입구에 선 한국군 증오탑.
▲ 낌따이촌 한국군 증오탑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입구에 선 한국군 증오탑.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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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규명도 보상도 없이 남은 증오

담장 밖에서 바라본 비석엔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23명의 이름과 생년이 적혀 있었습니다. 참극이 있었던 1966년 기준으로, 일흔이 넘는 노인부터 3살짜리 아이까지 그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10살도 되지 않은 애들이 7명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왜 죽는지조차 몰랐을 그들의 죽음에 오늘의 한국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무참하게 와 닿았습니다. 굳게 잠긴 문만큼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진전되지 않는 문제들이 답답하게 여겨졌지요.

허탈하게 마을 입구로 돌아 나올 때 공사 중인 터에 서 있는 탑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늘로 두 팔을 뻗고 가슴팍을 드러낸 여성과 그를 둘러싸고 엉겨 붙은 사람들의 형상이었습니다. 탑 앞엔 'chứng tích căm thù'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증오의 증거'란 뜻이 될 겁니다. 이 마을의 증오는 증오비가 철거된 이후에도 여전히 서슬 퍼렇게 남아 저의 조국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베트남과 한국 사이에 증오만 남은 건 아닙니다. 정부와 기업 차원에서 이뤄지는 협력도 활발합니다. 한국과 베트남은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또는 그보다 더 협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진상조사와 보상은 전무했지만 전직 대통령들의 사과와 유감 표명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민단체와 지자체 차원의 교류가 지속되고 있다는 건 그중에서도 다행한 일입니다.

특히 용산구가 깊은 상처를 가진 뀌년과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이태원에는 퀴논길이라는 도로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문 닫힌 사당과 결코 친절하지만은 않았던 몇몇 사람들을 지나 마을을 나오면서 귀국하면 꼭 이 도로에 가보아야겠다고,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다움을 그곳에서라도 찾아보아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끝내 사당 안에 들어서지 못했으나 낌따이촌에서의 여정은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학살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 낌따이 학살 희생자 위령비 베트남 뀌년시 낌따이촌 학살 희생자 위령비의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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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베트남, #뀌년, #낌따이촌, #맹호부대, #베트남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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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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