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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5일 오후 10시 13분]

명절만 돌아오면 유독 분주해지던 상사가 있었다. 며칠간은 차 트렁크가 넘치도록 선물을 받았고, 집으로 보내 달라, 문 앞에 두고 가라, 심지어는 "뭐예요?"라고 묻는 통화 내용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참기름, 고추장, 참치캔, 스팸, 치약이나 칫솔 등 소소한 생활용품은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에게 명절 선물 수집은 일종의 루틴이었다.  

업무상 준비했던 명절 선물
 
추석 특집 MBC 무한도전의 한 장면
▲ MBC 무한도전의 한 장면 추석 특집 MBC 무한도전의 한 장면
ⓒ MBC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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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면서 명절에 선물을 받아본 기억은 신입사원 시절 2년 정도뿐이다. 그것도 협력 업체, 즉 을사에서 갑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내던 선물이다. 15년 전에는 협력사에서 상품권을 포함해 다양한 선물을 회사로 보냈다. 팀장은 모든 선물을 직급에 상관없이 팀원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 팀원들은 불만도 고마움도 없이 그저 자기 몫을 챙겼다.

입사 초 팀장이 소소하게 나눠줬던 선물 외에는 명절 선물을 받은 적이 없다. 십수 년 동안 회사에서도 명절에 직원들에게 손에 들고 갈 만한 선물을 주지 않았다. 대신 명절 연휴에 앞서 대표이사의 궁서체 편지가 담긴 현금 봉투를 나눠줬다. 덕분에 한 직장을 15년 다니면서 명절 즈음에 선물 보따리를 들고 퇴근하는 일은 없었다.

반면 선물을 해야 할 사람은 많았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팀장이 바뀌고 팀도 바뀌고 업무도 바뀌었다. 동시에 일명 거래처를 상대하는 을이 되었다. 회사로 날아들던 선물은 사라졌다. 명절이 되면 거래처 사람들 주소를 취합하고 적정한 가격, 적정한 상품을 정성스럽게 골라서 발송했다. 형식적인 접대였지만, 기분 좋은 명절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이상한 일들을 겪기 전까지는.

뜻밖의 일이 매년 반복해서 일어났다. 컴플레인 전화를 직접 받는 일이 발생했다. 보통 배송한 곳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몇몇 사람은 업무 담당인 내게 화를 표출했다. '보내준 과일이 물러서 쓰레기만 늘었다'는 얘기부터 '무거운 걸 왜 경비실에 맡겨 놓느냐', '다음부터는 다른 선물로 보냈으면 좋겠다'는 등등의 불만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니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명절만 되면 비슷한 일이 발생했고 찝찝한 마음이 되살아났다.

어떤 선물이든 사회에서 나누는 선물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주고받는 것이고 이면에는 기브앤테이크라는 무언의 바람도 담겨 있다. 이러한 의도가 없다면 아마 갑과 을 관계에서 선물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선물의 의도와 본질을 모두가 잘 알기에 물질 자체보다는 마음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주는 마음 받는 마음 모두 마찬가지다. 선물의 근본은 마음을 쪼개어 전하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업체가 전하는 선물 하나 자기 돈으로 사지 못할 사람은 없다. 주는 생색도 받는 당연함도 불필요한 일이다. 공짜라서 더 좋은 선물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서로의 마음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바뀐 시대, 마음 넉넉한 명절로
 
선물은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이 아닐까
▲ 선물 선물은 마음을 주고 받는 일이 아닐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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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직장생활 동안 상사가 또 바뀌고 업무도 바뀌고, 시대까지 바뀌었다. 김영란 법이라는 새 시대의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이 법은 2016년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취지는 언론인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포함한 공직자의 부정 청탁 및 금품수수를 금지하는 것이다. 해당되는 사람이 제한적인 만큼 부정부패 금지가 목적이지 고작 몇 만 원 몇 십만 원의 위반을 발본색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 법에 따라 2016년부터 명절 선물 금액에 마지노선이 정해졌다. 법이 정한 대상과 관련한 사람 간에는 기준을 초과하는 선물이 오갈 수 없게 되었다. 직무와 연관 있는 공직자에게 주는 선물은 5만 원으로 제한된다. 선물은 상관없지만, 상품권이나 기프티콘 같은 유가증권은 5만 원 이하여도 안 된다. 선물 종류 중 농축수산물은 2016년 5만 원에서 2018년부터 10만 원까지로 상향했고, 올해는 상한선을 20만 원까지 높였다.

김영란 법이 막 시행됐을 당시에는 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선물이 소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주는 사람의 생색도 줄고 받는 사람의 기대도 크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아예 명절 선물을 없애는 기업도 늘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선물을 주고받아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15년 다니던 회사에서도 김영란 법 시행 몇 년 후 명절 선물을 없앴다. 이직한 회사는 개인이든, 업체 간이든 대내외적으로 선물 주고받는 것이 애초부터 금지였다. 선물을 고민하고 주소를 확인해 명단을 작성하던 담당자 입장에서 명절을 맞이하는 마음은 한결 가볍다.

요즘 사회 분위기는 내키지 않는 선물을 형식적으로 전하던 수직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다. 모두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마음 한 조각 나누고 싶은 이에게 진심 어린 선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늘어나지 않을까. 

십수 년 직장 생활, 명절 즈음의 퇴근길에도 평소처럼 양손이 가볍다. 그 어디에서도 집으로 날아드는 선물이 없다. 선물은 결국 마음의 빚이다. 카카오톡 기프티콘 하나를 받으면 다시 하나를 발송하는 것처럼 안 주고 안 받는 문화나 혹은 진정한 마음으로 전하는 선물, 테이크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명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마음은 이미 넘칠 만큼 풍성하다. 굳이 명절에 물질적인 무언가가 오가야 맛은 아니다. 가족 간 넉넉한 정과 푸짐한 마음의 여유를 실컷 주고받으면 그만이다.

시민기자 그룹 '꽃중년의 글쓰기'는 70년대생 중년 남성들의 사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직장인이야기, #명절선물, #갑과을, #김영란법, #선물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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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직장인,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아빠, 매 순간을 글로 즐기는 기록자. 글 속에 나를 담아 내면을 가꾸는 어쩌다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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