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3 17:26최종 업데이트 22.08.23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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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강제동원) 현금화가 임박한 가운데, 일본은 치킨게임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한국을 향해 액셀을 밟으며 '충돌이 무서우면 핸들을 꺾으라'는 식으로 압력을 가한다. 윤석열 정부를 향해서도 '해법을 들고 오라'는 태도다.

지난 19일은 대법원이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제기한 재항고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할 마지막 날이었다. 피해자 김성주(93세)·양금덕(93세)의 신청으로 압류된 특허권 2건을 현금화해주지 말라는 미쓰비시의 재항고를 받아들이든가, 대법원에서 이미 확정된 사안이므로 더 이상 심리가 불필요하다며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려 재항고를 기각하든가 해야 하는 날이었다.


일본 측이 볼 때 인상적인 일들이 최근 여러 건 있었다. 지난달 26일에는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보내 '정부가 일본과 외교적 협의를 하고 있으며, 민관협의회를 통해 원고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며 절차 연기를 요청하는 듯한 취지의 의견서를 보냈다.

8·15 광복절 때는 윤석열 대통령이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입니다"라며 "한일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발언했다. 강제징용 현금화 문제가 첨예한 현 상황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되기 쉬운 대목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잔디마당에서 열린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17일에는 윤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일본이 우려하는 일이 없도록 방안을 강구중이라고 말했다. 현금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발언과 다름없었다.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이다. 불법을 전제로 한 배상과 그렇지 않은 보상의 차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굳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대법원의 배상 판결에 기초한 현금화 조치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흐름들이 이어지던 속에서 대법원은 문제의 8월 19일을 그냥 넘겼다. 언론에서는 한·일 양국 정부가 시간을 벌었다고 평하고, 피해자들한테서는 대한민국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반응이 나왔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김성주 할머니는 "국가가 걸림돌"라며 "정부가 사과를 끌어내는 게 아니고 두루뭉술하게 무마시키려 한다"고 탄식했고, 양금덕 할머니는 "갈수록 해결되기는커녕 더 악화만 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걸림돌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탄했다.

한국 동향 체크 중인 일본

일본 언론들은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움직임뿐 아니라 피해자와 언론의 동향도 상세히 체크하고 있다.

그런 보도들 중에서 최근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가 발행하는 <분슌 온라인> 18일자 기사 '한국인에 대한 비자발급 금지도? 일본 기업의 자산 현금화, 한국 여론이 전전긍긍하는 이유(韓国人へのビザ発給禁止も? 日本企業の資産現金化、韓国世論が"戦々恐々"としているワケ)'다.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가 발행하는 <분게이 온라인> 18일자 기사 '한국인에 대한 비자발급 금지도? 일본 기업의 자산 현금화, 한국 여론이 전전긍긍하는 이유(韓?人へのビザ?給禁止も? 日本企業の資産現金化、韓?世論が“??恐?”としているワケ)' ⓒ 분게이슌주 캡처

 

사실, 전전긍긍해야 할 쪽은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일본정부다. 그런데도 일본 언론의 눈에는 한국이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가해자가 한국 정부에 '해결책을 갖고 오라'고 재촉하는, 공수가 뒤바뀐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는 제목이다.

<분슌 온라인>은 한국인들이 강제징용 현금화로 인해 일본의 제재를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일본의 제재 조치에 의해 한국이 심대한 데미지를 입게 된다며 한국 국내는 소란스럽다"고 전한다.

또 현금화를 요청하는 피해자들도 실상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중도 성향 언론사 소속이라는 익명의 한국 기자를 인용해 "피해자 측은 현금화가 될 경우에는 사죄가 없어지게" 된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현실과 동떨어진 분석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일본이 '한국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판단한다는 점이다.

위 기사는 앞으로의 상황을 상당히 낙관한다. 법원에서 설령 현금화가 실현되더라도 윤석열 정부가 그냥 있지는 않으리라고 기대감을 표시한다.

기사는 현금화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해 "앞에 나온 기자는 '가능성은 있지만 높지는 않다'고 말하는 한편, 만약 그렇게 되면 '한국정부에 의한 긴급조치가 취해지게 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고 보도했다. 한국 법원이 그런 조치를 내리게 되면 윤석열 정부가 긴급조치라도 취하게 될 거라고 중도 성향 언론사에 속해 있다는 그 기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 염려하는 일본, 과거엔

<분슌 온라인>은 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도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기사가 우려를 표한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불안한 것은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의 자세로 봐서는 일본 기업들이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지지율이 낮아서 일이 그르쳐질 수도 있다고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분슌 온라인> 보도에서도 나타나듯이, 윤 대통령 당선 이후로 일본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낙관론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다. 일본의 제재가 두려워서라도 한국인들이 막판에 태도를 바꾸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표하는 보도도 나온다.

이런 보도들을 접하면서 떠올리게 된 사례가 두 가지 있다. 지금과 똑같지는 않지만, 지금만큼이나 한일관계가 첨예했던 상황에서 막판에 번번이 핸들을 꺾은 쪽은 일본이었다는 사실이다.

노다니엘 전 홍콩과기대 교수의 <독도밀약>이나 <월간중앙> 2007년 4월호 등에 소개된 것처럼, 미국의 재촉과 압력 하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진행되던 1965년 초반에 일본은 독도 영유권을 놓고 한국 정부와 비밀 협상을 벌이다가 '한·일 양국이 독도를 자기 영토로 주장하는 것에 대해 서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와 더불어 '한국이 독도를 점거하는 현 상태를 유지한다'는 등이 담긴 독도밀약을 그해 1월 11일 체결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박정희 정권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해준 부분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또 '한국이 독도를 소유하는 현 상태를 유지한다'고 하지 않고 '점거하는 현 상태를 유지한다'고 한 것 역시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한편, 한국이 독도를 점거하는 상태를 인정하기로 한 것은 일본의 외교적 실패인 측면도 없지 않다. 독도 영유권을 마무리하고 신속히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의 압박을 받던 상황에서 한국보다 일본이 먼저 핸들을 튼 결과라고도 해석될 여지도 있는 사례다.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한민국 공권력을 발동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자행하자, 일본 정부는 박정희 정권의 처사에 불만을 갖게 됐다. 1974년 8월 15일에 재일동포 문세광이 육영수를 저격하자, 일본 정부는 '문세광은 김대중 납치에 분개해 박정희 독재를 무너트리려 했다'며 문세광을 두둔하는 듯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처럼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박정희는 그해 8월 31일 우시로쿠 도라오 일본대사를 불러 국교중단 가능성을 시사하며 일본을 위협했다. 한·일 관계단절은 한미일 동맹 와해를 의미하므로 누구보다 당황한 쪽은 워싱턴이었고, 미국이 화해를 독촉하는 상황 속에서 핸들을 먼저 튼 쪽은 일본이었다.

그해 9월 19일 시나 에쓰사부로 자민당 부총재가 총리 특사로 방한해 박정희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고 상황을 마무리했다. 미국의 대한·대일 영향력이 지금보다 강할 때 일어난 일들이기는 하지만, 한일관계가 매우 첨예했던 상황에서 두 차례에 걸쳐 태도를 바꾼 쪽은 일본이었다.

지금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한국 국민들의 의지는 확고하다. 윤석열 정부의 움직임이 이 의지를 꺾을 수 있으라고는 보기 힘들다. 이 상황에서 핸들을 틀어야 하는 쪽은 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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