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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화 교동도 봉소리에서 마주하는 선홍빛 저녁놀의 아름다움.
 강화 교동도 봉소리에서 마주하는 선홍빛 저녁놀의 아름다움.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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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폭풍 같은 여름이 한복판인데 벌써 가을이 스며드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 마음이 이미 가을에 안긴 걸까. 귀뚜라미가 벌써 도심을 적신다. 고단한 하루의 스트레스를 여린 울음으로 달래준다. 왜 울어야 맘이 편해지는지 이제야 알 듯하다.

금요일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일상의 노곤함이 모두 털리는 날이다. 나이가 들수록 불상의 조직에 갇혀 불편한 관계로 산다는 건 참으로 고역이다. 모든 게 힘들고 더 어렵다. 특히 내가 X세대라 그런지 MZ세대의 톡 쏘는, 사이다 당당멘트엔 당할 재간이 없다.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 옛날 가수 이무송의 '사는 게 뭔지'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아직 알 순 없지만. 정들어 사는 인생 힘들어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당신! 그 당신조차 없는 나는 여지없이 나만의 아지트로 발길을 옮긴다.
 
조그만 황토방을 무소유의 방으로 정하고 점점 스님의 사찰로 변해가는 모습.
 조그만 황토방을 무소유의 방으로 정하고 점점 스님의 사찰로 변해가는 모습.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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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달이다. 강화도 교동 봉소리 논두렁과 산골짜기, 청정수로와 해병대 해안초소가 전부인 한갓진 무공해 마을. 이곳에 제2의 둥지를 튼 게 벌써 30일이 지났다. 지나고 보니 어떻게 내가 이곳 북녘 땅까지 오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년 전 인천시의회 교육위원회에 근무할 때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동 땅을 밟았다. 이곳 평화의 섬에 '인천난정평화교육원'을 세우고자 교육위원을 보좌하며 교육청 공무원과 몇 번을 다녀갔다. 그때마다 참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였다. 당시 회상이다.

"뭘까. 뭐지. 이런 기분은. 왜 태어나서 처음 와 본 곳인데 데자뷰가 느껴지는 건지. 마치 꿈속에서 항상 마주쳤던 그런 풍광들이. 하나도 낯설지 않은 마치 고향같은 푸근함이. 아마도 언젠가 이곳에 둥지를 틀 수도 있겠구나.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게 있어 교동은 그만큼 신비롭고 애처롭고 애틋한 시골이었다. 그러나 꿈은 꿈에 지나지 않는 법. 이후 시의회를 떠나 다시는 교동에 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운명이었던가. 우연히 인터넷으로 강화도 낚시터를 살피던 중에 내가 원하던 뜻밖의 황토방을 만나게 된 것. 그런데 그곳이 바로 그토록 가고 싶었던 평화의 섬 교동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강처럼 자연스럽게 흘러 어느덧 연어처럼 고향에 정착했다. 제2의 고향. 물론 조상도 없고 친척도 없다. 그저 내 마음속의 고향인 것. 진짜 고향은 경기도 이천이지만 그곳 못지않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박한 고향마을이다.
 
오지마을 청정수로의 저녁놀은 넌지시 내게 일러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은 '멈춤'이라고!
 오지마을 청정수로의 저녁놀은 넌지시 내게 일러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은 "멈춤"이라고!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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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강화로 가는 길목은 한여름을 지나 벌써 가을향기가 가득했다. 하늘도 더 파랗고 뭉게구름도 더 동그랗고 예뻤다. 모든 게 다 가을의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넓게 뚫린 신작로를 지나 심산유곡 사랑샘 향기를 맡으며 귀뚜라미의 발걸음을 따라 교동에 도착했다.

언제나처럼 작고 아담한 산길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감성을 품고 있다. 논두렁 오솔길을 따라 하나둘 발자국을 새기며 빨간 황토의 잔향을 맡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청개구리들이 나를 둘러싼다. 잠자리들도 어깨를 두드리며 인사를 건넨다.

매번 고향을 갈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꽃과 나무로 집 주변을 안아주겠다고. 이번엔 그 첫 야심작으로 산양삼 씨앗과 양귀비 꽃씨를 뿌렸다. 황토하우스를 포근하게 감싼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가 낫으로 길을 닦고 삽으로 땅을 일궜다. 돌을 거르고 낙엽을 덮으며 새 생명의 환희를 심었다.

혈관을 따라 몸과 마음에 땀방울이 가득하다. 언제봐도 비릿한 열정의 땀 냄새. 아 얼마만인가. 매일매일 일상을 책상 앞에 저당 잡혀 오도 가도 못한 채 컴퓨터 감옥에 갇혀 사는 인생이라니. 역시 시골을 택하고 고향이 다시 생겼다는 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치의 극치라는 걸.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치가 어디 있을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 산양삼이 자라고 빨강 노랑 양귀비가 화려한 아름다움을 빛낼 것이다.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삶의 내공도 더욱 아름다워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모처럼 한 달만에 오지마을 첫날밤을 보냈다. 그토록 아름다운 별천지를 볼 순 없었지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의 설렘을 읽을 수 있었다.
 모처럼 한 달만에 오지마을 첫날밤을 보냈다. 그토록 아름다운 별천지를 볼 순 없었지만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의 설렘을 읽을 수 있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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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간다. 시간이 무척 빠르다. 단순하다. 거침없다. 게으를 수가 없다. 눈에 보이면 몸은 누워 있는데 자꾸 발이 먼저 움직인다. 몸은 계속 쉬고 싶은데 머리는 이미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었는데.......맘 따로 몸 따로 내 손과 발이 흙에 닿아야 맘이 편안하다. 농부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그동안 산으로 둘러 쌓인 오지마을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잘 볼 수 없었다. 비도 많이 내렸고 먹구름도 많이 덮였다. 오늘은 기필코 밤하늘을 수놓은 별천지의 아름다움과 카시오페이아 선율을 접하리. 
 
반공소년 이승복. 하! 교동초등학교 지석분교에서 만난 어릴 적 우리의 우상들
 반공소년 이승복. 하! 교동초등학교 지석분교에서 만난 어릴 적 우리의 우상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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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시장 청춘부라보
 대룡시장 청춘부라보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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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잠깐 점심을 먹으러 대룡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가보는 대룡시장은 의외로 너무 좁고 인산인해였다. 푹푹 찌는 날씨에 사람 온도까지 더하니 도저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장을 나와 잠시 폐교를 들러 옛 정취를 찾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산들거리는 바람의 노래를 들으러 발길을 옮긴다. 시골에 오니 그토록 집착하던 텔레비전의 유혹도 어림없다. 산하를 뒤덮는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더 없으리니.

터벅터벅 뚜벅뚜벅 발걸음 하나 또 하나를 되짚는다. 빨간 석양이 바다 위를 날아다닌다. 이내 보랏빛 황혼이 철책 해안선을 따라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떠나간 그 사랑이 농익는다. 보고픈 그리움이 깊게 밴다.

이토록 부드럽고 순박한 농로만큼이나 도심의 거친 생활이 부디 더 느리고 더 부드러워지기를. 매번 부딪치고 다투고 예민한 감정만 가득한 직장생활이 부디 더 가볍고 더 관대해지기를. 더디 가도 오직 사랑! 굽어 가도 오직 희망!

태그:#강화도 , #교동도, #평화의 섬, #시골살이,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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