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고 황유미님의 죽음 이후, 반도체 전자산업의 위험성은 이제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반올림과 함께 많은 분들이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알리려 노력해 온 덕분입니다. 전자산업 피해자들의 직업병 인정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넘치는 반면 반도체 산업의 위험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의 얘기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은 이하늬 작가와 함께 반도체 전자산업 피해자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위험이 떠넘겨진 하청노동자에게, 다른 나라의 전자산업 노동자들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기자말] |
"너 그거 맞으면 골로 가."
이도윤씨(가명)가 동료 형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다. 설비마다 설치돼 있던 '이오나이저'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정전기 발생을 방지하는 장치인 이오나이저에서는 전리방사선이 나온다. 하지만 무색무취의 전리방사선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끼기는 어려웠다. 형들의 농담에서 막연하게 '위험'을 짐작할 뿐이었다.
골로 간다는 농담을 들으며 지낸 지 6년, 이도윤씨는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그가 진단받은 병은 혈액암 중에서도 인구 10만 명당 6.4명꼴로 발병하는 희소질환이며 발병자의 절반 이상이 60~70대다. 당시 그는 만 27세였다(이씨의 요청에 따라 정확한 질병명은 밝히지 않는다).
이씨는 만 21세이던 2011년부터 혈액암 진단을 받은 2017년까지 약 6년 동안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 액정공정에서 PM(유지보수) 엔지니어로 일했다. 주요 업무는 설비 클리닝, 고장 대응, 이오나이저 교체, 세정용품(유기용제) 준비였다. 상시적으로 고농도의 화학물질과 전리방사선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씨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자주했다. 냄새가 지독했기 때문이다. 그가 다룬 화학물질은 아세톤, IPA, 에탄올, TMAH(수산화테트라 메틸암모늄), NMP(N-메틸피롤리돈) 등이다. 등급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에게 암 등을 일이킬 수 있는 유해화학물질이다. 방사선도 마찬가지다. 방사선은 암 발생의 역치가 없어 누적 선량 측정 결과가 낮아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냄새에는 곧 익숙해졌고, 설비가 갑자기 고장 날 때면 생산량을 맞추지 못할까봐 방독마스크도 착용하지 못한 채 일을 했다. 글라스가 깨졌을 때는 설비 안으로 몸을 집어넣어 세정액(화학물질) 범벅이 된 글라스를 치웠다. 원칙대로라면 설비를 끄고 수리를 해야 했지만 설비를 가동시키면서 수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입사 전 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혈액암 진단을 받은 이후 그는 동료들에게 "정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전의 그가 그랬듯 동료들에게 가닿지 않는 거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지난 5월 16일, 이씨와 화상인터뷰를 진행했다.
"'방독마스크 좀 끼고 올게요' 할 수가 없다"
- 발병 당시의 상황이 궁금하다.
"웃을 때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냥 근육통인줄 알고 넘어갔다. 한 달 정도가 지나고 회사에서 일하는데 갑자기 가슴통증과 식은땀이 났다. 처음 겪어보는 증상이었다. 사내 병원에서는 약을 지어주겠다고 했는데 원인을 알기 위해 바로 큰 병원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뭔가 큰 게 있다고 했다."
- 진단을 받은 이후, 산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나.
"엔지니어 직업 특성상 문제가 발생하면 항상 원인을 찾는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부러 생각을 멈췄다. 치료를 끝내고 복기해 보니 교대근무를 하니까 면역력이 정상이 아니었겠구나, 형들이 말했던 이오나이저가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건가? 이런 식으로 생각이 가닿아 산재를 신청하게 됐다."
- 일을 하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가 있나.
"이오나이저 관련해서는 형들이 '골로 간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장난처럼 느껴졌다. 이오나이저의 위험성은 몸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 화학물질은 냄새를 맡자마자 '계속 맡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들이었다. 코를 깊이 찌른다는 느낌? 뇌를 찌른다는 느낌? 이었다."
- 다루는 화학물질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나.
"혼합된 약품은 이름이 다르게 불리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물질인지는 모르지만 기본적으로는 회사에서 다 알려준다. 그런데 이런 물질들이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좋지 않다, 위험하다 정도로만 알았다."
- 그럼 일하면서 특별히 '이거 위험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
"글라스가 깨졌을 때는 특별히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정액 범벅이 된 글라스를 엔지니어들이 직접 치워야 한다. 원칙대로라면 마스크를 껴야한다. 하지만 일이 바쁘다 보니까 방독마스크를 끼지 않고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형들이 시간을 다퉈가면서 일하는데 막내인 제가 '방독마스크 좀 끼고 올게요' 할 수가 없다."
이씨에 따르면 회사는 표면적으로는 안전관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엔지니어가 다루는 화학물질의 이름을 알려줬고, 방사선 노출 측정을 위해 모든 엔지니어에게 선량계를 부착하도록 했다. 환경안전팀은 라인 내를 돌아다니며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는 팀을 적발했다. 이는 인사고과에 반영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화학물질 이름을 알려줬지만 구체적인 위험성은 알려주지 않았고, 모든 엔지니어가 선량계를 차고 일했지만 정확한 노출 수치는 알려주지 않고 '정상'이라고 했을 뿐이라는 게 이씨의 증언이다. 기준치도 알려준 적이 없다고 한다. 이씨는 일하는 6년 내내 선량계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노동자들이 안전수칙을 지킬 수 있으려면 좀 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안전보다 생산량이 우선인 상황인 상황에서는 환경안전팀이 아무리 돌아다니며 적발을 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엔지니어 업무가 보호장구를 착용하지 못 할 정도로 바쁜가.
"엔지니어 업무는 크게 개조개선과 대응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개조개선을 미리 해둘 수 있는 일이다. 시간을 잘 짜면 바쁘지 않게 해결할 수 있다. 대응은 갑자기 일어나는 긴급한 일들이다. 생산량에 쫓기다 보니 대응도 쫓기면서 해야하는 것이다. 설비가 장시간 다운이 되면 욕까지 나온다. 그런 분위기에서 누가 안전수칙 제대로 지켜가면서 일을 하겠나."
- 회사는 이오나이저 관련해서는 인터락, 차폐가 잘 돼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어땠나.
"입사했을 때만 해도 차폐나 인터락이 잘 돼 있지 않았다. 2014년도 즈음부터 도입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도 '잘 됐다'고 표현하기는 그렇다. 계속 허점이 있었다. 가령 설비는 인터락이 잠겼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안 잠기고 문이 열리는 식이다."
이씨는 2019년 12월 산재를 신청했고 2021년 9월 산재로 인정받았다.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회는 이씨가 혈액암 발생의 원인으로 알려진 전리방사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명확하고 저농도의 벤젠과 X-선에 노출됐으며 야간근무와 화학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점 등을 들어 산재로 인정했다.
다만 역학조사를 실시한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이씨가 혈액암의 직업적 유해요인인 벤젠과 X-선이 노출됐다 하더라도 노출 정도가 낮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산재가 아니라는 의견을 내놨다.
"산재 인정,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위안"
- 역학조사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노출기준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른데 개개인은 배제하고 여러 사람에게 적용하려다 보니까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제 입장에서는 산재 인정 과정에서 당사자 인터뷰가 필요한 것 같다. 당사자는 현장에서 '아 그게 문제였겠구나' 이런 느낌을 안다."
- 만약 노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산재를 인정 못 받았으면 어땠을 거 같나.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 같다. 산재가 아니라면 발병의 모든 책임이 제 개인한테 오는 거니까. 산재 인정을 받고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위안을 받았다."
-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저한테는 발병과 진단, 산재가 큰일이었다. 반올림이 정말 의지가 많이 됐다. 내 팀이 있구나, 동료가 있구나. 그게 너무 고마웠다. 저 이후로도 아픈 사람이 있다면 반올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 인터뷰 | 이하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