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2 20:25최종 업데이트 22.08.1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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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는 우리나라가 수교를 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현재 유엔 회원국 중 우리나라의 미수교국은 남·북한을 제외한 191개 유엔회원국 중 시리아와 쿠바뿐이다. 쿠바 여행이 가능하고, 쿠바와의 무역도 가능하지만 정식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한 상태다. 한때는 우리의 우방인 미국과 쿠바의 적대 관계가 미수교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오랜 갈등 관계를 잠시 접어둔 채 2014년에 수교를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쿠바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쿠바는 주쿠바 일본 대사관에서 주한 쿠바인들의 외교 업무를 대행해 주고, 한국은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이 쿠바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왜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쿠바가 수교를 강력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1988 서울올림픽, 2018 평창올림픽에도 쿠바는 불참하였다.
  

쿠바 아바나 시내 주차장에 그려진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가 악수하는 벽화. ⓒ 연합뉴스

 
그래서 쿠바는 우리에게 약간은 신비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고,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다. 쿠바가 동경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이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첫 번째 인물은 미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밍웨이다. 그가 오랫동안 체류하며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였다는 것이 주는 환상적 이미지가 남아 있다. 두 번째 인물은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다. 카스트로를 도와 쿠바의 독립을 성취시킨 로맨티스트 혁명가 체 게바라의 정취가 남아 있는 나라가 쿠바다.

쿠바를 신비한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커피다. 이 두 사람은 쿠바에 머무는 동안 쿠바 커피와 늘 함께했다. 두 사람 때문에 쿠바 커피가 유명해졌고, 커피 때문에 이 두 사람의 이미지에 커피향 같은 부드러움이 깃들게 되었다.

독특한 커피 문화

쿠바에 커피가 심어진 것은 1748년이었다. 호세 안토니오 게라버트가 산토도밍고, 즉, 현재의 도미니카에서 가져온 커피 씨앗을 아바나 근교에 뿌린 것이 쿠바 커피의 시작이었다. 초기에 그다지 융성하지 않던 커피 재배는 1791년에 전기를 맞는다. 생도맹그, 즉 현재의 아이티에서 발발한 노예혁명을 피해 도망온 프랑스인들과 아이티인들이 주인공이었다.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아이티는 자바와 함께 세계 커피 생산을 양분하고 있을 정도였다. 노예혁명이 벌어지자 커피 농장을 경영하던 대부분의 백인들과 이들을 돕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였다. 이들이 쿠바로 가져온 커피 재배 기술로 쿠바 커피 산업은 획기적인 성장을 이룬다. 1790년 1년 동안 1만 8500톤의 커피를 생산하여 스페인 등지로 수출하였다.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 및 수출 국가가 되었고, 쿠바인들은 커피를 즐기기 시작하였다.

세계 커피 생산 시장에서의 쿠바의 위력은 1830년대에 저물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종주국 스페인 경제의 몰락 그리고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커피 생산 경쟁국의 등장이 크게 작용하였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쿠바 남동부 지역의 커피 농장은 아주 독특한 문화적 경관을 창출하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 커피 농장 시설과 고고학적 경관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커피 관련 시설이나 경관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최초의 유산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19세기 커피 농장 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바로 쿠바이다. 현재 60개 이상이 잘 보존되고 있다.

커피와 관련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은 2011년에 콜럼비아 커피 문화 경관이 추가로 지정되어 단 두 개뿐이다. 커피나무 원산지 에티오피아나 커피 음료 기원지 예멘에도, 커피 생산의 공룡 브라질에도 없다. 쿠바는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의 커피 재배 문화를 보존하여 후대에 전해주고 있는 의미 있는 국가다.

비록 커피 생산에서 차지하는 세계적 영향력은 잃었지만 쿠바의 커피 농업은 꾸준하게 유지되어 왔다. 헤밍웨이가 체류하며 크리스탈마운틴 커피를 즐겼던 1939년에서 1953년 사이에도,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 전쟁을 이끌던 1956년부터 1959년까지도, 체 게바라가 혁명 성공 후 쿠바에 머물던 1962년까지도 쿠바 커피는 건재하였다. 당시 연 생산량이 44만 자루, 약 2만 6400톤의 커피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2년 미국에 의한 쿠바 봉쇄 이후 쿠바 커피는 세계 커피 시장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1965년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날 때 즈음 쿠바 커피는 세상에서 완전히 존재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런 상태는 카스트로가 권좌에서 물러난 2008년까지 40년 이상 이어졌다.

2008년 이후 쿠바 커피는 다시 세상과 마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적인 커피 유행과 함께 회생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미미한 것이 사실이다. 현재는 12만 5천 자루를 생산하여 연간 생산량에서 예멘이나 파나마를 앞서고 있지만 수출량이 많지는 않다. 국내 소비가 많기 때문이다. 쿠바 밖에서 쿠바 커피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커피 생산국으로서 쿠바가 지니는 위상은 이처럼 쿠바가 겪은 정치적 격랑에 따라 심하게 흔들려왔다. 그러나 커피 소비국으로서 쿠바가 간직해온 커피 문화는 강렬하고 지속적이다. 브라질과 함께 중남미 국가 중에서 독특한 커피 소비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쿠바다.

쿠바 커피를 기다리며

쿠바 커피 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다. 뜨겁고, 진하고, 적은 양의 에스프레소, 여기에 설탕을 넣어 빨리 마시는 방식이다. 앉아서 오래 마시기보다는 서서 빨리 마시는 방식이다.

19세기 유럽 대륙에서의 끊임없는 전쟁, 때마침 불붙은 중남미 커피 산업의 융성에 맞추어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중남미로 이주 행렬이 이어졌다. 중남미 이민을 가장 많이 선택한 나라는 이탈리아였고, 스페인과 독일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인들이 전파한 이탈리아식 커피 문화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곳이 바로 쿠바다. 60년 이상 미국의 영향이 차단된 유일한 중남미 국가였다는 것도 이탈리아식 커피 문화 보존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아무리 더워도 쿠바에서 아이스커피를 찾는다거나 좁은 카페에 오래 앉아 버티는 것은 분위기를 깨는 일이다.
  

쿠바는 사회주의 등장 이후 커피 배급을 실시하여 왔다. 한 달에 100그램 정도의 원두가 가정에 배급된다. 따라서 가정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발전하였다. ⓒ pixabay

 
쿠바 커피 문화의 또 다른 특징은 홈커피, 까사커피 문화다. 쿠바는 사회주의 등장 이후 커피 배급을 실시하여 왔다. 한 달에 100그램 정도의 원두가 가정에 배급된다. 따라서 가정에서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문화가 발전하였다. 질 좋은 커피가 아니라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이런 모습 역시 모카포트로 상징되는 이탈리아식 홈커피 문화를 닮았다.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쿠바 커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헤밍웨이가 즐겼다는 커피, 바로 크리스탈마운틴이다. 자마이카 블루마운틴과 같은 종의 커피이고 맛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커피의 생산량이 쿠바 커피 총생산량의 3%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쿠바에서조차 접하기가 쉽지 않다.

2012년부터 쿠바 커피의 국내 직수입이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쿠바 커피는 우리 가까이에 없다.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의 휴머니즘 향기를 느끼며 커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커피 애호가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쿠바 커피 산업의 부흥, 우리나라와 쿠바의 수교, 이 두 가지가 함께 기다려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The history of the cuban coffee. https://havana-live.com/tourism/cuban-coffee-history/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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