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23 13:34최종 업데이트 22.04.23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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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 픽사베이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 커피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매우 불안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불안한 기후 변화,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재해, 대형 자본의 커피 시장 점유율 확대 등으로 인해 커피 가격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진다. 최근 기후 악화로 인해 브라질과 베트남에서의 생산량의 감소, 이에 따른 커피생두 거래가격 상승에 이어 커피소비자 가격의 인상러시가 시작되었다.

원두 가격 상승에 맞추어서 커피 한 잔의 판매 가격을 올리면 그만이지만, 고객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아는 동네 카페일수록 그런 결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원두 가격 상승 부담을 스스로 안고 가려는 착한 주인이 운영하는 1인 카페가 적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이기에 안타까움이 크다. 힘들기는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오르는 커피 가격 앞에서 맘에 드는 커피를 골라 마시지 못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마시고 싶을 때 취향 따라 선택해서 마실 수 있었던 커피가 어느 날부터 그냥 주어진 대로 마시는 음료로 다가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커피가 세계인의 대중 음료가 된 18세기 이후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맞춤으로써 소비자도, 생산자도 행복했던 시절이 과연 있었을까?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많지 않았고, 그 시간이 길지도 않았다. 늘 커피는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 속에서 생산자가 고통을 받든 소비자가 불만을 갖든 하는 상품이었다. 불만보다는 고통이 더 아프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자연재해와 인간의 탐욕이 합해진 결과 커피 생산량은 늘 과잉이거나 과소였고, 커피 값은 늘 불안했다. 인류 역사상 커피의 생산과 소비 불균형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10여 년이다.

1920년대 '광란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유행하였던 것이 재즈 음악만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 시장도 뜨거웠다.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주식 시장에 투자해서 돈을 버는 쉬운 길을 택했고, 힘겨운 노동을 기피했다. 자본가들도 정상적으로 생산 시설에 투자하는 힘든 길보다는 주식으로 투기하는 쉬운 길을 택했다.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 주식에 투자하는데 남녀노소, 자본가와 노동자, 고학력자와 저학력자가 따로 없었다. 최근 코인열풍만큼 광적이었다.

검은 목요일

이런 광란의 시간이 하루아침에 끝났다. 바로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이었다. 모두가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르게 된 이날 잘 나가던 미국의 주식 값이 급락했다. 주가 붕괴가 월요일까지 이어졌고 회복 불능상태로 접어들었다. 계속 하락할 것이라는 소문으로 팔자는 주문이 늘고, 이는 다시 주식 가격을 하락시키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2개월 사이에 33%의 주식가치 하락을 가져왔고, 경제 전반에 불신 풍조가 확산됐다. 소비도 생산도 얼어붙었다. 일자리가 사라졌고, 이것이 소비 하락을 부추겼다. 은행도 신용을 잃었다. 미국의 건실한 은행 다수가 고객들의 현금인출 요구로 문을 닫았다. 은행이 얼어붙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다시 생산의 감소로 이어졌다. 생산 감소와 물가하락의 악순환이었다.

미국의 파산은 유럽 내 미국 자본의 회수를 초래했고, 이는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대공황에 끌어들였다.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프랑스가 순서대로 빠져들었다. 아시아의 일본도 대공황 영향권에 들어갔다. 대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길은 나라마다 달랐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전체주의 체제 강화와 해외팽창 정책을 선택함으로써 선한 이웃 나라들을 괴롭혔다.
 

대공황 시절인 1936년, 7세 된 딸과 함께 배급권을 기다리는 미국 여성의 모습. ⓒ 퍼블릭 도메인

 
대공황이 커피에 준 영향은 무엇보다도 컸다. 커피 최대 소비국이었던 미국의 불황은 브라질과의 커피 수입 계약 해지 사태를 불러왔다. 계약 해지로 커피 생두가 항구마다 쌓여갔고, 가격은 추락했다. 아무리 가격이 떨어져도 구매를 원하는 곳이 없었다. 대공황 직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점유하고 있던 브라질이었고, 브라질 재정의 70퍼센트 이상이 커피 판매 수익이었다. 한반도 전체 면적의 2.5배인 52만 7천㎢에 달하는 커피 농장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50만 개의 커피 농장, 수백만 명의 종사자들이 지옥문 앞에 섰다.

중앙정부에서는 커피 값을 유지시키기 위해 외국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빌려 커피원두를 수매하였고,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 커피나무 심기를 금지시키는 등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였다. '검은 목요일' 직후 커피 원두 거래 가격은 일시적으로 90% 이상까지 하락하였고, 이에 따라 브라질의 재정수입은 1929년 4억 4500만 달러였던 것이 1년 사이에 1억 8천만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커피 산업은 완전히 붕괴하였고,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금융 차관을 갚을 길은 안 보였다.

쿠데타... 불타는 커피 창고와 농장

결국 국민 불만을 등에 업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부가 선택한 바르가스(Gétúlio Vargas)가 임시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일명 '커피방어' 정책이라는 비상조치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희생 쿼터제'(Quota do sacrificio)였다. 정부가 농장별로 배당한 양에 따라 커피 생두가 수거되어 소각되었다. 1937년 한 해 동안에만 브라질은 무려 1720만 자루, 그러니까 1억 3200만 킬로그램의 커피를 불태웠다. 전 세계 1년 커피 소비량의 65퍼센트가 연기와 한숨 속에 사라졌다. 1931년부터 전쟁특수로 커피 소비가 살아나기 시작한 1944년까지 브라질 커피 생산량의 무려 40퍼센트가 이렇게 소각되어 사라졌다. 지구촌 전체의 5년 치 소비량이었다.
 

브라질 산토스 항구 도시 맹그로브에서 불에 타고 있는 커피 더미. ⓒ 상파울루 역사 지리 연구소

 
커피 소비를 확대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커피로 벽돌 모양의 연료를 만들어 철도용 연료로 사용하고, 커피를 이용해 기름, 가스, 와인, 나아가 플라스틱까지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지만 커피 소비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거나 커피 가격을 안정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커피 역사책을 집필하기 위해 브라질을 방문하였던 독일 작가 에두아르드 야콥은 불타는 커피 창고와 농장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책 마지막 수십 페이지는 불태워지는 커피를 보며 현장에서 느낀 인간의 무지와 편견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채워져 있다. 브라질의 한 축구클럽이 세계적 수준의 자기 선수를 이탈리아 선수와 트레이드하면서 계약서에 브라질산 커피를 일정량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명시하기도 하였다. 이런 기사가 식민지 조선의 신문에 해외토픽으로 실릴 정도였다.

지각 변동

커피산업의 붕괴는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는 구실이 되었다. 일자리를 잃은 배고픈 노동자들에게 두려움은 일시적이었다.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들과 이를 이용한 정치가들이 만났을 때 불만과 불안은 부추겨졌고 결과는 폭력과 학살, 그리고 보복의 반복이었다.

커피산업이 국가 경제의 중심이던 엘살바도르에서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커피 1~2파운드 가격인 12센트에 불과하였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공산주의가 매력적인 이념으로 다가온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932년 엘살바도르 대학살의 배경도 커피산업 붕괴였고, 이후 보복의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웃한 과테말라,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벌어졌다. 커피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반면, 자작농이 부족한 사회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반면에, 커피 자작농의 비중이 높고, 이들이 참여하는 커피생산자협회의 역할이 컸던 코스타리카와 콜롬비아의 커피산업은 상대적으로 혼란을 적게 겪으면서 대공황의 공포 속에 성장하였다. 콜롬비아의 미국 커피시장 점유율이 1937년에 이르러 25퍼센트를 돌파하였고, 아프리카의 케냐가 아라비카 종 커피 생산을 확대함으로써 아프리카 커피가 200년 만에 다시 세계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35년에는 히틀러와 동맹 관계를 형성한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여 1941년까지 전쟁을 벌였다. 그 배경의 하나가 커피 생산국에 대한 욕심이었다.
 

콜롬비아 커피 ⓒ pixabay

 
1930년대 대공황 직후 미국에서의 커피 유통 질서와 소비 패턴의 변화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였다. 제품의 질보다는 과대광고와 가격인하 경쟁이 중요했고, 모든 경제 주체들의 공정한 경쟁보다는 기업 합병 등을 통한 경제 권력화가 지향되었다. 대공황을 겪으면서 미국 커피산업계에는 에이앤피, 맥스웰하우스, 그리고 체이스앤샌본이라는 세 개의 거대 공룡만 살아남았다. 이 세 개의 기업이 차지하는 시장이 40퍼센트였고, 나머지 60퍼센트의 시장을 놓고 5000개 이상의 소규모 브랜드들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급격한 커피 가격의 변동, 그것은 상승이든 하락이든 준비되지 않은 약자에게는 고통의 징후이고 여유 있는 강자에게는 기회의 징후라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약자들의 고통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꿀 용기가 폭발한다는 것 또한 커피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leegs@aks.ac.kr)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 푸른역사.
《매일신보》 1939년 6월 6일 자.
《동아일보》 1939년 6월 7일 자.
Heinrich Eduard Jacob(1934), ‘Kaffee: Die Biographie eines Weltwirtschaftlichen Stoffes’, 남덕현 옮김, 《커피의 역사》, 자연과생태, 2013.
Marcelo Pereira(2020), Why was the world’s coffee destroyed? The Coffee Blog, April 4, 2020. 2022. 4. 19. 23:59 검색. https://thecoffee.blog/all/history-all/worlds-coffee-destroy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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