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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이번에 내용을 좀 바꿨다."

몇 달 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는 '화가 단단히 난 상태'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지방에서 살다가 경기도로 이사 온 남동생 부부가 친정 식구들을 불러 집들이를 한다길래, 2박 3일 일정으로 다녀가신 직후의 통화였다. 다른 일정과 겹쳐 우리 식구는 동생네 집들이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엄마의 어투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엄마가 바꾸셨다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건 바로 '유언장'이었다(재벌들의 그런 유언장을 생각하면 안 된다). 엄마는 지방에서 먼길 찾아 방문한 막내 동생네 집에서 기대한 만큼의 대우를 못 받았다고 생각하셨는지 단단히 심기가 상한 눈치였다.

나하고도 8살이나 차이 나는 막내인 데다 남동생이라 엄마를 대하는 말투와 태도가 딸들의 그것과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평소 엄마에 대한 막내의 애정과 걱정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 엄마는 가끔 동생의 직설적인 말투나 행동에 마음이 상하신가 보다.

"아들, 아들" 하는 분은 아니셨지만 나이가 드시니 엄마도 아들에 기대는 마음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하지만, 내리사랑의 끝, 막내에 대한 엄마의 속정은 깊을 수밖에. 일찌감치 홀로 되어 세 남매를 남 부끄러울 것 없이 키워낸 여장부 엄마도 70대 중반을 바라보시니 마음이 부쩍 여려지신 듯하다.

생각날 때마다 써두었다는, 엄마의 유언장
 
엄마는 본인이 나이도 들고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생각날 때 떠오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기록해 놓으신 거라고 하셨다.
 엄마는 본인이 나이도 들고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생각날 때 떠오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기록해 놓으신 거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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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언장'에 대해 안 것은 4~5년 전쯤이었다.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엄마는 '너만 알고 있으라'며 유언장에 대해 말씀하셨다. 엄마는 본인이 나이도 들고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그저 생각날 때 떠오르는 것들을 이것저것 기록해 놓으신 거라고 하셨다.

처음엔 엄마가 말씀하시는 '유언장'이라는 말이,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듣기 싫었다. 엄마가 자꾸 내용을 언급하려 하시길래,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며 자꾸 제지시킨 건 나였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래도 너라도 알고 있어야 무슨 일 생기면 처리를 할 게 아니것냐" 하셨다. 

그래도 자식인 내게 '유언장'은 엄마의 '죽음'과 연관 있는 말이니 어찌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엄마도 처음 '유언장'이라는 말을 언급하실 땐 만감이 교차하셨는지 잠시 호흡을 멈추고 목소리가 떨리셨다.

한 살 터울진 여동생과 나는 결혼 전 한 가지 약속한 것이 있었다. 우리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긴다면, 결혼 1년 전까지 적금한 돈을 엄마께 드리고 1년 동안 새로 모아 각자의 결혼 자금으로 쓰자던 약속이었다.

그것이 홀로 세 남매를 어렵게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엄마 곁을 떠나게 될 때 딸로서 할 수 있는 작은 보답이라 여겼었다. 다행히 다른 변수 없이 여동생과 나는 약속을 이행할 수 있었고, 엄마는 그 돈으로 아파트 잔금을 치러 엄마 명의의 집을 갖게 되셨다. 

"니들이 좀 서운할지는 모르겠다만, 니들은 먼저 수도권에 터를 잡고 산 지 오래니 막내한테 좀 더 줄란다."

이런 말을 하시는 걸 보면, 엄마는 아파트에 적금을 부었던 딸들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셨다. "엄마 이름으로 된 엄마 것이니, 엄마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말씀을 여러 번 드렸는데도 말이다. 엄마는 내가 잊을 만하면 이 유언장을 언급하신다. 동생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실 때마다 유언장 내용을 변경했다고 전하신다. 

송씨 일가의 효도 분량 포인트제

이런 엄마를 보니 얼마 전에 읽은 <엄마는 죽을 때 무슨 색 옷을 입고 싶어?>(신소린 저)란 책이 생각났다. 특히 1장에 쓰인 '송씨 일가 효도 분량 포인트제'라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효도 분량 포인트제'는 치매에 걸리신 90대 노모에 대한 7남매의 간병 시간을 포인트로 쌓아 효도의 양으로 측정하고, 추후 유산 분할의 증빙 자료로 사용할 예정이라는 송씨 일가의 이야기이다.

치매에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맡기는 것은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형제간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덕분에 저자의 할머니는 사시는 날까지 7남매의 효도를 원 없이 받으실 예정이시다.

송씨 일가의 효도 분량 포인트제는 생각할수록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부모는 점점 노쇠해 갈 것이고 언젠가는 자식 곁을 떠나게 된다. 부모가 떠난 뒤 못다 한 불효를 원통해 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얘기는 숱하게 듣지만, 내 삶을 살다 보면 부모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송씨 일가의 포인트제는 '효도'라는 실체 없이 막연한 것을 수치화함으로써 객관화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이를 근거로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예정이라는 송씨 일가의 결정이 내게는 부모를 봉양하는 합리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다.

숙환이나 치매 등 부모님의 앞날에 생길 걱정을 가족이 함께 공동 분담해 감당하려는 태도. 형제간의 애정과 신뢰에 기반한 송씨 일가의 결정과 실행력이 내심 부럽다.

송씨 일가의 방법엔 비할 바 아니지만, 내 형제지간도 홀로 지내시는 엄마에 대한 효의 실천을 수치화한 것이 하나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주말 당번 전화제'다.

주말 당번 전화제
 
엄마의 안위를 가까이에서 돌볼 가족이 없어 주말 전화 당번을 정했다. 엄마가 외롭지 않도록.
 엄마의 안위를 가까이에서 돌볼 가족이 없어 주말 전화 당번을 정했다. 엄마가 외롭지 않도록.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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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막내 동생마저 직장 문제로 경기도로 올라오게 되면서 지방에 계시는 친정 엄마의 안위를 가까이에서 돌볼 가족이 없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주말에라도 요일을 정해 의무적으로 엄마께 전화를 드리기로 정한 것이다. 

일과 가족을 건사하느라 바쁜 주중엔 친정 가족 간의 '가(家)톡방'을 이용하고 주말엔 직접 육성으로 돌아가며 엄마를 살피기로 한 것이다. 내가 금요일, 여동생이 토, 막내가 일요일. 이렇게라도 정해 두니, 세 형제의 통화가 주말 한날에 몰리거나 소식 하나 없이 지나가는 주말 요일이 사라지게 되었다.

예전엔 첫째인 내가 좀 더 살펴야겠다고만 생각했지, 엄마 입장에서 생각하지는 못했다. 주말 당번 전화제는 모든 자식들이 엄마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가 되어준다. 주말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육성으로 번갈아가며 자식들의 근황과 안부를 듣는 엄마가 전보다 더 만족하실 것은 당연지사다.

친정 엄마가 자꾸 유언장을 고치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엄마는 자식들의 들쭉날쭉한 효에 대해 그렇게라도 하소연을 하며 마음을 풀고 계신 것일지도 모른다. 몸이 쇠약해지는 만큼 부쩍 마음도 여려지신 엄마는 전보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쉽게 상처받으시고 후유증도 오래간다. 그렇게 타인과의 관계망이 점점 좁아지는 엄마에게 유일한 위로와 안식은 자식들뿐일 것이다.

다행이라면, 나는 오래전 사춘기 때 '지랄총량(사람이 살면서 평생 해야 할 '지랄'의 총량)'을 다 써서인지 엄마의 잔소리를 싫은 내색 없이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귀가 조금은 생겼다는 거다. 언젠가 50이 된 나를 포함해 매일 자식들 걱정이 앞서는 엄마의 잔소리도 사무치게 그리워질 날이 오겠지.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엄마의 잔소리를 귀에 꼭꼭 담아 두어야겠다.

최근에는 유언장을 수정했다는 말씀이 없으신 걸 보면 동생들이 엄마를 좀 더 챙기고 있나 보다. 내일은 나도 엄마께 한 번 더 전화를 드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 함께 게시될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유언장, #부모, #효, #효도분량포인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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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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