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인생 드라마'로 뽑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 최근에 방송을 시작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박해영 작가가 썼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마음에 냉큼 TV를 켰다.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가는 모습과 방식이 참으로 따뜻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 가운데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주인공 지안(이지은 분)과 동훈(이선균 분)이 출퇴근할 때마다 이용했던 지하철의 풍경이었다. 이 장면을 바라보노라면 아무 말 없이 공허한 눈빛들만 가득했던 지하철은 사람이 아닌 외로움을 실어 나르는 듯 장소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작에서 묘사되던 정서가 <나의 해방일지>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해방되고 싶은 자와 해방되고 싶지 않은 자

수도권에서 매일 출퇴근하는 것이 힘든 기정(이엘 분)과 창희(이민기 분), 미정(김지원 분)은 다 큰 성인이지만 독립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다. 삼남매의 아버지 제호(천호진 분)는 무뚝뚝하지만 성실한 가장이다. 부엌 싱크대를 만드는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농사도 짓고 있다. 삼남매의 부모는 살갑거나 다정하지는 않지만 매일 술을 마시며 헛헛하게 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구씨에게 일을 주고 매 끼니를 챙겨주는 정이 많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부모님을 가장 살뜰하게 돕는 가족은 막내딸 미정이다.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에게 사회생활은 때때로 가혹할 때가 있다.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 지안처럼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 역시 사회생활이 어렵기만 하다. 그녀에게 관계는 즐겁게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이자 노동처럼 여겨진다. 수많은 말들의 홍수 속에서 말을 아끼는 미정의 과묵함이 버거운 동료들은 은근하게 그녀를 따돌리고, 보증을 서준 남자 친구는 말도 없이 사라져 배신감도 빚도 혼자서 감당해야 할 처지에 처했다. 미정은 그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갑갑하기만 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기정은 사랑이 고프다. 관계가 노동처럼 느껴져 버거운 미정과 달리 그녀는 외로움이 버겁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싶고, 능히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만 그녀에게 인연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여자 친구를 둔 수도권에 사는 남자 창희는 물리적인 거리 때문에 비롯되었던 사소한 불만들이 쌓여 결국 헤어진다. 창희는 자신의 표현대로 '계란 노른자'같은 서울을 둘러싼 '계란 흰자'에 사는 자신이 답답하다. 자동차라도 있었더라면 여자 친구와 오붓하게 데이트를 하고 출퇴근도 훨씬 쉬우련만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자동차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삼남매보다 더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있다. 기정과 창희, 미정은 자신을 막아서는 장애물을 답답하게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이웃으로 살고 있는 구씨(손석구 분)는 타인과의 관계를 차단한 채 술에 절어 살고 있다.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삼 남매와 해방되고 싶지 않은 구씨 사이에는 무관심과 호기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갈등이 있다. <나의 아저씨>에서 실로 아름다운 휴머니즘을 보여주었던 박해영 작가이기에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 남매는 스스로를 어떻게 해방시킬지, 구씨와 삼남매는 과연 어떤 관계를 엮어 나갈지 사뭇 기대된다. 
 
 <나의 해방일지> 스틸. 착하고 성실하지만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미정에게 사회생활은 어려운 숙제 같다

<나의 해방일지> 스틸. 착하고 성실하지만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미정에게 사회생활은 어려운 숙제 같다 ⓒ JTBC

 
행복도, 강요하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미정이 다니는 회사는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행복지원센터'를 운영하고 모든 직원들이 동호회에 가입하기를 끊임없이 종용한다. 모두가 동호회에 들어야 한다는 '행복지원센터'의 원칙 때문일까, 이런 회사의 정책이 과연 진정으로 직원들의 행복을 염려하는 것인지 조금 의문이 든다. 공통된 취미로 회사 동료 간의 유대감을 키우고 즐거운 회사 생활을 유도하는 모습에서 행복조차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회사의 태도 때문에 동호회에 들지 않은 미정과 태훈(이기우 분)은 이런 권고가 불편하다.

아무리 좋은 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하는 것은 '강요'가 되고, 지속적인 강요는 곧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내성적인 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행복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음을 드라마는 미정을 통해 넌지시 풍자한다.

한편, 절망에 빠진 사람은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을 알아보기에 미정은 자꾸만 구씨가 눈에 밟힌다. 힘들어서 도저히 스스로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어느 날, 미정은 구씨에게 다가가 '나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라고, 하릴없이 술만 마시려면 차라리 '자신을 추앙하라'라고, 자신을 채워주라고 화풀이한다. 그 누구에게도 쉽게 속내를 보이지 않던 미정이 구씨에게 말도 안 되는 화풀이를 하는 이유가 있다. 구씨는 다름 아닌 거울에 비친 미정의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을 계속 품고 있으면 언제가는 구씨처럼 은둔하며 세상을 등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그런 미정에게 구씨는 이렇게 되묻는다. "너는? 누구 채워준 적 있어?" 구씨의 말은 미정에게 해방에 대한 단서가 된다. 미정은 누군가에게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채워주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구씨에게는 '내가 추앙해줘요?'라고 말하고, 동호회에 들지 않던 태훈과 박부장에게 동호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지은 동호회의 이름은 '해방' 클럽. 
 
 <나의 해방일지> 스틸. '나는 한 번도 누가 채워준 적이 없어', '그러는 넌, 누구 채워준 적 있어?'

<나의 해방일지> 스틸. '나는 한 번도 누가 채워준 적이 없어', '그러는 넌, 누구 채워준 적 있어?' ⓒ JTBC

     
구스타프 쿠르베의 사실주의 화풍이 연상되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있노라면 사실주의 화풍의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가 떠오른다. 드라마에도 그림처럼 화풍 같은 것이 있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인상주의'도, '야수파'도, '라파엘 전파'도 아닌 것은 확실하다. 천사를 그려 달라는 주문에 천사를 본 적이 없어 그릴 수 없다고 거절한 쿠르베는 아름답게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대로 그림으로 담았다. 진실은 정확한 사실이 담보될 때 비로소 드러낼 수 있다. 

가난한 주인공인데 예쁜 쿠션과 세련된 소파, 값비싼 소품들로 장식된 여타 드라마의 주거 공간은 늘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의 주요 배경인 삼남매의 집은 과장됨 없이 실제로 살아가는 소시민의 집을 그대로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검소한 미정의 수수한 얼굴과 패션, 한여름 고된 노동의 갈증을 달래 주는 믹스커피가 담긴 2리터짜리 생수병, 목재를 자르거나 재단할 때 구씨의 얼굴로 튀던 톳밥 등에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제작팀의 의지가 강하게 엿보인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화풍으로 치자면 '사실주의'에 가깝다. 

주인공 미정은 과묵한 사람이다. 생각이 많기에 그 많은 생각 중에서 어떤 생각을 골라 말로 쏟아야 할지 잘 몰라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도 여백이 많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는 방식과 달리 <나의 해방일지>는 사건과 갈등 사이에 충분히 여백을 할애한다. 혹자는 이런 연출이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여백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공허하고도 외로운 정서가 잘 드러난다. 대사와 대사 사이에 남겨진 침묵 속에서 시청자는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 놓인 콘텍스트를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기 때문에 지루함보다 고요함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힐링이 된다. 적막이 흐르는 고요한 산사에 가끔 부는 바람에 울리는 풍경, 이 드라마가 꼭 풍경 소리를 닮았다.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은 현재 뜨거운 여름이다. 작가는 왜 여름으로 설정했을까. 삼 남매는 무더위 속에서 힘겹게 출근하고 퇴근한다. 창희는 열대야에 괴로워하다가 엄마에게 제발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기도 한다. 극 중의 여름은 인물들을 괴롭히는 장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면서 미정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 쨍하고 햇볕 난 것처럼, 구겨진 것 하나 없이." 축축한 걸레를 말리려면 뜨거운 햇볕 아래에 널어야 하듯 인물들의 물기 가득한 불행을 바짝 말리고 싶기에 지금 주인공들은 작렬하는 한 여름의 열기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아닐까. 뜨거운 햇볕은 다름 아닌 생에 대한 강렬한 열정이라고, 불행을 휘발시키는 에너지는 스스로를 불태울 때 발생한다는 작가의 숨은 의도는 아닐런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박해영 작가 나의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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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고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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