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 필름다빈

 
1_박루슬란 감독의 영화와 10년 만에 재회하다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나안>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다른 특별한 정보 없이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영화공부를 하러온 고려인 4세 감독의 작품이라는 호기심에 선택한 작품이다. 제목인 '하나안'의 뜻을 처음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원을 따져보면 바로 '가나안', 젖과 꿀이 흐른다던 구약성경의 그곳을 칭하는 뜻이었다. 하지만 성경에서 모세가 출애굽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40년 동안 황야를 방랑한 끝에 도착한 실제 가나안은 다들 알다시피 메마른 사막에 가까운 척박한 땅이었다. 대충 영화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제목인 셈이다.
 
영화 <하나안>은 감독의 고국인 우즈베키스탄을 배경으로 한다. 어릴 적 와일드 라이프를 보내던 주인공은 불우한 환경을 딛고 경찰이 되지만 부패와 마약이 판치는 현실에 좌절을 거듭하던 중에 그 자신도 마약중독자가 된다. 오랜 방황 끝에 갱생하려 결심한 주인공은 새 출발을 위해 한국을 찾게 된다. 하지만 선조들의 땅이자 부유한 나라가 된 21세기의 가나안, 한국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꿈꿨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영화를 만든 솜씨는 조금 투박했지만 스크린을 통해 전해져오는 황량한 분위기가 오래 기억에 스며드는 그런 영화였다. 작품의 배경이 된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의 흙먼지가 내내 눈을 괴롭히고 입 속에서 가는 모래가 씹히는 느낌이라 할까? 그래서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매년 수십 편의 영화를 봤지만 <하나안>은 특별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았다.
 
영화는 1년 후 독립장편영화로선 드물게 개봉기회도 얻었다. 그리고 다른 다수 독립영화 개봉작들처럼 극소수의 관객만을 만난 채 이내 잊혀졌다. 꽤 인상에 남았던 영화다 보니 가끔 그 감독은 뭐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그런데 그 감독이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신작을 들고와 경쟁부문인 뉴 커런츠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그 차기작,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2022년 4월 하순, 극장개봉을 앞두고 있다.
 
2_범죄 스릴러에서 사회파 영화로 변환되는 구성
 
작품 속 배경은 1979년 소련 시절의 카자흐스탄이다. 젊은 청년 '셰르'가 주인공이다. 그는 이제 막 경찰서로 발령받아 베테랑 스네기레프 경위 팀에 인턴으로 합류한다. 스네기레프 경위는 명성이 높고 직무에 충실한 유능한 형사고 팀 동료들도 궁합이 척척 맞는 정예요원들이다. 그런데 하필 셰르가 업무를 개시하자 지역에선 잔혹한 연쇄살인이 터진다. 신참 셰르까지 이 흉악 살인마 체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영화는 크게 3막으로 구분된다. 1막은 "쫓아라!" 편이다. 초반부는 전형적인 범죄 스릴러 구조로 진행된다. 거듭되는 참혹한 살인은 작품 내용상 빠질 수 없지만 그 묘사는 여름 팝콘무비의 일각을 이루는 슬래셔 영화의 고어 표현과는 사뭇 다르다. 긴장을 높이고 상황의 심각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절제해서 들어갈 때만 들어가고 그조차 건조하게 묘사된다. 최소한 등장하는 피해자 장면은 선정성보다는 범인의 기괴함과 사회질서를 초월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효과로 활용된다.
 
딱 영화 중간쯤에 돌출하는 2막은 "봐!"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영화가 절반쯤 지났는데 범인이 벌써 붙잡혀 버렸다. 그런데 조사 결과 살인마는 심지어 식인까지 저질렀음이 밝혀진다. 영화 중반에 범인이 잡혀버리면 이제 남은 시간은 어떡하나 싶은 관객의 우려와 기대 속에서 이야기는 전형적인 범죄 물에서 사회파 영화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영화의 시점인 1979년이라는 해에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현대사를 복기해야 할 시간이다. 그 다음해인 1980년엔 모스크바 올림픽이 예정되어 있었다. 소련으로선 처음 개최하는 올림픽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국 국위선양의 과시 목적으로 변질된 지 오래인 이 세계 최대 국제스포츠행사에 당시 소련은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징벌을 내린다는 명목으로 냉전 중이던 미국 등 서방진영은 올림픽 보이콧을 외치던 때다. 하필 이 시국에 식인 살인마가 웬 말인가. 높으신 분들은 사건을 은폐하고 범인을 감옥 대신 정신병원에 수용하는 것으로 진상을 덮길 원한다.
 
그런 내외 배경에서 진행되는 3막은 "잊어라!"를 부제로 한다. 형사물 전개에서 사회적 배경이 결합되면서 복잡해지고 중첩된 이야기 밀도에 추가적으로 주인공 셰르가 가진 개인적 사연이 얼버무려진다. 영화는 그렇게 대미를 향해 달려간다. 
 
3_현실사회주의의 붕괴과정을 암시하는 '미장센'의 보고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 필름다빈

 

흉악범을 추적하는 형사들이 주인공인 범죄물 장르영화로만 접근하면 본 작품은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색다른 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주 무섭거나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까지는 아닌 딱 적당한 '킬링 타임' 용 영화 말이다. 

하지만 박루슬란 감독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전해지는 인장과도 같은 특성을 이해한다면 작품에 대한 감상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만이 담아내 선보이는 붕괴와 폐허의 정서는 여전히 살아 있고 색깔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전작 <하나안>보다 더 효과적으로 역사적 배경을 활용했다. 이 지점은 본 작품의 장르적 접근과 훌륭한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효과적 장치 활용을 통해 시대상을 은유하는 몇 개의 성공적 장면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셰르가 부임한 경찰서 사무실에 걸린 사진과 후반에 장관 집무실에 걸린 사진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속 주요 사건과 얽힌 시대상황을 한달음에 요약할 수 있게 된다. 

세르기에프 경위를 셰르가 처음 신고 차 방문했을 때 경위는 반드시 노크하고 들어올 것을 강조한다. 그의 엄격한 외모와 연결되는 머리 위의 사진이 하나 있는데, 사진 속 인물이 누구인지를 알고 모르는 것에 따라 캐릭터를 해석하는 데 상당한 차이가 발생한다. 바로 '체카', 'NKVD', 그리고 'KGB'의 시조가 된 제르진스키다. 제르진스키는 레닌의 동료 혁명가로 10월 혁명 이후 기나긴 반혁명 세력과의 내전 당시 조직 사수를 위해 그림자 전쟁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그 과정에서 제르진스키는 엄청난 권한을 한 손에 쥐고 있었고 무자비한 암살과 숙청을 숱하게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러시아 제국 시절 비밀경찰에게 쫓겨 도망을 다니며 배운 경험을 십분 발휘해 반대자들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악명 높은 소련의 첩보전 기반은 그에게서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이 비밀경찰의 수장은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것을 넘어 청렴결백의 표상이었다. 오직 자신의 직무에만 헌신했을 뿐 레닌 사후 일어난 소련 내 권력투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국내외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중책에다 수십만이 넘는 내무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권력을 탐했다면 스탈린과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간에 벌어진 삼파전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 편에 선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어떤 야심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소련 수호에만 골몰하다 과로로 건강을 해쳐 이른 나이에 죽었다. 그런 제르진스키의 모습은 업무에 헌신하는 세르기에프 경위와 닮은꼴이다. 이 사진액자를 통해 세르기에프 경위는 소련 체제의 냉혹하지만 효율적인 측면,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라는 대의명분을 상징하는 현신으로 거듭난다.
 
반면에 경위와 그의 팀이 좌천된 후 그의 복직을 청원하러 경위의 상급자들이 찾아간 '높으신 분'의 사무실은 경위의 사무실과 대조를 이룬다. 장관의 집무실 벽에는 두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한쪽에는 제르진스키의 사진, 다른 한쪽에는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최고 권력자 브레즈네프의 사진이 보인다. 브레즈네프는 스탈린 사후 약간의 자유주의 개혁과 동서 데탕트를 이끌던 흐르시초프 서기장을 쿠데타로 내몰고 집권한 관료 세력의 우두머리다. 소련의 테크노크라트 특권계층, '노멘클라투라'로 불리던 고령 관료집단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가 위압하듯 청원자들을 응시한다. 장관은 두 명의 청원자에게 직위 순서에 따라 발언할 것을 종용한다. 완벽하게 사무실 사진 속 인물들이 영화의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당대 소련 사회가 '현실사회주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들도 제법 등장한다. 어쨌거나 브레즈네프 시절엔 관료주의 폐단과 비밀경찰, 검열이 당연히 존재했지만 그 통제 정도가 북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강제로라도 직장이 모두에게 주어졌고 일자리를 거부하면 구금당하는 시대였다. 범죄 용의자라도 수색영장에 따라 모든 조사와 집행이 이뤄졌다. 8시간 노동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바람에 늘 야근하는 셰르에게 불만을 터뜨리는 누나 '지나'의 푸념과 짜증은 그런 이해를 갖고 보면 더 흥미로운 순간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용의자 수색과정에서 종종 부각되는 액자나 책자들이 은유한 코드들이 소소한 장치로 활용된다. 분명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단언한 사회주의 국가인데도 적지 않은 인민들이 근본주의 기독교 종파에 귀의하거나 오컬트 철학에 탐닉하고 있다. 소련이 서방에 내세우던 인민의 낙원이자 노동자가 주인 된 세상이 실제로는 그들이 내세우던 만큼 이상적으로 구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암시 격이다.

분명히 무상의료·무상교육 그리고 서방보다는 못해도 라디오나 텔레비전, 냉장고 같은 물질문명은 있지만 통제되고 정체된 사회의 한계가 알게 모르게 노출되는 셈이다. 그리고 소비에트 스타일의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표현된 선전 포스터들은 영화의 흐름 전개와 은근슬쩍 결합되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툭툭 던지고 회수하곤 한다. 그런 세심한 요소가 이 영화가 뿜어내는 재현된 당대 사회 풍경에 색깔을 더한다. 그런 숨은 그림 찾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4_1979-2022, 감독의 시선으로 해석한 구소련 풍경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영화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틸이미지 ⓒ 필름다빈

 
작품이 결정적으로 범죄 장르에서 사회파 영화로 변환되는 계기는 소련 상층부의 모스크바 올림픽 개최라는 국책사업 때문이다. 실제 역사 배경을 알고 모르고가 하늘과 땅 차이의 온도차를 조성하는 대목이다. 물론 단순히 흉악 범죄가 외신을 타는 것만 해도 소위 '나라망신', 특히 체제 경쟁을 벌이던 미국과 서방 세계에 흠이 잡힐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엔 좀 더 깊은 배경이 숨어 있다.
 
당시 소련은 자신들이 이념적으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서구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공식 입장을 거두지 않던 시절이다. 실제 그 당시 소련의 경제규모는 무기 등 중공업에 집중되긴 했지만 미국의 절반 규모에 이르렀다. 현재 중국이 G2로 가지는 위상보다 더 컸던 셈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의 우월성이 물적 기반으로 구현된다는 주장을 피력했기 때문에 셰르와 세르기에프 경위의 팀이 활약할수록 더 문제가 되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당시 소련은 성적 일탈과 연쇄 살인 같은 흉악 범죄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들로 규정하고 있었다. 남녀는 평등하고 계급은 철폐되었으며 노동자나 소수민족은 차별받지 않는다는 게 소련의 '공식' 태도였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극대화시키기에 각종 범죄가 창궐하는 것이니 소련에선 연쇄 살인마가 출현해선 안 될 것이었다. 체제의 헛된 자존심이 발현되는 순간이 도래한다. 하지만 실제 소련은 그렇게 이상적인 사회가 못 되었고, 세계 범죄사를 조금만 찾아봐도 알 수 있듯이 구소련 국가들에서 연쇄 살인은 이후로 숱하게 보고되고 있다.
 
그래서 본 작품을 감상할 때, 소련의 이념과 체제, 당시 사회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면 영화는 몇 배로 증폭된 체험으로 다가올 테다.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순환이 개인과 감독의 작업을 통해 구현되는 '간계' 같은 상황이라면 너무 거창한 걸까?
 
감독의 유년시절 기억이 살을 붙여가며 영화로 재탄생한 본 작업은 꽤나 흥미로운 결과물로 완결되었다. 박루슬란 감독은 고려인 4세 자격으로 최근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그런 감독에게 중앙아시아 고려인 소재 영화를 자꾸 기대하는 건 작가의 창작세계를 속박할 위험 때문에 함부로 요구하면 안 될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이 전해줄 수 있는 중앙아시아 구소련 영역의 역사와 현실은 좀 더 작품으로 접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감독의 라이프 워크라는 홍범도 장군 일대기가 언젠가 완성된다면, 아마 우리가 기대하는 영웅담과는 퍽 다른 풍경이지 않을까.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박루슬란 감독의 홍범도 장군 영화가.
 
<작품정보>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Three, Три
2020|카자흐스탄, 한국, 우즈베키스탄|드라마/범죄/스릴러
2022.04.21. 개봉|101분|15세 관람가
감독 박루슬란
출연 아스카르 일리아소브(셰르 역), 이고르 사보치킨(스네기레프 역),
사말 예슬라모바(디나 역)
제작 아슬란 필름
배급 필름다빈
 
2020 25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경쟁) 부문, 뉴 커런츠상
2021 13회 키노쇼크(러시아) 베스트 프로덕션 어워드 수상
2021 43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러시아의 발자취 부문 & NETPAC 부문 초청
2021 23회 타이베이 영화제, 초청
2021 9회 무주산골영화제, 판 부문 초청
2021 13회 시카고아시안팝업, 초청
2021 15회 모텔렉스, 초청(포르투갈)
쓰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안 박루슬란 감독 카자흐스탄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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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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