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31 06:10최종 업데이트 22.03.31 06:10
  • 본문듣기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구를 하고 있다. ⓒ 한국프로야구 연감에서

 
해태 타이거즈 출신의 한 야구인이 '내 친구들 중에도 1980년 5월에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이 있지만, 야구인으로서는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전두환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비단 그가 아니라도 야구인들 중에 '역대 대통령, 혹은 정치인 중 가장 존경하는 이'로 전두환을 꼽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야구팬들 사이에서도 이유와 맥락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프로야구의 창설과 야구문화의 발전은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업적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1년 12월 11일에 창설된 한국야구위원회(KBO)가 1982년 3월 27일 출범식과 개막경기를 열면서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청와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은 분명하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창설 기획안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청와대 사회문화수석비서관실의 지원을 통해 추진되었으며 초대 총재 역시 대통령의 낙점을 통해 선임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프로야구를 전두환이 만들었다'는 인식은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사실로부터 나아가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한국에서 프로야구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이라거나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프로야구 창설을 상당 기간 앞당겼다'고까지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야구 창설의 조건은 무르익어 있었으며, 실제로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한 것은 청와대였지만 그것을 이끌어간 동력은 다양했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 선임 대통령 결재 한국야구위원회의 초대 총재 서종철은 전두환 대통령의 낙점을 받아 선임되었다. ⓒ 홍순일 원로기자

  
경기 없는 날엔 석탄 캐던 축구선수들

종목을 막론하고, 한국에서 '운동으로 밥을 먹는' 혹은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1960년대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은 '선수와 지도자를 보호 육성하는 것'을 정부와 지방자체단체의 역할로 규정하고 시행령을 통해 '상시 100인 이상 종업원을 가진 국가나 공공단체, 기관, 기업체, 단체는 직장체육진흥관리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정했다. 그리고 군사정변 직후 국유화된 시중은행들을 중심으로 자금력을 가진 공공기관들이 정부의 시책에 따라 실업스포츠팀을 대거 창단했다.


1961년에 2개에 불과했던 실업야구팀은 1963년에는 14개로 불어났고, 1950년대 내내 1개와 2개 사이를 오가던 실업축구팀의 수도 1962년에 7개를 거쳐 1969년에는 20개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역시 2개 안팎을 오가던 남녀 농구와 배구 실업팀의 수도 1960년대 중반에는 리그의 운영이 가능한 6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물론 직업적 선수라고는 해도 오늘날의 프로선수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일종의 '체육특기자' 자격으로 은행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취업한 실업선수들은 정해진 월급 외에는 각종 대회 우승 수당을 비롯한 약간의 상여금이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기가 없는 기간에는 일반 업무에 투입됐는데, 은행 팀의 선수들은 창구 업무를 지원하거나 예금 유치 활동을 벌이는 정도에 그쳤지만 석탄공사 팀 축구 선수들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야 하기도 했다. 경기실적이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실업 선수들은 가능한 빨리 일반직으로 전환해 경력을 쌓는 쪽을 선호했고, 따라서 은퇴 연령은 대부분 20대 중후반이었다. 성인 선수의 수명은 군 복무 기간을 포함해 6~7년에 불과했던 셈이다.

물론 대중적인 관심이 높은 종목에서는 선수 영입 경쟁도 있었다.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한 여자농구와 1976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여자배구에 대중적 관심이 쏠리면서 여고 졸업반 유망주들에게 1~2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목돈이 '장학금'이나 '훈련지원금' 명목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70년대 초반까지 야구와 축구에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축구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대항전과 국내경기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차이가 심한 종목이고, 야구는 1970년대 초반 고교야구 열풍 이전까지는 주목을 받는 종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1960년대 야구 국가대표팀의 중심타자였던 박영길과 김응용도, 일본 프로야구 타격왕을 지낸 백인천도, 실업야구팀에 입단할 때 받은 계약금이나 보너스는 전혀 없었다.

1970년대의 선수 몸값폭등, 대기업의 20년치 연봉을 받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부터 스포츠 선수들의 유례 없는 몸값 폭등이 이어졌다. 1977년 한양대 배구선수 강만수와 숙명여고 농구선수 전미애가 각각 금성과 한국화장품 실업팀에서 300만원의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아 화제가 됐지만 1978년에는 고려대 농구선수 이동균이 현대에서 5000만원을 받아 그 기록을 훌쩍 넘어섰고 1979년 말에도 연세대의 야구선수 최동원과 송원여고의 배구선수 제숙자가 각각 롯데와 호남정유로부터 5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그 해 현대는 프로축구팀 창단을 전제로 공군 제대를 앞둔 차범근에게 1억 원의 계약금을 제시했지만, 차범근이 독일 프로팀에 입단하면서 무산되기도 했다.

고교와 대학을 졸업하는 최고 유망주 선수에게 주어지던 계약금은 1970년대 중반과 후반의 몇 년 사이에 대략 20배가량 뛰어오른 셈이다. 1980년 7급 공무원의 초봉이 9만원이었고 1978년 대기업 중 가장 많은 급여를 받던 금성사의 대졸신입사원 초봉이 19만 3천원이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1970년대 중반까지 서너 달 분의 월급에서 아주 많게는 1년치 연봉 정도로 평가되던 선수 입단의 대가가 순식간에 대기업 연봉의 20배 이상의 수준까지 치솟은 것이다.
 

최동원 최동원은 한국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야구가 국내 최고 인기 종목으로 올라서던 순간 정점에 있던 투수였다는 점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연세대를 졸업하면서 실업야구팀 롯데에서 5천만원의 역대 한국스포츠 최고액 계약금을 받기로 했을 때 언론은 '야구선수가 가장 값싸게 팔리던 전례를 깼다'(동아일보 1980년 12월 1일자)고 평가하기도 했다. ⓒ 다큐영화 '1984 최동원' 스틸(영화사 진)


물론 그것은 1차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성장해온 한국 경제의 규모와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확장된 내수 소비시장과 활성화된 소비문화의 반영이었다. 1960년에 79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974년 600달러 선을 넘어설 만큼 가파르게 성장했고, 문화적 수요도 함께 확대되면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도 빠르게 커졌다. 1969년에 창간하며 2만 부를 발간했던 국내 최초의 스포츠 전문 일간지 <일간 스포츠>가 1973년에는 10배인 20만 부를, 1976년에는 다시 4배 늘어난 80만 부를 찍어낼 정도였다.

하지만 기업이 한 명의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한 명의 직원을 20년 간 고용할 수 있는 돈을 계약금으로 지불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단지 연간 두어 차례의 단기 대회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내서 기업의 명예를 빛내는 데 기여하는 정도로는 도저히 상쇄할 수 없는 수준의 돈이며, 그래서 스포츠를 통해 그 이상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거나 곧 그런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계산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규모의 투자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계약금 폭등을 주도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대거 실업팀을 창단한 민간기업들이었다. 1970년 금성사 계열의 호남정유가 여자배구팀을 창단했고 1973년에는 미도파 백화점을 운영하던 대농이 국세청 여자배구단을 인수했으며 1975년에는 한국화장품 여자농구팀이 창단되었다. 그리고 1976년 금성사가 남자배구팀을 만들었고 1976년과 1977년에는 롯데와 한국화장품, 포항제철 야구팀이, 1978년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남자농구팀이 창단됐다. 이들 민간기업은 기존 공기업들보다 서너 배 많은 운영비를 지출하며 선수 영입과 마케팅 경쟁을 촉발했다.

특히 1970년대 초반 고교야구 열풍과 함께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올라선 야구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 확대는 두드러졌다. 특히 이미 일본에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해온 롯데는 창단 초기부터 거액을 투입한 공격적인 영입 작업을 통해 실업리그에 참여한 첫 시즌인 1976년 하계리그와 추계리그를 모두 석권하고 최우수감독상(김동엽)과 최우수선수상(차영화), 최우수투수상(유남호)을 휩쓸었다. 30명 규모의 여성 고적대 응원단 '롯데 엔젤스'를 운영하고 중요한 경기에는 그룹 임직원 가족을 동원한 집단응원을 연출하며 응원문화를 선도했다. 또한 세 민간기업 실업야구팀은 경기 실적을 적극적으로 포상과 고과평가에 반영해 선수들이 훈련과 경기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했다. 
 

야구선수 수요의 팽창 1970년대 후반 스포츠, 특히 야구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가 늘면서 선수들에 대한 수요가 팽창했다. 그 결과 선수들의 취업이 확대되고 계약금은 폭등했다. 경향신문 1977년 7월 21자는 그 해 대졸예정 야구선수 전원이 취업에 성공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 경향신문


1960년대에 '공기업과 국가기관이 지원하는 수준 높은 직장인 스포츠'의 성격을 가지고 있던 실업스포츠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스포츠를 통한 이윤 창출을 시도하는 민간자본의 산업적 스포츠'로 변화하고 있었다. 특히 야구는 '세미프로'의 수준을 넘어 실질적인 프로스포츠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롯데가 여러 차례 독자적인 프로야구팀 창단을 공언했던 것이나 1976년 '한국직업야구 추진위원회'가 발족하고 실업야구연맹이 조직적으로 가세해 프로야구 창설을 시도했던 것은 그런 상황 변화의 결과였다.

결국 1970년대의 프로야구 창설 시도는 좌절되었는데, 소비력이나 선수층의 부족이 아닌 정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안보위기와 경제위기를 강조하고 과장하며 비상권력의 유지를 정당화하던 유신체제에서, '함께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여가소비문화의 상징인 프로스포츠를 용납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회에 프로스포츠의 시대가 열린 것은,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금욕' 대신 '욕망'을 이용하기로 한 새로운 군사정권에 의해서였다. 이미 1974년부터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까지 시작한 컬러TV의 국내 판매와 방송이 유신시대가 막을 내리기까지 6년 동안이나 금지됐다가 전두환 정권 출범과 함께 허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프로야구의 창설은 전두환 정권 시기에, 청와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이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거나 최소한 상당한 기간이 지연되었을 일은 아니었다. 이미 가능했고 추진되던 일을 박정희 정권이 막았고 전두환 정권이 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전두환 정부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해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