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5 07:33최종 업데이트 22.03.15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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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관련 단체와 도내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 10일 오후 제주시 한울누리공원 인근 도로변에 있는 박진경 추도비에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라는 제목의 감옥 형태 조형물을 설치했다. 사진은 11일 오전 감옥 형태 조형물이 설치된 박진경 추도비의 모습. 2022.3.11 ⓒ 연합뉴스

 
4·3사건(4·3항쟁) 72주년을 맞게 될 제주에서 상징적인 의식이 거행됐다. 제주도민들을 학살하고도 버젓이 제주에 추도비가 세워졌던 박진경의 추도비에 감옥 창살을 씌우는 시민들의 의식이었다. 지난 10일 있었던 일이다.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4·3 희생자는 1만 4천 명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3만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1948년 당시 제주 인구 25만의 10% 이상이 미군정의 공권력 행사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4·3 하면 서북청년단과 군·경 토벌대가 흔히 연상되지만, 이들은 몸통이 아니었다. 이는 주한미군이 몸통인 사건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 수립으로 미군정 지배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다음날부터 정권 인수인계를 위한 한미회담이 개시되어 9월 3일 경찰권이 이양되고 13일 재무부·상공부를 제외한 여타 권한이 대한민국정부로 이관됐다.

정부수립 이후로도 미군정이 여전히 권한을 행사했다. 이는 정부수립 이전에 벌어진 제주 4·3의 책임 주체가 미국이며, 도민 10% 이상을 학살한 주체 역시 미국임을 의미한다.

'저승사자' 박진경

박진경은 미군정의 수족이 되어 민간인 학살을 주도했다. 그런 그를 기념하는 추도비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산 1-2에 존재한다. 제주 출신 역사학자 양정심의 <제주 4·3항쟁-저항과 아픔의 역사>는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가 세워지게 된 원인인 그의 '혁혁한 전공' 중 일부를 설명한다. 그의 학살 기간 중 일부인 1948년 5월 14일부터 21일까지 세운 '전공'은 이렇다.
 
국방경비대 박진경의 지휘 하에 5월 14일부터 21일까지 조천면 송당리와 교래리에서 동굴 수색과 게릴라 진압 작전을 벌여 200여 명을 체포하고 7명을 사살했다. 박진경은 매일 한 사람이 한 명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강경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박진경이 연대장이 된 것은 5월 초다. 이때만 해도 제주 사람들은 군대에 호의적이었다. '4·28 평화회담'으로 불리는 주민 유격대와 국방경비대의 협상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군정의 압제에 대항해 일어난 주민 유격대가 국방경비대와 평화회담을 했던 것은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분위기를 일거에 바꾼 것은 저승사자 박진경의 등장이다. 위 책은 "중산간 지역을 고립시키는 경비대 11연대의 강경한 진압으로 많은 중산간 지역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유격대 또한 더 깊은 산속으로 이동해야 했다"며 "무차별 토벌 작전은 국방경비대에 대한 유격대와 일반 도민들의 호의적인 태도를 적대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설명한다. 그런 박진경을 추모하는 비석이 다른 곳도 아닌 제주 땅에 세워졌던 것이다.

작년 12월 5일 이승학 '제주4·3사건 재정립 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이 <제주경제일보>에 기고한 '제주 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2)'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박진경은 3·1운동 전인 1918년 12월 22일 경남 남해에서 출생했다. 남명공립보통학교·남해공립보통학교·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와 오사카 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를 거쳐 마쓰도 공병예비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1945년 2월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일본군 장교로 제주도에 배치된 그는 8·15 뒤에 귀향했다가 미군정 수립에 힘입어 다시 군복을 입었다. 그런 뒤 제11연대장이 되어 제주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맨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박진경이다. ⓒ 나무위키

 
미군정의 수족

미군정이 볼 때 박진경은 국면 전환용 카드였다. 4·3 진압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 때 그가 투입됐던 것이다. 박진경의 전임자인 김익렬이 있을 때는 4·28 평화회담이 도출됐다. 회담의 결과로 '3일 내에 전투를 중단하고, 유격대의 무장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며, 봉기 지도부가 사법적 책임을 진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런데 5월 1일, 오라리 사건이 돌발했다. 외형상으로 보면 주민 유격대가 제주읍 오라리 주민들을 기습하고 방화한 사건이었다. 실제로는 유격대를 가장한 경찰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오늘날 알려져 있다. 오라리 사건은 4·28 평화회담을 파기하는 명분이 됐고, 무장 해제를 하기로 했던 유격대에 대해 미군이 공세를 퍼붓는 명분이 됐다.

박진경은 미군정이 한층 더 강경 모드로 변모하는 상황에서 김익렬을 대신해 진압의 선봉에 서게 됐다. 미군정이 그에게 무엇을 기대했을 것인지 추론하게 만드는 일이다. 군대를 바라보는 제주도민들의 시선이 박진경의 출현과 함께 급변했다는 사실은 그가 그 기대에 부응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어느 정도로 원성을 샀는가는 부임한 다음 달 일어난 사건에서 확인된다. 6월 18일 새벽에 그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잔혹한 학살을 지휘하다가 갑자기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다음날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경비대 제주도 연대 박 대장 피살'은 "박진경 대령은 6월 18일 상오 세시 15분 제주 연대본부 숙사에서 잠자다가 암살"됐다고 보도했다.

그를 죽인 사람들은 부하들이었다. 그해 8월 10일자 <조선일보> '범인은 부하'는 친일파 이응준 대령이 주재한 통위부(국방부) 고등군법회의를 보도하면서 암살 주역들의 신원을 설명했다.
 
앞서 제주도 현지에서 이라난 제주도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은 그 후 암살범 수(數)명이 체포되여 통위부 군법회의에서 문초 중(中) 어제 9일 아츰 그 제일회 군률재판 법정에서 이응준 대령 주심 하에 개정되였는데 여기서 사실심문을 받은 암살 범인은 모다 박 대령의 부하로 11연대에서 근무하든 문상길 중위 외 하사 5명이었다.
 
군인들은 무자비한 진압 명령과 살상 명령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어 박진경을 죽였노라고 진술했다. 대령 승진 축하 모임이 끝난 뒤 잠자리에 든 그를 죽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제주도민들의 원성이 그들의 행위에 반영됐던 것이다.

역사의 감옥에 가두다

그런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1952년 제주도 경찰국 청사에 세워졌다가 제주시 충혼묘지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서 있게 됐다. 제주4·3평화재단이 운영하는 <제주 4·3 아카이브> 홈페이지에 따르면, 추도비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제주도 공비 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 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 이에 우리 30만 도민과 군경원호회가 합동하여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단갈(短碣)을 세우고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길이 전한다.
 
도민들을 공비로 몰아 학살한 사람이 '제주도를 수호하고 도민들을 위했다'며 30만 도민의 이름으로 추모를 받든다는 내용이다. 이런 어이없는 추도비가 다른 곳도 아닌 제주에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4·3과 제주의 상처에 얼마나 둔감했는가를 보여준다. 제주도민들이 추도비에 쇠창살을 씌우기 전에 국가권력이나 육군이 먼저 나서서 철거했어야 마땅하다.

4·3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둔감함은 그의 고향인 남해에서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지 못한 데서도 증명된다. 1990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 12면에 보도된 일이다.
 
창군동우회 김종갑 회장은 국군 창설에 큰 기여를 했던 고 박진경 육군대령의 42주기를 맞아 19일 오전 11시 그의 출신지인 남해군 무림리 군민동산에서 동상 제막식을 갖는다.
 

남해군민동산에 있는 박진경 대령 동상. 박진경은 4.3항쟁 때 학살 주범이다. ⓒ 김영진

 
제주 도내 16개 단체는 박진경 추도비에 쇠창살을 두르고 '이것은 역사의 감옥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걸었다. 글의 전문은 이렇다.
 
역사의 죄인을 추모하는 건 그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
박진경이 누구인가
왜왕에게 충성을 맹서한 일본군 소위 출신에 미군정의 지시로
제주4·3학살을 집행하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이가 아닌가
이런 인간의 추모비가 70년 넘도록 충혼묘지 언저리서
충혈된 눈으로 제주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에 우리는 역사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이 자의 추모비를 철창에 가둔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자에 대한 단죄이자
불의로 굴절된 역사의 청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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