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전라도 영광 사는데, 상을 받아서 정말로 '영광'입니다. 전 항상 '영광'입니다."
그녀의 수상소감에 객석에서는 깨알웃음이 쏟아졌다. 그러나 곧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말을 멈춘 채 울먹였기 때문이다.
"97년에 귀농해서 남편과 함께 소를 키우며 치즈 발효에 도전해왔는데...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온 저를 칭찬해봅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숙연해진 객석, 누군가 이렇게 소곤거렸다. '치즈가 그렇게 힘들다며...' '그러게.' 울먹이던 그녀는 독일의 대표적인 신선치즈인 크박(크바르크)을 만들어온 '유레카 목장 크박치즈' 김수영 대표였다. 이어서 다음 수상자가 올라왔다. 그런데 그녀 역시 울먹였다. 지원목장(전남 영암) 자연숙성치즈 곽수정 대표였다.
"인생을 버리고 싶을 때 치즈를 배웠습니다. 정말 미친듯이 배웠습니다. 방금 짠 우유가 가공장에 들어올 때 가장 즐겁고, 치즈를 닦을 때는 대화를 나누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치즈이야기를 할 때면 늘 눈물이 나네요..."
저렇게 즐거운데 왜 눈물을 흘릴까, 하는 의문이 든 순간 치즈분야 마지막 수상자로 올라온 하네뜨 꾼치즈(경기 포천) 장미향 대표가 입을 열었다.
"치즈 만드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쟁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즐겨먹는 피자 위에 얹혀지는 치즈를 내 땅에서 나온 우유로 만든 우리 치즈로 만들어보려고 2003년부터 뜻있는 농가들이 모여 연구를 해왔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다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신기한 게 시작은 내가 살려고 했는데 음식이 남의 생명을 살리더라구요."
장 대표는 목장에서 맛보는 우유맛이 사계절 다 다르다며,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치즈쟁이들이 맹활약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좋은 치즈가 나온다는 것을 꼭 기억해주세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시상식장에 울려 퍼졌다. 지난 25일 서울 인사동 KOTE에서 열린 '참발효어워즈 2022' 시상식 현장의 이야기다.
'무늬만 발효식품들이 한국의 맛으로 알려져'
올해로 3회째인 '참발효어워즈'는 공장식 발효식품에 가려 사라져가는 전통 발효식품을 걱정하던 먹거리 운동가들이 우수한 국산 발효식품을 발굴하고 소비자들과의 연계성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국내 유일의 발효식품 전문 시상식이다. 김종덕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장은 다양한 콩의 나라이자 발효의 나라인 우리가 어느새 패스트푸드의 나라가 됐다며 시상식 취지를 설명했다.
"발효음식은 슬로푸드의 핵심이고 우리는 발효의 나라인데, 외국 사람들은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달고나, <기생충>에 나온 짜파구리가 한국 음식인 줄 알아요. 우리 스스로 먹는 발효식품도 패스트푸드화 됐습니다. 무늬만 발효인 식품기업의 간장이 더 맛있다고 느끼고 대학도 대기업 간장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이런 현실에서 이제는 진짜 발효가 무늬만 발효와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발효식품의 패스트푸드화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간장만 해도 그렇다. 메주를 띄워 몇 개월 간 발효와 숙성과정을 거치면 걸쭉한 장이 되는데 여기서 건더기만 거르면 된장이 되고, 걸러진 맑은 국물은 간장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시중에서 흔히 사먹는 간장들은 이런 과정을 생략했다. '양조간장'은 메주 대신 탈지 대두박과밀 등을 양조장에서 빠르게 발효시켜 만든 일본식 개량간장으로 '왜간장', '일본간장'이라고 한다. '혼합간장'은 염산 등을 써서 콩단백질을 인위적으로 분해시켜 만든 '산분해간장'에 왜간장으로 불리는 양조간장을 섞어 저렴하게 만든 간장이다. 이런 간장들이 국내 시장을 독점하며 해외에서는 '한국의 맛'으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조선간장으로 불려온 진짜 한식간장은 '짜다' 혹은 '품질이 들쑥날쑥하다'라며 시장에서 외면을 받아왔어요. 그런데 저희가 현장을 다니면서 놀란 것은, 제대로 만든 한식간장은 절대 짜지 않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릴 때 먹던 어머님의 손 맛이랄까, 굉장히 고급진 풍미와 감칠맛이 돌아요. 그렇게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발효가들이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어요. 그걸 알리고 도와야겠다는 뜻을 모아 시상식을 만들었죠."
김원일 슬로푸드 문화원 이사장의 말이다. 먹거리 운동가들은 무엇보다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목표 아래 깐깐한 맛 평가과정을 거쳐 수상작을 선정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장류(간장, 된장, 고추장)와 막걸리, 목장치즈 등 모두 5개 분야에서 출품 접수를 받은 뒤, 125명의 시민 맛 평가단과 24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관능평가위원단의 심층적인 블라인드 관능평가를 거쳤다. 또 서류 심사와 현장 실사를 통해 해당 제품이 환경보호와 지역사회에 이로운 영향력을 주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ESG 가치 평가'를 통해 가점을 부여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강순아 호서대 교수는 특히 현장실사가 가장 보람있으면서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단이 직접 수많은 현장을 다니면서 국내산 재료를 엄수해서 쓰고 있는지, 그 지역의 농민이나 지역사회와 얼마나 단단하게 연계하고 있는지, 문화전통 및 발효여부 등을 정말 꼼꼼하게 검증했습니다."
그렇게 간장 3점, 된장 5점, 고추장 2점, 막걸리 7점, 국내산 목장치즈 6점, 모두 23점이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수상작이 발표되고 수상자들의 소감을 만나보는 시간, 먼저 간장, 된장, 고추장 심사를 총괄한 전통장 전문가 김지영씨가 장류 분야 올해의 심사평을 요약해 말했다.
"매년 상향 평준화되고 있습니다. 소비자로서 흐뭇한 일입니다. 전통장의 매력은 집집마다 장 맛이 다르다는 건데요. 만든 이의 개성이 담겨지면서도 그 맛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품질관리 능력이 향상되고 있습니다."
농사도 발효도 하늘과 동업한다
간장 부문 대상을 받은 '홍주조선간장' 이경자 대표(충남 홍성)는 호스피스 병동의 전문 상담사 출신이다. 특히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된장국이나 장아찌같은 전통 식품을 먹고 싶어하는 환자들을 보고 그들에게 전통 음식을 해준 일이 계기가 되어 직접 장을 담그게 됐다는 그녀는 충남 홍성에서 지역 농산물과 토종 청서리태를 사용해 장을 만든다. 옛 고서를 찾아보며 최근에는 도토리를 이용한 '상실장'을 개발했다는 그녀는 수상소감에서 발효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밝혔다.
"농사가 하늘과 동업이라면 발효도 하늘과 동업입니다. 저는 특히 우리 조상님들이 남긴 고서를 찾아보면서 옛맛을 연구합니다. 때로는 주변에서 '그런 게 장이 되느냐'고 말하는 재료도 재료로 써보고, '말이 돼?'하는 방법도 써보면서 너무 즐겁게 하늘과 자연과 미생물과 동업하고 있습니다."
된장 부문 대상을 받은 '방주품된장' 강문필 대표(경북 울진)는 무농약 콩으로 메주를 만들고 유기농 고추씨를 첨가해 잡균을 억제하고 있다. 지난해 상을 받은 뒤 2년 연속 수상을 하게 된 강 대표는 더 무거운 책임감을 갖게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세상에 거짓이 난무해도 더 진실하게 제품 하나에 진심을 담으려 합니다."
시상식장에서는 기후변화 현장의 어려움도 소개됐다. 귀농 후 15년 째 전남 고흥에서 장을 담그며 대상을 수상한 '해담은장뜰된장'의 김정숙 대표는 한 해 한 해 달라지는 날씨의 변화 속에 장 담그며 느끼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시골에서 메주 빚고 장 담그며 세월가는 줄 몰랐는데 벌써 15년이네요. 사실 저는 올해 출품을 포기하려 했어요. 하늘과 동업인데, 저는 똑같이 하는데 해마다 조금씩 맛이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올해는 제 맛이 아닌 듯해서 스스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하늘과 동업하고 있는 발효가들은 하늘이 달라지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나름의 생산 공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제주 지역 토종 푸른콩만으로 장을 담가온 간장 부문 수상자 <방주제주푸른콩간장농후> 박영희 대표(제주 서귀포)는 그냥 두면 잘되던 장이 기후변화로 뜻대로 되지 않아 한 해 치 장을 전부 버린 적도 있었다며, 지금은 제주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듯한 화산송이 발효실을 만드는 등 발효 환경을 잘 조성해 기후변화 속 품질유지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산 쌀과 국내산 누룩으로만 빚은 막걸리들
올해 새로 신설된 막걸리 분야는 발효분야 가운데 가장 시장성이 넓어진 분야다. 더구나 전통주에 한해 온라인 판매가 가능해졌기에 코로나19 국면에서도 활성화됐다. 그러나 여기에도 깐깐한 심사기준이 적용됐다. 국내산 쌀, 국내산 누룩만 사용한 제품이어야 한다. 겉으로 전통주를 내세우면서도 외국산 쌀과 누룩을 쓰는 제품들이 비일비재하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전통주 시상식이 많지만 국내산 쌀과 누룩만 심사하는 시상식은 저희가 유일합니다. 그만큼 깐깐하게 심사했고요. 전반적으로 단맛과 신맛의 균형이 맞고 품질이 고릅니다. 단점으로는 도수가 조금 높은데 최근 낮은 도수의 술을 선호하는 시장트렌드를 반영해 개선될 여지가 있습니다. 특히 좋은 품질의 프리미엄 막걸리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막걸리 부문 관능평가에 참여한 이대형 경기도 농업기술원 연구사의 심사평이었다. 모두 7개 제품이 상을 받았는데, 포천 막걸리의 고장 경기도 포천의 <고향춘>, 쌀의 고장 여주의 <백년향>, 무농약 강릉쌀과 누룩으로 빚은 <소향>, 독특하게도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생산된 <씨(C) 막걸리>, 경기도 양주골에서 빚은 <이화주>, 전북 순창에서 빚은 <지란지교>, 그리고 라벨부터 포장까지 친환경 공정으로 만들었다는 경기도 용인의 <호심>까지 이름도 디자인도 다양했다.
기자는 그 중 한 제품을 맛보려 시음 코너에 가봤는데, '어느 걸 드릴까요?' 하는 질문에 선뜻 선택하지 못했다. 하나같이 고급지고 맛깔스러워보이는 막걸리들, 그 중 하나를 우선 맛보기 시작했는데, 달짝지근하게 넘어가는 게 '이건 술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맥주 한 두 모금에 얼굴 빨개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기자는 이날 시음 이후 매우 기분 좋은 상태로 대중교통 타고 집에 갔다는...).
"한국에도 이런 치즈가 있었다니..."
역시 올해 처음 신설된 국내산 목장치즈 부문에서는 모두 6점이 선정됐다. 하나같이 전국 각지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농민들이 직접 자신의 목장에서 나온 원유를 가공해 만든 치즈들이다. 소에게 먹이는 사료부터 원유 가공까지 전 과정을 자신의 철학에 맞게 조절할 수 있기에 치즈의 원조 유럽에서도 소를 직접 키우는 치즈 생산자들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분위기,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치즈는 일주일만 지나도 곰팡이가 피어납니다. 늘 정성으로 돌봐야되고요, 그래서 어제도 저희 딸 아이하고 치즈를 돌보다가 요만큼 작은 쪼가리가 떨어져있는것도 서로 먹겠다고 경쟁했어요. 그 한 쪼가리도 너무 소중하다는 거죠."
충남 천안에서 아이 다섯 낳고 키우며 목장을 운영하는 <썬러브 고다형자연숙성치즈> 이선애 대표의 수상 소감이다. 영광 법성포에서 미르목장을 운영하는 <살루떼 스트링치즈> 김경미 대표는 딸아이에게 좋은 걸 먹이려는 마음으로 치즈를 시작했다며 자신의 바람을 수상소감에 담았다.
"건강한 소에서 건강한 우유와 치즈가 나온다는 생각으로 저희 모토를 건강으로 잡았습니다. 사실 제 딸아이에게 좋은 걸 먹이려다 여기까지 왔는데요, 이제 우리나라 치즈도 당당하게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경기도 연천에서 3대가 함께 목장을 운영하며 치즈를 만드는 <애심목장 숙성치즈> 최철 대표는 '치즈는 와인 뿐 아니라 막걸리와도 잘 어울린다'며 발효식품 모두의 동반 성장을 기원했다.
시상식이 끝난 뒤 간단한 시식행사가 열렸다. 치즈와 막걸리는 바로 맛보면 됐고, 간장 등 장류는 '버섯간장볶음' 등 간장이나 된장 맛을 오롯이 맛볼 수 있는 전채요리 형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맛있다'란 감탄사가 곳곳에서 나오는 가운데 기자 옆에 있던 소비자와 발효가들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몰랐어요. 한국에도 이런 치즈가 있었다는 걸."
"저희도 치즈를 배우면서 독일에 일부러 가봤어요. 그 맛을 알아야 하니까."
소비자와 발효가들의 따뜻한 만남이 내년에도 계속됐으면 좋겠다. <참발효어워즈 2022> 수상작들은 오는 6월 30일까지 서울 안국역 상생상회 전시회와 '로컬 히어로'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