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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역사를 지닌 전북 군산의 전통 재래시장. 조선 시대부터 경포(경장), 지경(대야), 임피, 서포 등지에 장이 섰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중 대야장은 요즘도 오일장(1일, 6일)이 열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도 다양한 시장이 존재했으며, 최근의 신영시장,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종합시장, 새벽시장 등은 벨트를 이루며 하나의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군산화물역 철거하기 전 새벽시장 모습(2008)
 군산화물역 철거하기 전 새벽시장 모습(2008)
ⓒ 김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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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2008년 6월 어느 날 군산역(군산화물역 전신) 부근 모습이다. 원본에는 충남 서천군 일부와 금강하굿둑 등이 담겨 있으나 군산역 부근 지역만 트리밍하였다. 예전에 존재했던 서래장터(경장시)와 요즘의 전통시장 위치를 가늠할 수 있으며 진즉 사라진 군산역과 군산의 명물로 꼽히는 새벽시장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귀한 사진으로 여겨진다.

녹색으로 나타나는 지역은 서래산(35.8m)과 채석장이 있던 자리다. 서래산은 화력발전소(광복 후 백화산업), 당집, 교회 등이 자리했던 제법 큰 산이었다. 그러나 100년 가까운 채석작업으로 평지가 되더니 고층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상전벽해'를 실감나게 한다. 서래산 아래(구 군산역 반대편)가 한강 이남 최초로 3·1만세운동 일어났던 경포, 즉 서래장터다.

100년 전 군산역 부근은 논과 갈대밭
 
일제강점기 군산역 플랫폼
 일제강점기 군산역 플랫폼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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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역은 일제가 더욱 많은 양의 쌀을 본토로 빼돌리기 위해 서둘러 개설한 군산선(군산-이리) 종착역이자 시발역이기도 했다. 호남선 지선임에도 본선보다 2년이나 앞선 1912년 개통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군산역은 그해 3월 6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며, 위치는 옥구군 미면에 속하였다. 당시엔 초가집이 드문드문 보이는 도시 외곽지역이었던 것.

1917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군산지형도'에 군산역 부근(현 신영시장, 공설시장, 역전종합시장, 감도가, 금암동, 중동 등)은 논과 간석지(갈대밭)로 나타난다. 군산으로 들어오는 도로 주변도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내항선 철도 역시 째보선창 부근에서 멈췄으며, 지금의 '구암 3·1로(경암동 로터리-구암동)'는 뚝길(제방)로 표기되어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군산역은 광복 후에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기능을 유지하다가 2008년 1월 1일 장항선 연장 개통과 함께 업무를 내흥동 신역(新驛)으로 넘겨준다. 이후 군산화물역으로 남았다가 2010년 12월경 도로 연장공사(역전로터리-경암사거리) 때 철거됐다.

보릿고개 시절 새벽시장과 '억척 아낙'들
 
군산 역전새벽시장 모습1(2010)
 군산 역전새벽시장 모습1(2010)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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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인근 농민들이 손수 가꾼 채소와 싱싱한 생선을 차에 싣고 모여드는 새벽시장. 기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이면 장이 서고, 동이 트기 전에 파했다. '도깨비시장' '반짝시장' 등의 별칭도 그때 붙여진 것으로 알려진다. 기차나 시내버스 이용하던 때와 달리 요즘은 남편이나 자녀가 자가용으로 실어다 주거나 합승해서 오기도 한다.

옛 노인들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새벽 6시 전후 장이 섰으나 광복 후 교통이 편리해지고 1982년 통금(通禁)이 풀리면서 새벽 2시로 앞당겨졌다가 다시 4시로 늦춰지는 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왔다. 상인들이 취급하는 물품도 처음엔 쌀 위주로 거래됐으나 식생활이 개선되면서 텃밭에서 가꾼 채소와 푸성귀, 과일, 수산물, 일용잡화 등 다양해졌다.

보릿고개 시절 시골 아낙들은 채소나 쌀을 판 돈으로 생선이나 옷감 등 필요한 물건을 구매했다. 첫차로 임피, 이리(익산)까지 오가며 생계를 꾸려가는 '억척 아낙'도 많았다. 쌀을 '되'로 거래한다고 해서 '됫박 쌀장수'로 불렸던 그들은 기차 출발 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쌀을 한두 말씩 이고지고 민간인 통행금지 구역인 철길을 죽어라 뛰어다녔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억척 아낙들은 '떼뽀차(도둑기차)'를 이용하였다. 만약 차장에게 들키면 담뱃값 몇 푼을 손에 쥐어주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빈한한 살림을 꾸려갔다. '됫박 쌀장수'는 20대에서 40대까지 세대를 가리지 않았다. 경비들과 차장들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이해했기에 도둑기차 이용이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역전새벽시장, 1930년대 소설 <탁류>에도 등장
 
군산 역전새벽시장 모습2(2010)
 군산 역전새벽시장 모습2(2010)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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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역 이전으로 기적소리는 끊긴 지 오래지만, 새벽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놀라운 것은 요즘도 새벽 4시 즈음이면 역전종합시장 입구 도로부터 공용주차장과 농협(구 시외버스터미널) 뒷골목까지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새벽시장은 언제부터 서기 시작했을까, 채만식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걸 보면 족히 10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일제강점기 군산 사회상을 날카롭게 풍자한 <탁류>. 소설 주인공 정 주사는 초봉이가 보내준 500원 중 300원으로 두 칸짜리 방에 부엌이 딸린 자그만 구멍가게를 마련한다. 삯바느질하는 아내 유씨에게 재봉틀도 사준다. 가게를 아내에게 맡긴 정 주사는 밖에서 물건 사들이는 소임을 맡는다. 아래는 소설의 한 대목이다.

"(정 주사는) 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서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채소도 사고, 공설시장에서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고, 더러는 '안스래(경포)'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다 준다. 그러고 나면, 정주사는 온종일 팔자 편한 영감님이다."

정주사가 과실이며 과자 부스러기도 사는 '공설시장'은 지금의 마트형 공설시장(구시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새벽이면 정거장 앞으로 나가 길목을 지키다가 촌사람들이 가져오는 채소도 사고..." 대목은 새벽시장이 1930년대도 열렸음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시장은 군산역과 시외버스터미널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었으며 그 모습은 광복 후에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시외버스터미널이 외곽으로 이전한 지 반세기 가까이 됐고, 군산역 건물이 철거된 지 1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역전광장에서 열리는 새벽시장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새벽을 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태그:#군산 역전새벽시장, #도깨비시장, #공설시장, #역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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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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