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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사회초년생이라(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대학 졸업 후 취업준비 하며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점을 양형에 반영했다)... 우리 아이는 26살에 죽었습니다. 80살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피해자 관점에선) 양형을 추가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제가 딸이 하나라 다행인 걸까요? 만일 하나 더 있었다면... 이런 나라에서는 키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징역 7년. 고 황예진씨의 어머니인 전아무개씨는 딸을 사망에 이르게 한 가해자 이아무개씨가 받은 형량을 '죽음의 대가'라고 표현했다. 전씨는 수사기관의 도움 없이 딸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CCTV를 구한 뒤 3개월 동안 매일 밤 분석해 재판부에 '살인의 고의성'을 입증할 자료로 제출했다. 

여지없이 적용된 "우발적 폭행"... 선고 후에도 법정 못 떠난 유가족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자신과 말다툼을 하던 여자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지난 9월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자신과 말다툼을 하던 여자친구를 폭행해 숨지게 한 30대 남성이 지난 9월 15일 서울서부지법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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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지난해 7월 서울 마포구 소재 오피스텔에서 피해자와 다투던 중 피해자를 수차례 폭행했고, 의식을 잃은 피해자를 끌고 오피스텔 1층과 8층을 오가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상해치사 혐의로 재판을 받아왔다. 피해자가 의식을 잃은 상황에서 112와 119 등에 허위 신고를 하며 골든 타임을 놓친 혐의도 적용됐다.

"이른바 교제살인, (연인이) 헤어지자고 하거나, 교제를 원하지 않는 여성에게 보복할 의도로 계획적 살인의 범행에 이른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서울서부지법 형사12부(재판장 안동범)는 6일 검찰이 이씨에게 구형한 징역 10년형보다 3년 낮은 형량을 선고하면서, 가해자가 저지른 범죄가 '교제살인'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 사망 이전 지속적 폭행이 없었고 ▲ 피해자와 대립하던 중 저지른 우발적 폭행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살해하기 위해 방치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다.

이씨가 "범죄 전력이 없는 초범"이라는 이유도 참작됐다. 황씨가 사망하기 전 가해자와 나눈 카카오톡 등 메신저에서 지속적으로 당한 괴롭힘과 성폭력 흔적은 "피고인의 귀책사유" 한 줄로 갈음, 양형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사람이 죽었는데 7년이요?"

선고 직후, 방청석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재판부는 미동없이 항소 절차를 설명한 뒤 그대로 퇴정했다. 재판 시작 1시간 전부터 방청을 기다리다 빈자리 없이 방청석을 메운 예진씨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예진씨의 한 친구는 "대한민국 법이 너무 신기하다"며 헛웃음을 짓다가 이내 오열했다.

황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판이 끝난 후에도 10여 분간 자리를 뜨지 못했다. 황씨 아버지는 변호인을 붙들고 "7년이 뭡니까... (검사가) 항소를 못하면 어쩌죠" 분통을 터뜨렸다. 어머니인 전씨는 법정 밖에서 취재진과 만나 "끝까지 검찰에 항소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부모는 검찰이 항소를 하지 않으면, 청와대 앞 1인 시위라도 하겠다고 했다.

황씨 측 변호인은 기자들과 만나 "통상 형량의 절반이나 3분의2가 선고되면 검찰에서 항소하지 않는다"라면서 "(그러나) 1심에서 하지 못한 것들을 항소심에서 다루면, 그 과정을 통해서도 가족들이 회복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세번으로 끝난 심리... "피해자 가족이 모든 걸 입증해야 하는 나라"

예진씨 사건의 심리는 지난해 11월 4일, 11월 18일, 12월 13일 총 세 번 진행됐다. 유가족이 재판부에 CCTV 검증뿐 아니라 재판부의 현장 검증과 법의학, 범죄심리학, 응급의학 등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법정에서 청취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피해자 가족이 모든 것을 입증해야 하는 제도라는 걸 알게 됐다."
 

전씨는 경찰과 검찰 등 수사 기관의 유죄 입증 의지를 비판하기도 했다. 황씨 측 변호인은 "경찰이 하필 추석 전 사건을 송치하면서, 수사할 시간 중 추석 연휴를 까먹어 버리고, 남부구치소 확진자 발생으로 피의자 조사 시간도 줄어들었다"면서 "재판도 피고인 심문과 어머니 법정진술 등 형식적인 것에 그쳤다. 음주로 사람을 사망하게 한 사람도 7년 이상씩 선고가 된다. 납득하기 어려운 형량이다"라고 주장했다.

"오직 이 사건은 CCTV로만 진행됐습니다. (죽음에 결정적 원인이 된)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4번의 폭행은 반영되지 않았어요. 질질 끌려 다니며 죽어간 아이의 영상을 3개월 동안 분석한 부모의 마음이 어떨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진씨의 어머니는 검찰에 항소를 거듭 당부하면서, 한편으로는 국회에 '황예진법' 논의에 힘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국회는 예진씨 사건 이후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성폭력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강화하는 안을 담은 법안 논의를 시작한 단계다.

"또 다른 예진이가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해달라는 요구였다. 전씨는 선고 직후 취재진에 입장을 전하며 황씨의 죽음을 함께 아파해준 '예진이의 친구들'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전씨는 "그 친구들에게 해주고픈 말은, 예진이가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왔다고, (이런) 아픔을 같이 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태그:#마포 오피스텔, #교제살인, #상해치사, #데이트폭력, #황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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