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06 12:03최종 업데이트 22.01.06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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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엘지 트윈스를 처음으로 좋아한 것은 1991년이다. 난 골목의 놀이친구 무리에서 막내였는데, 늘 나와 함께 놀아주던 형들이 엘지 트윈스를 좋아한 것이 이유였다. 형들이 좋다고 하니 (혹은 좋아하라고 하니) 좋은 줄 알았다.

좋아하는 팀을 정하고 나니 야구가 재미있어졌다. 그전까지는 티브이에서 야구 중계를 하면 채널을 돌리곤 했는데, 선수 이름을 외우고 좋아하는 선수가 생기고, 또 경기에 이래라저래라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고나리질' 할 수 있게 되니 야구가 재미있어졌다. 하필 그 좋아하게 된 팀이 엘지 트윈스라서 1994년 이후 야구팬 인생은 늘 슬프고 불행했지만.
 
프로야구를 좋아해서 한때는 8개 구단(그때는 8개 구단이었다) 주요 선수들의 타율이나 방어율, 타점 같은 '스탯'(게임에서 사용자의 능력 수준을 숫자로 나타낸 것)을 줄줄 외고 다닌 적도 있다. 그런 것이 야구를 좋아하는 참된 야구 팬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세이버메트릭스(통계학과 게임이론을 도입한 선수 평가 방법론)를 사용하는 것이 워낙에 일반적이고 또 다양한 분석과 해석을 내놓는 매체와 콘텐츠가 많지만, 그때만 해도(외야 관중석에서 흡연이 가능하던 8개 구단 시절) 한 손엔 소주병, 한 손엔 스포츠 신문을 든 아저씨들과 한국 야구계의 미래를 통탄하고 요즘 것들에 비해 장효조나 김봉연이 얼마나 위대한 선수였는지를 구구절절하게 논할 수 있느냐가 야구 사랑의 척도였다.
  

5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1 프로야구 KBO 포스트시즌 준플레이오프 2차전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경기. 2021.11.5 ⓒ 연합뉴스

 
30년 넘게 야구 팬으로 살며 확인한 프로 스포츠 관람의 가장 큰 재미는 '아무 말 대잔치'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론이나 '썰'로 마음대로 감독 놀이(예전엔 경기 하나를 보며 선수 기용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감독 놀이가 한계였는데, 요즘은 선수 영입이니 구단 운영이니 하는 단장 놀이까지 놀이의 범위가 확대됐다)를 하는 것이 프로 스포츠 관람의 가장 큰 재미다.

이 속 편한 놀이가 가능한 이유는 팬은 철저하게 '관객'에 머물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의 팬은 절대 경기장에 들어가지 않는다(가끔 술에 취한 팬들이 들어가긴 하지만, 그러면 결단코 안된다). 경기의 승패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경기 그 자체에 대해선 어떤 책임도 없이 그저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마음만을 일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 그 권리를 사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으로 프로 스포츠는 운영된다.

프로 스포츠와 선수들을 사랑하는 것에선 주체일 수 있지만, 경기 그 자체에 대해선 철저한 객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론 '남의 일'. 하여 아무 말이나 할 수 있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있고, 멋대로 슬퍼하거나 기뻐할 수도 있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어떤 책임도 없기 때문에, 그것이 내 일상에 그리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그러니까 28년째 우승도 못하는 팀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그러나 이것은 나의 일
 
'혼파망'이다. 이겨도 병X, 져도 병X이라면 이긴 병X이 되자고 했던가. 프로야구와 '엘롯기'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정치 얘기다. 음주 운전자와 초보 운전자의 대결이니, 이명박과 박근혜의 재림이니,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니 하고 있다. 누구누구가 누구를 끌어들였고, 누가 페미의 꼬임에 넘어갔고, 상왕이니 성상납이니, 조폭이니 성매매니 가십 이상의 것이 아닌 말들만 난무한다. 무엇을 하겠다는 이야기는 없고, 어떤 비전도 제시되지 않는다.

아무 말의 즐거움일까. 저마다 마치 프로야구 외야 관객석의 술 취한 아저씨처럼 삐뚜름하게 앉아서 아무 말을 내어놓으며 남의 일을 구경하는 관객의 자세를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는 것이다. 정치란 무엇일까. 적어도 종로나 여의도에 사람 하나 보내 놓고 그들을 응원하거나 미워하는 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공화국을 자칭하는 사회에서라면.
 
엘지 트윈스를 처음 좋아하게 될 무렵 대선이 있었다. 기억하는 첫 대선이었는데,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돈이 많다는 재벌 회장이 출마했다. 어른들의 술상에 턱 받히고 끼어 앉아 "정 회장이 대통령이 되면 적어도 나라가 가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돈을 번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도 돈을 잘 벌 것이라는 이야기.
 

1992년 8월 12일 민자, 민주, 국민 여야 3당이 국회귀빈식당에서 대표회담을 갖고 정치문제특별위원회구성과 대통령선거법, 정치자금법개정 등 3개항에 합의한 후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중 민주당 대표, 김영삼 민자당 대표, 정주영 국민당 대표. ⓒ 연합뉴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경제가 한참이나 어려운 시절, 그 회장님 밑에서 사장을 하던 양반이 대통령에 출마했다. 그이가 대통령이 되면 이 경제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 어른들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경제 성장을 깔때기 삼아 독재를 미화하던 이의 딸이 대통령이 되면 그 경제 성장기가 다시 올 것이라 믿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이 시장이 되면, 성공한 청년 CEO가, 페미니스트가, 강직한 법조인이, 환경운동가가 무엇이 되면. 비슷한 기대와 말들은 언제나 곳곳에 있었다. 누가 무엇을 해 줄 것이란 기대 그리고 결과는 혼파망이다.
 
어느 누구에게 어떤 기대를 보내는 것은 자유이고, 또 정치인을 지지하고 신뢰하고 응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거기에 '모든 것'을 투영하는 일이나 그것으로 자기의 정치 역할을 다 했다고 여기는 것은 실은 게으름이다. 일종의 한탕주의랄까.

왜냐하면 정치는 '남의 일'인 프로야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는 한 종목의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치는 나의 삶에 영향을 주는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 정치의 주체는 국회와 청와대의 몇몇 선수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다. 프로야구와 정치가 다른 점은 우리가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고, 결과에 영향을 받고, 나의 삶이라는 형태로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프로야구의 관객처럼 선수를 앞세워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감독(혹은 단장)놀이를 해선 안된다.  
 
정치를 게임과 혼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실은 매우 많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가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고 풍요롭게 할지에 대한 고민 대신 어느 누구의 어떤 말이 내가 응원하는 정치인을 유리하게 할지를 고민한다(그것을 정치공학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스스로가 정치의 주체임을 외면하는 게으름이다. 정치에서 관객의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책임도 없이 즐거움과 슬픔만을 표현한다.

프로야구는 관객이 책임 없이 기뻐할 권리를 지불하기 때문에 선수와 감독들이 눈물도 흘리고 경질이나 연봉 삭감이라는 형태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정치는 게임이나 프로야구와 달리 결과가 자기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책임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지만 자기를 관객으로 포지션 한 이들은 책임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책임 전가의 대상, 그러니까 또 다른 적이나 또 다른 우상을 찾아 나선다.

마치 게임 속 우리 팀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듯, 혹은 올 시즌 성적이 유독 좋지 않았던 우리 팀의 어떤 선수를 탓하듯. 끊임없는 기대와 응원과 책임 전가와 실망과 '탈덕'의 반복. 그 틈에 정치는, 그러니까 우리의 삶과 사회를 조화시키고 이해를 조정하고 바로잡는 과정은 정체한다. 책임을 미루고 전가하고 끊임없이 자기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책임은 결국 스스로 지게 되는 것이다. 퇴보하고 정체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우리니까.
      
바야흐로 현피의 시간
 
정치란 무엇일까.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이다. 사전적 의미를 넘어, 정치에 대해 모두가 다른 정의를 내놓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치의 본질은 '질문'이다. 무엇이 우리의 일상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이냐는 질문, 더 나은 세계의 상상은 무엇이냐는 질문, 그리고 그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

정치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포함될 명확한 단어들이 있다. '나', '삶', '일상' 따위의 것들. 정치란 타인이 특별한 세계를 위해 그럴싸한 무엇을 하고 나는 그저 그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일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일이라는 것.
 

왼쪽부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선후보. ⓒ 오마이뉴스

 
그것이 거창한 정책이나 정세 분석, 뭐 대단한 경제전망 같은 것일 필요는 없다. 그저 나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 그 무엇에 대한 질문이면 될 일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나의 일이며 나의 결정이고 질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바야흐로 '현피'의 시간. 정치의 영역은 야구장 펜스 넘어 경기장도, 모니터 속 온라인의 세계도 아니다. 정치의 영역은 바로 지금 이곳. 당신의 일상.
 
저 멀리서 벌어지는 남의 일에 응원과 지지와 무책임한 사랑과 슬픔을 보내는 일은 그냥 프로야구에서 만족할 일이다. 현실에서마저 28년째 우승 못하는 답 없는 팀을 응원하는 건 내 삶을 너무 피폐하게 만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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