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왼쪽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토 히로부미(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완용(왼쪽에서 세번째).
 이토 히로부미(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완용(왼쪽에서 세번째).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상석에 앉은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주한 일본 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와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이 앉아 있다. 바로 옆에는 두 주먹을 불끈 쥔 한규설과 민영기가 있고, 이하영은 유약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서울 중구 정동길 41-11번지에 자리한 '중명전' 제2전시실의 모습이다.

문화재청은 중명전에 대해 "을사늑약 체결의 아픔이 서린 곳"이라면서 "을사늑약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조약으로, 대한제국 최고 통수권자인 고종의 승인이 없었다.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고 설명했다.

문화재청 말대로 중명전은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인 1905년 오늘(11월 17일) 우리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우리가 역사 시간에 '을사조약'으로 배워왔던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다. 그리고 이곳 전시관에는 실물 크기로, 당시 나라를 팔아먹는데 크게 일조했던 인물들이 전시돼 있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흔히들 '을사오적'으로 불리는 이완용(학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권중현(농상공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박제순(외부대신)을 비롯해 체결 당시에 소극적인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을사오적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나라가 망한 뒤 3대가 친일 행위를 해 본인을 포함해 아들 이규원, 손주 이종찬까지 모두 국가공인 친일파에 오른 법무대신 이하영, 을사늑약 체결 당시 반대 의견을 표명했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까지 오른 민영기도 있다.

현장에 있던 대한제국 대신 중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제에 반대 입장을 유지한 인물은 한규설 한 명뿐이다.

을사늑약 당일, 비운의 현장 가봤더니

을사늑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덕수궁에 포함됐으나 지금은 미 대사관저 뒤쪽에 위치한 독립된 건물이다. 이로 인해 덕수궁 대한문을 따라 이어진 정동길 안쪽(정동극장 뒤쪽)에 들어가야만 중명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마음먹고 찾지 않는 이상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는 뜻. 평일 오전에는 한산함이 가득한 공간이다.

을사늑약 116주년을 맞은 17일 오전도 다르지 않았다. 평일 오전의 한산함이 중명정 마당부터 전시관까지 이어졌다. 중명전 관리인 역시 "평소에도 오전에는 관람객이 많지 않다"며 "점심시간은 돼야 사람들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관리인 말대로 점심시간이 되자 정동 일대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식사 후 산책하는 코스로 중명전을 찾고 있었다. 현장에서 <오마이뉴스>를 만난 50대 직장인 정아무개씨 역시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알았지만 오늘이 을사늑약일이라는 사실은 몰랐다"며 "뜻깊은 날 동료들과 함께 와 살피게 돼 더욱 유익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명전에서 만난 다수의 시민들은 대표적 친일파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 그만큼 이완용의 행적이 화려했기 때문인데, 정부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말 이완용은 수구파의 한 사람으로 개화파를 정적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미국과의 교류가 이어지자 주미공사단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친미파로 변모했다. 당시 이완용은 대미외교 일인자로 알려져 1890년대 이조참판과 한성부 좌윤, 공조 참판과 외부협판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을 찾아서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옆 골목길 끝에 자리잡은 중명전.1905년 11월 17일 무력을 동원한 일본의 강압속에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 권우성

관련영상보기

 
1895년 10월 민왕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이완용은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주도했고 이후에는 친러파의 일원이 돼 외부와 학부대신, 농상공부 서리와 군부대신 등 직책에 임명돼 활동한다. 재밌는 점은 이때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친일세력에 맞선 친미파와 친러파라는 사실. 1890년대 말 이완용은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관파천 후 러시아는 고종에게 청구서를 내밀었고, 그것이 함경도 영흥과 길주, 삼수, 단천의 금광 및 석탄채굴권 등의 이권 요구로 나타났다. 이에 독립협회와 함께 당시 외부대신으로 활동하던 이완용은 러시아의 요구를 반대하는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에 찍힌 이완용은 중앙 정계에서 축출당하는 일을 겪기도 한다.

20세기인 1901년 2월 고종의 명으로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한 이완용은 권력의 방향을 가늠한다. 그리고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완전한 친일파로 전락한다. 이후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표 친일파의 모습을 보인다. 

1905년 학부대신에 임명된 이완용은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후 만인지상 자리인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된다. 1907년 고종의 마지막 항거였던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고종의 양위를 관철시켜 버린다. 이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앞장서 체결하고, 급기야 1910년 8월 대한의 모든 것을 일본에 넘기는 '한일합방조약'을 주도한다. 일제는 이완용의 공로를 높이 사 훈1등 백작 작위와 재물을 부여했다. 이후엔 잘 알려졌듯 호의호식하며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승장구했고, 내선일체와 일본어 보급을 독려했으며, 각종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린 채 1926년 2월 12일 사망한다.

다행인 점은 1909년 12월 독립운동가 이재명이 명동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덮쳐 그의 옆구리와 어깨 등을 순식간에 세 차례 찔러 의기를 보여줬다는 점. 이완용은 구사일생했고, 이재명은 이듬해 9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때 얻은 폐쪽의 지병이 천식과 폐렴으로 발전하여 평생 동절기마다 크게 고생했고 훗날 사망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완용의 묘는 전라북도 익산시 외곽에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폐묘돼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황이다.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박제순... 유일한 반대자 한규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사진은 을사늑약문(복제품).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사진은 을사늑약문(복제품).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이완용을 제외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은 어떻게 됐을까?

모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호의호식을 한 것이 사실이나 이완용처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살다 갔다. 물론 2009년 국가기구인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을사오적 전원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됐다. 

이완용 바로 옆에 앉았던 이지용은 을사늑약 후 일본정부가 주는 '욱일동화대수장'을 받았다. 한일병합 후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 작위를 받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돼 고액의 수당을 받았다. 하지만 1912년 1월 도박죄로 검거돼 태형 100대를 선고받고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된 뒤 귀족 예우마저 정지됐다. 그러나 각종 기부 등으로 1915년 다시 백작 작위를 회복했고 이후 1928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조선귀족회 등 친일단체에서 핵심 인물로 역할했다.

을사늑약 당시 이지용 우측에 앉은 권중현 역시 누구보다 앞장서서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다. 그러나 권중현은 의병전쟁 진압에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1907년 3월 을사오적 암살단에게 저격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남아 한일합병 직후 자작 작위를 받고 마찬가지로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돼 거액의 수당을 받았다. 1934년 3월 팔십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조선불교대회 회장, 조선사편찬위원회(1925년 조선사편수회로 개칭) 고문, 친일단체 동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유일하게 군복을 입고 을사늑약에 동참했던 군부대신 이근택은 이듬해 다른 친일파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살아남는다. 이후의 삶은 다른 친일파들과 다르지 않았다. 자작 작위를 받고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돼 1919년 12월 사망할 때까지 안락한 생을 즐기다 떠났다. 그런데 이근택이 다른 친일파에 비해 더욱 유명해진 일이 있으니 바로 그의 후손들이 2005년 선대의 친일재산을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총 9건의 소송을 진행했다는 점. 일부 패소하기는 했지만 일부 승소하기도 했다. 이 소송 이후 친일파 후손들의 땅찾기 소송이 이어졌다. 

외부대신이었던 박제순은 을사늑약에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인물이다. 늑약이 체결된 뒤엔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친일내각의 수반이 됐다. 하지만 애국지사들의 연이은 기습에 사퇴했고 이후엔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돼 활동했다. 1909년 2월 내부대신으로 재입각 후 12월에 내각총리대신이 됐고, 1910년 6월 총리대신 서리로 경찰권을 일본에 이양하는 각서에 서명한 후 8월 내부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참석해 가결했다.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 정부의 귀족으로 영화를 누리다가 떠났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1905년 11월 무력을 동원한 일제의 강압 속에 강제로 을사늑약아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서울 중구 정동길 41-11). 중명전 1층에 을사늑약 강제 체결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박제순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충청도관찰사로 근무하며 일본군과 연합해 공주 감영에 머물며 동학농민군토벌작전에 참여했다. 우금치에서는 2만여명의 동학농민군을 학살하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이 일로 박제순의 공을 기리는 공적비가 현재까지도 공주 이이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었다. 지난 2019년 공주시는 박제순 공덕비 앞에 그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반대하다가 늑약 체결 당시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됐던 한규설은 1910년 8월 한일합방 후 남작 작위가 주어졌으나 거부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칩거생활을 하다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했고 이후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중명전 제2전시실 안쪽에 참정대신 한규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작은 공간이 마련됐다. 

193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지청천과 차리석 등 제안에 따라 을사늑약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11월 17일을 순국선열기념일로 제정했다. 1997년 우리 정부는 이날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해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태그:#을사늑약, #이완용, #박제순, #권중현, #이지용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