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장군은 동지들과 뒷산에 올라가 통곡했다."
지난 29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서거 78주년 기념 특별간담회에 참석한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의 말이다.
이날은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주최로 홍범도 장군 서거 78주년 및 청산리전투 101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해봉환 전후로 쏟아지는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왜곡보도에 대응하기 위해 학술회의 전에 긴급 간담회가 마련됐다.
사회를 맡은 황원섭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부이사장은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을 계기로 이념적인 틀과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홍범도 장군을 왜곡·폄훼하는 부정적인 언론 보도가 비일비재했다"라며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오해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간담회를 마련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홍범도 장군, 자유시 참변 당시 통곡
"그(홍범도)가 자유시 참변 이전까지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독립운동을 한 업적은 그것대로 기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자유시에서의 배신은 이전의 공(功)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8월 25일)
"홍범도의 자유시 참변 참가는 '반민족행위'였고 그 이후 무장항일운동의 씨를 말린 직접적 이유가 됐다. 그는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지만 사실 그는 대한민국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소련 공산당 당원이자 소련군 대위로서 공적 생활을 마친 사람이다." (<뉴데일리> 강규형 칼럼, 8월 20일)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 전후로 쏟아진 부정적인 보도 중 일부다. 특히 한 극우언론에서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고 단정하며 "자유시에서 동족을 학살한 반민족행위에 가담한 홍범도에게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가당치도 않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다.
자유시 참변이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 인근의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벌어진 무장충돌사태를 의미한다. 당시 자유시에는 단일 군단을 조직하기 위해 한인무장부대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이들은 '대한의용군'과 '고려혁명군'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후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의 후원을 받는 고려혁명군으로의 통합이 결정됐고, 이에 반발하는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졌다. 이는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언론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주도한 이가 바로 홍범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윤상원 교수는 "항간에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 부대가 무장해제를 주도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홍범도는 동지들과 뒷산에 올라가서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며 오히려 통곡하고 슬퍼했다는 이야기가 곳곳의 기록에 등장한다"며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가 동족을 학살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사실임을 지적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고려혁명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대한의용군 포로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그런데 홍범도 역시 재판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린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윤 교수는 "홍범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불행한 선택이었지만 독립군의 어른으로서는 가장 올바른 방식이 아니었을까 한다"며 부득이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해석했다. 즉 감옥에 있는 옛 동지들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리는 등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참여했다고 본 것이다.
"자유시 사변 당시 홍범도는 끊임없이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하려고 했던 입장에서 모든 일들을 처리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통합운동에 참여했었던 독립군들이 안전하게 다시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 수 있도록 했다."
한편 홍범도 연구의 권위자인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는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시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의 후원자였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의 책임자 슈마츠키가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의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고려혁명군으로의 통합을 결정한 것이었으므로 홍범도가 이에 동의하고 말고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거치면서 통합적인 지휘부가 없는 것에 대해 반성하고 있던 간도 지역 독립군들은 마침 슈마츠키가 코민테른의 권위를 빌려 독립군 통합을 지시하니 그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홍범도는 독립군의 통합이라는 대의(大義)에 공감하고 함께 했을 뿐, 무장해제에 동의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반 교수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로 1922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종료 후 홍범도가 김동한·최진동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 군정위원회 앞으로 제출한 항의문을 들었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은 슈마츠키를 비롯한 이르쿠츠크파의 엄중한 범죄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 공산당 입당은 '요식행위'
한편 간담회에 참석한 학자들은 1927년 홍범도가 소련 공산당에 입당한 행적을 두고 '공산주의자'라며 일방적으로 매도당하는 데 대해서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먼저 반병률 교수는 "볼셰비키 홍범도, 공산주의자 홍범도라고 하는데 이는 맞는 것 같지만 틀린 것"이라며 홍범도가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맞지만 과연 홍범도가 공산주의자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홍범도가 공산당에 입당한 1927년이라는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더 일찍 입당하지 않고 굳이 1927년에 가서야 입당한 것은 공산주의를 신봉해서라기보다는 소련에서 생활하면서 최소한의 안정적 생활을 보장받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홍범도의 당시 나이가 60세인데 연금을 받기 위해 이력서를 쓴다거나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는 일련의 조치가 이뤄진다"며 "이러한 행위들은 소련에 사는 일반 주민들이 모두 하는 일상적인 생활에 불과한 것"이라고 공산주의자 논란을 일축했다.
한편 이날 윤상원 교수는 홍범도가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당시 제출한 조사표(앙케이트)를 소개했다. 조사표에서 홍범도는 대회의 참가 목적과 희망을 '고려 독립'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윤 교수는 이러한 홍범도의 답변이 함께 대회에 참가한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답변과는 구별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컨대 훗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의 경우 참가 목적과 희망을 '조선독립을 목적하고 공산주의를 희망함'으로 표기하고 있다.
윤 교수는 "대회에 참석한 공산주의자들은 대개 공산주의를 희망한다고 답변하고 있다"며 홍범도가 고려 독립만 명확히 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를 공산주의자로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날 간담회를 마무리하며 황 부이사장은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도 공산주의 활동이 아닌, 우리 동포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서도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현재의 시각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평가하면 문제가 있다. 정치적인 이념이나 정파적 색깔로 평가하지 말고 독립운동 그 자체만을 가지고 역사의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언론의 악의적 왜곡보도에 대해서는 "앞으로 기념사업회와 학계가 중심이 되어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언론이 올바른 시각을 갖고 정확한 진실을 보도해줄 것을 재차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