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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막걸리를 한 잔 걸친 김수락은 경북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다. 일제강점기 박헌영(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신한 아내 주세죽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하는 광경을 묘사한 이 노래는 김정구가 불러 '민족의 노래'로 애창됐다.

김수락은 이 노래가 자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처한 현실 같아 기분이 울적해졌다. 노래를 막 끝내려는 찰나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닷!"하는 소리가 들렸다. 움찔한 그는 잠시 후 군인들이 나타나자, "지(저는) 구장(이장)이라요"라고 인사를 했다.

지서 심부름 한 게 죄?

하지만 김수락을 아는 게 분명한 군 장교는 그날따라 차가운 눈빛이었다. "야! 연행해" 뒷결박을 당한 김수락은 군인들에게 끌려갔다. "저는요..."라고 말을 붙이려 했지만 총개머리판이 날아왔다.

그는 식전에 집을 나서 면사무소와 지품지서에 들려 마을 일을 보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지서까지는 20리(8km)로 산길이어서 오래 걸렸다. 그래서 한 번 면소재지를 나가면 하루 종일이 걸렸다. 마을 일 때문에 밤늦게 귀가하는 자신을 군인들이 오해해 연행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해서 김수락은 지품면 송천리에서 연행돼 낙평리로 끌려왔다. 낙평리 뒷산까지 가는 길에는 창백한 달빛만이 따라왔다. 군 간부의 턱짓에 병사들이 '앞에 총' 자세를 취했다. 김수락이 고함을 질렀다. "지가 죽는 이유나 알려 주시오!" "빨치산하고 내통한 죄다!" "지는 지서에 갖다 오는 (길이라요)"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왔다. 영덕군 지품면 송촌리 이장 김수락(본명 김형상, 당시 43세)은 1950년 2월 23일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해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종택에서의 매타작
 
빨치산이 자주 출몰한 수안김씨 종택
 빨치산이 자주 출몰한 수안김씨 종택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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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송천리 내목마을에 총성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주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마을 한가운데로 모여들었다. 군인들도 가가호호 다니며 사람들을 몽둥이와 총개머리판으로 때리며 집밖으로 내몰았다.

1949년 12월 31일 내목마을에서 '인간사냥'을 벌인 이들은 국군 제25연대(연대장 김종원) 제1대대 제1중대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이 빨치산과 내통한다며 주민들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날은 예전과 달랐다. 원래 큰 마을이었던 내목마을과 윗마을인 외목마을에서 소개령에 따라 피난 온 주민들 중 청·장년을 모두 잡아들였다. 이들은 수안김씨 송대파 종택(宗宅)으로 연행됐다.

종택은 커다란 기와집으로 대대손손 수안김씨 장손이 기거하던 곳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인근 야산에 빨치산이 활동하게 되면서 이 종택의 평화도 깨졌다. 밤이면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 마을 주민에게 강압적으로 식량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군인들은 김씨 종택을 '빨치산 아지트'로 여기게 됐고 인근 주민들이 빨치산을 도와준다고 여기게 됐다. 

그날 종택에 구금된 주민 30여 명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잡아가지 마세요"라며 매달리는 아이에게 군홧발이 날아왔다. 아이는 나가떨어졌다. 이어 매타작이 시작되었고, 때아닌 곡(哭)이 종택에서 울렸다.

김수왈(당시 37세)은 군인들에게 "왜 묶어가느냐!"고 항의했다가 다리골에서 소나무에 묶여 총살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군 주둔지로 쓰이던 원전국민학교로 이송되었다. 연행된 주민들은 다음 날인 1950년 1월 1일 각별계곡에서 군인들에 의해 집단 학살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수근(80세, 경북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은 형 김수용(당시 28세)과 육촌형 김을출(당시 24세, 본명 김두경)을 잃었다. 김을출은 처가에 갔다가 마을에 난리가 났다는 소문에 집으로 오다 군인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대한민국 만세!!!"
 
군 주둔지로 사용되었던 원전국민학교 터
 군 주둔지로 사용되었던 원전국민학교 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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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 부대는 원전국민학교에서도 취조를 계속했다. 1950년 1월 1일 아침, 군인들은 연행한 주민들을 아침도 먹이지 않고 한 명씩 불러 교실에서 취조했다. 불려 간 김장수에게 군인은 말했다. "빨치산에게 무엇을 줬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빨치산을 만나기는 한 거네?" "..." 김장수에게 몽둥이가 날아왔다. 등에 한 대, 다리에 세 대를 맞은 그는 '개구리가 쭉 뻗듯이' 실신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끝까지 빨치산과의 관계를 부정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송천리 주민 김수환은 전날 날평리 민보단장 이상용이 데리고 온 군인에 의해 연행되었다. 군인들은 마을 공터에서 '빨갱이를 색출하라'며, 김수환을 죽지 않을 정도로 팼다. 그래도 김수환이 입을 열지 않자, 군인들은 주민들을 구타했고 팔목을 묶어 원진국민학교로 데려갔다.

다음날 김수환과 마을 사람들은 각별계곡 앞으로 끌려갔다. 여기 각별계곡이 그들의 무덤터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김수환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군 장교의 "뭐야?"하는 소리에, 그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유언을 할 기회를 얻은 김수환은 "대한민국 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만세삼창을 하고 나자 젊은 중대장은 부하들에게 "풀어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른 젊은이 10명이 살아났다. 윤병호는 갖고 있던 돈 2000환을 군인들에게 주고 살아났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각별계곡 앞에 선 김수락의 아들 김달호(영덕유족회 회장)
 각별계곡 앞에 선 김수락의 아들 김달호(영덕유족회 회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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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군의 '작은 전쟁'

'김달삼 부대'로 명명된 제3병단 빨치산들은 1950년 1월 21일 영덕군 영해지서를 습격해 경찰관을 살해하고, 영해금융조합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들은 영해 서부초등학교 교장을 비롯해 다수의 우익인사를 살해하고 많은 민가를 파괴하고 방화했다.

이러한 영덕군의 좌·우 투쟁은 194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봉기는 전국으로 급속 확산했다. 영덕 달산면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달산면 좌익 지도자들은 10월 4일 가을운동회가 열리는 달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위를 펼쳤는데 2명이 사망하고 건물 5동이 파괴됐다.

경북 영덕에서 좌익 운동이 활발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제강점기부터 좌익 활동을 한 이경석이 이부암, 권병술, 권병희 등과 함께 1945년 12월에 인민위원회와 관련된 여러 단체를 결성하고 지역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또 영덕군 남정면 출신의 이기석은 남로당 중앙위원을 맡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강구면 출신 박종화는 1950년 5월 생포될 때까지 스스로 '강철 부대'라 명명하고 대둔산과 동대산을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했다.(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10월 항쟁을 기점으로 영덕군 좌익들은 인근 대둔산과 동대산, 주왕산을 근거지로 유격대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1949년 9월 24일 새벽 5시에는 빨치산들이 지품지서(지서장 노도술)를 습격해 1명이 사망하고, 지서 건물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군은 1949년 9월 28일 충북 단양에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이성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빨치산 토벌에 나섰다.

군은 빨치산과 주민과의 연계를 차단하기 위해 소개령을 내렸다. 그리고 빨치산 출몰 지역에서는 민간인을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했다. 영덕에서의 한국전쟁은 1950년 이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전쟁'의 결과,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5일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영덕에서는 빨치산 86명 사살에다 229명 생포, 경찰관 33명 사망, 청년단원 등 민간인 26명 사망이라는 참극이 일어났다.

아버지의 악행에 죽음 택한 아들

가장 큰 피해자는 이념과 상관없는 지역 주민들이었는데, 특히 산악지역이었던 지품면, 영해면, 창수면의 피해가 컸다. 지품면 송촌리 구장을 맡았던 김수락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40년부터 이장을 하며 마을을 위해 봉사해왔다. 소로길을 확장해 마을 길을 만드는 일부터 수년에 걸쳐 마을 저수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마을 천수답이 수리안전답으로 변모했다.

소개령이 내려진 1949년에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안전하게 아랫마을인 내목마을로 피난가게 하고, 김수락 자신은 종택을 지킨다며 외목마을에 남았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면사무소와 지서에 오가며 마을 주민들을 위해 일을 했다. 때문에 그는 새벽에 면소재지로 나가 밤이 되어서야 되돌아오곤 했다. 군인들 눈에는 영락없이 빨치산과 내통하는 걸로 보였고 그는 합법적인 절차 없이 처형당했다.

김수락 집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지품지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빨치산들이 어디 있어?" "몰라요." "빨갱이 마누라가 그것도 몰라!" 지품지서장 노도술은 김수락의 아내 김분례를 고문했다. 그녀는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1년 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전후 영덕군 여러 곳에서 지서장을 하며 빨갱이 색출 작전에 앞장섰던 노도술.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진다. 그의 아들 노재민(가명)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지품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버지 노도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말들이었다. 견디지 못한 그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때도 노도술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따라다녔다. 결국 노재민은 아버지의 악행을 원망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태그:#김종원부대, #노도술, #빨치산, #대둔산, #각별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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