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8.11 07:25최종 업데이트 21.08.1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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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릇 내가 맹글었어요."

들릴락 말락 한 나지막한 소리가 내 귀를 잡아당긴다. 할머니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도자기 뒤에 서 계신다.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 앞에 놓인 도자기들을 보니 모양은 투박하지만 결은 섬세하고 아무렇게나 생겼지만 색이 참 곱다.
  

운곡습지 주변 마을이 여는 오배이장터 호암마을 할머니들이 투박한 도자기를 만들어 판매한다. ⓒ 최수경

 
호암마을 할머니들은 증손자 목욕시키듯 애지중지 주물러 만든 도자기를 갖고 나왔다. 내가 볼 때 조선 이삼평(일본의 도자기 아리타도기의 도조로 추앙받는 한국 출신 도공)의 아리타 도자기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런데 뭐가 부끄러우신지 당신들의 작품에 겸손하시다.
  

호암마을에서 사온 생활도자기 접시 하나에 3천 원. 할머니는 그것도 비싸다고 더 깎아주셨다. ⓒ 최수경

 
환경교육을 전공한지라 국가 생태관광지 컨설팅과 주민 교육을 하러 전국 곳곳을 다닌다. 생태관광지는 환경적으로 보전 가치가 있고,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체험하고 교육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환경부가 지정하고 지자체와 지역협의체가 운영한다.
 

전남 신안군 영산도 국가 생태관광지로 명품마을이다. ⓒ 최수경

 
이 제도는 관광 수용력을 초과하는 일부 왜곡된 관광 산업으로부터 자연환경 훼손을 줄이고자 생겼다. 보호지역은 규제지역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보전의 가치를 통해 지역 활성화와 경제 자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국가 인증을 받은 생태관광지역이니 관광객들에게 품질을 보장할 수도 있다.
 

제주 동백동산 내 곶자왈 대표적인 국가생태관광지이자 생태관광 성공 모델 지역이다. ⓒ 최수경

  

울진 왕피천 계곡 생태경관보전지역이자 생태관광지역이다. ⓒ 최수경

 
2021년 기준 전국에 환경부가 지정한 생태관광 지역이 31곳 있는데 대부분 이런 곳들은 생물 자원과 경관 자원이 있는 보전지역 중심이다. 이러한 지역에 출장을 가면 일터가 곧 쉼터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을 만큼 나는 복이 많다.
  

고창군 운곡습지 오베이장터 오베이는 운곡습지 인근 6개 마을을 칭하는 사투리다. ⓒ 최수경

 
전북 고창군 고인돌박물관에서 운곡습지로 가는 길목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베이장터가 열린다. 오베이는 운곡습지 인근 6개 마을을 칭하는 사투리다. 마을마다 농사 지은 재료로 만든 먹을거리와 수공예품을 내놓는데 물건도 좋고 가격도 착하다. 오베이장터는 작은 장터, 정의로운 장터, 그리고 따뜻한 장터, 즐거운 장터다. 앞서 말한 도자기는 호암마을 할머니들이 만들어 내놓은 것이다. 호암마을은 과거 한센인들과 그들을 돌보던 수녀님들이 살던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창 운곡 람사르습지 운곡습지를 포함한 고창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운곡습지 주변 6개 마을은 생태관광지 모델 마을이 되었다. ⓒ 최수경

 
운곡습지는 과거 150가구가 살던 지역에 영광원전의 냉각수를 공급하는 댐이 생기면서 마을과 논이 수몰된 곳으로 인간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동안 원시 밀림과 같은 비경의 습지가 되었다. 이곳의 다랑논 저층 습지는 생태계가 회복되어 생물다양성의 보고가 되었다.

이에 습지보전지역으로 지정되고 람사르습지에 등록됐으며 운곡습지를 포함한 고창 지역 전체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운곡습지 주변 6개 마을은 생태관광지 모델 마을이 되었다.
  

정읍 월영습지 자연환경해설사가 월영습지를 안내하고 있다. ⓒ 최수경

   
전북 정읍시의 월영습지도 비슷한 사례다. 배고프던 시절 쌀이 나는 곳으로 자식을 시집보내면 혼인 잘 시키는 것이었다. 산중 마을은 흔히 감자·옥수수나 먹고 살까 하지만 이곳은 산중 골짝인데도 황금 들녘 부럽지 않은 논이 있었다. 산 정상부터 골짜기를 타고 형성된 분지형 저층 습지가 다랑논으로 이용되어 산 깊은 곳까지 쌀농사로 풍요로운 집들이 들어앉았다.
 

월영습지 내에 농경을 하던 농기구가 그대로 있다. 전통적 자연 및 문화경관을 보전하는 것이 생태관광의 원칙이다. ⓒ 최수경

 
세월이 흘러 마을도 사람도 늙어 방치된 폐 논은 생물다양성의 보고가 되었다. 이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정읍사 옛길의 솔티숲과 함께 환경부 지정 국가생태관광지가 된 것이다. 솔티숲 소나무 옛길을 맨발로 걷다 보면 한참 복원 중인 월영습지가 은둔의 커튼을 걷고 눈 앞에 펼쳐진다. 이쯤 되면 영화 <아바타>의 판도라 행성에서 나비 족이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연상하곤 한다.
  

큰월영습지 가는 길 복원중인 월영습지는 옛 사람들이 지나던 길답게 아름드리 나무가 숲길을 이룬다. ⓒ 최수경

 
금강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 안터마을 반딧불이는 5초마다 반짝인다. 어떤 이는 치유라고 하는데 치유는 인간중심의 사고다. 인간과 반딧불이는 생태계 지위만 다를 뿐 동격의 생명이다. 자연의 질서는 상생이다. 인간이 반딧불이 서식 환경을 보존한 만큼 인간은 치유의 대가를 얻은 것이다. 상생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안터마을이 실천한 것이다.
       

안터마을의 반딧불이 매년 5월 초 전국에서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 알음알음 찾아 와 반딧불이 잔치를 즐긴다. ⓒ 자연환경국민신탁

 
수변구역 마을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규제를 받는다. 안터마을도 마찬가지다. 수질오염을 막기 위해 환경 보전을 전제로 농사를 짓는다. 농약과 비료를 줄이고 제초제보다는 풀베기 방식으로 논 습지를 관리한다. 이런 보전 활동 덕분에 반딧불이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풀을 깎은 안터마을의 논두렁. 조금씩 조금씩 주민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다. ⓒ 최수경

   
자정에 가장 활발한 반딧불이를 보고 있노라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반딧불이가 떠오른다.
    

보전협약제도를 이용하는 대청호반의 옥천 안터마을 일부 농지들. 환경부는 수계법에서 정한 지역의 토지를 매수하고 있으나 모든 대상의 토지를 매입할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여건이다. 소유권 취득을 통한 보전이 아닌 보전협약제도는 국민신탁법 제19조(보전협약)를 이용해 주민이 자발적으로 환경보전 활동을 하도록 한다. ⓒ 윤순태

   
안터마을은 지난 12년 전부터 소리소문없이 마을 수용력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반딧불이 잔치를 해왔다. 코로나로 2년간 잔치를 못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주민들이 잔치국수도 내오고, 모닥불에 가래떡을 굽고, 반딧불이가 나올 때까지 환경 영화를 상영하는 등 아기자기한 잔치를 벌여왔다.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둔주봉에서 바라본 거꾸로 된 한반도 지형 연주리 배바우마을 뒷산의 둔주봉과 피실길은 배바우마을 주민들이 백년을 내다보고 하는 생태박물관 만들기의 소중한 자원이다. ⓒ 최수경

       
비단 안터마을뿐만 아니라 함께 생태관광지구에 포함된 옥천의 안남 배바우마을도 백 년을 내다보는 생태박물관 만들기를 15년 전부터 시작했다. 마을협의체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생태관광지로 성장했다. 마을 신작로에 제비가 맘 놓고 둥지를 틀고, 주민자치가 손꼽히게 잘 되어 전국에서 사례 견학을 온다. 마을 뒷동산에 오르면 거꾸로 된 한반도 지형을 볼 수 있고, 수몰되기 전 읍내 장과 연결된 피실 나루터와 강여울 이야기 등 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옥천군 안남면 우체국 아래 둥지를 튼 제비 현재 우체국이 면사무소로 이전했지만, 마을 큰길은 온통 제비집이다. ⓒ 최수경

 
금강을 따라 옥천군 안터마을과 배바우마을을 잇는 지역은 생물 자원과 경관 자원이 풍부하고, 탄탄한 인적 자본을 갖춘 데다가 자연환경 보전에 대한 주민 실천이 남달라 2021년 국가생태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옥천 안터-배바우지구 생태관광지에 속한 피실나루터를 트레킹하는 모습. 수몰되기 전 읍내 장과 연결된 피실 나루터와 강여울의 문화 이야기가 풍부하다. ⓒ 김성선

 
그간 보전은 규제를 동반하다 보니 주민과 관의 갈등이 컸다. 그러나 지속가능 발전을 강조하면서 보전과 규제 위주에서 보전과 이용이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자연환경보전정책이 바뀌었다. 지역 주민이 보전의 주체가 되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대청호 옥천군 안터마을 반딧불이 서식지 지속가능 발전을 강조하면서 보전과 규제 위주에서 보전과 이용이 조화를 이루는 쪽으로 자연환경보전정책이 바뀌었다. ⓒ 윤순태

 
도시화와 고령화로 농촌의 내일이 암울하다고 한다. 일 할 사람 없고, 내 몸 안위가 걱정스럽다 보니 자연환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자연환경을 방치하지 않고 보전으로 선회하여 마을의 활로를 찾아 성공한 예는 많다. 더욱이 환경 감염병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면서 대규모 관광에서 소규모 자연친화적인 생태관광으로 소비자의 욕구가 변하고 있다. 
 

옥천 안터마을 논으로 일하러 가는 오리들 반딧불이 보전을 위해 주민들은 오리농법으로 농사짓고 있다. ⓒ 전재경

 
생태 농사가 올 가을 당장 쌀독에 쌀을 채우지는 못하겠지만, 백 년 자손들은 차오른 쌀독에 내리내리 부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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