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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김재현 기관사(가운데)와 증기기관차 석탄 공급용 삽을 쥔 현재영 보조기관사(오른쪽), 그리고 '통표'를 든 황남호 보조기관사(왼쪽)
 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김재현 기관사(가운데)와 증기기관차 석탄 공급용 삽을 쥔 현재영 보조기관사(오른쪽), 그리고 "통표"를 든 황남호 보조기관사(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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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등이 6.25 당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참여해 순직했다고 소개한 고 김재현 철도기관사가 참여한 작전은 사실상 딘 소장 구출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 김재현 기관사의 사망일도 7월 19일이 아닌 7월 20일로, 김 기관사가 몰던 기관차도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3-219호'로 재확인됐다.

그동안 지역에서 김 기관사 등이 투여된 작전이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작전일도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왔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쾌한 자료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훈처는 지난 19일 6.25 전쟁영웅인 고 김재현 기관사 유족의 자택(대전광역시 동구)에 '국가유공자 명패'를 달았다. 미국 국방성은 지난 2012년 고인인 김 기관사에게 특별공로훈장(특별 민간봉사상)을 수여했다. 미 국방성이 미군을 위해 공헌한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격으로, 한국인 수상자는 고인이 처음이었다. (관련기사 : 6.25 전쟁영웅 김재현 철도기관사에 '국가유공자 명패' http://omn.kr/1ugu1)

2015년 대전 동구청은 철도공사와 함께 대전역 동광장 앞에 '기적을 울리는 사람들' 기념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에는 기관차의 기적을 울리는 김 기관사와 같이 작전에 참여해 다친 황남호 보조기관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사가 각각 묘사돼 있다.

보훈처 "민간인으로 '딘 소장 구출 작전' '군수 물자 후송' 참여"

보훈처가 밝힌 김재현 기관사의 공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재현은 대전철도국 소속 기관사로 1950년 7월 19일 북한군이 점령한 대전역으로 가서 '미군 제24보병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딘 소장은 한국 정부 수립을 도왔던 군정장관을 역임했다 - 기자 주).

작전 중 대전 세천터널 부근에서 매복한 적의 공격으로 미군 27명이 전사하고 김재현 기관사도 전신에 8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현재영 부기관사도 팔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고, 황남호 부기관사가 기관차를 운전해 옥천역까지 퇴각했다. 이들의 희생은 병력, 군수물자 및 피난민을 수송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힘이 됐다.

그의 공적은 '1950년 7월 19일 민간인 신분으로 미군 결사대와 함께 딘 소장 구출 작전과 군수 물자 수송에 참여해 기관차를 몰다 순직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김 기관사는 보훈처에서 선정한 '2020년 5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1983년 철도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장교묘역에 안장됐고, 현재영은  2010년 국립대전현충원에, 황남호 부기관사는 2011년 국립임실호국원에 각각 안장됐다.

그런데 김 기관사가 투여된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굴됐다. 

[순직일] 임재근 소장 "7월 19일 아닌 7월 20일"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에는 순직일이 1950년 7월 19일로 돼 있다.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에는 순직일이 1950년 7월 19일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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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작전일(순직일)이 '1950년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
 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작전일(순직일)이 "1950년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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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내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장은 지난 20일 대전 원동에서 개최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재검토' 주제 발표를 통해 이 같은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우선 김 기관사가 사망일과 직결된 작전일은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한 날은 7월 20일이었고, 이날 오후까지 딘 소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전역 작전을 시도한 날은 7월 19일이 아닌 20일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지만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1962년 현장(대전시 판암동)에 세운 '김재현 순직비'와 현충원 묘비에도 사망일이 7월 19일로 표기돼 있고, 작전에서 살아남은 현재영·황남호 보조기관사가 1983년 직접 작성한 경위서에도 '7월 19일 오후 5시쯤'으로 돼 있다.

이와 관련 이날 임 소장은 "1953년 교통부가 펴낸 <한국교통동란기> 자료를 보면 '7월 20일'로 표기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교통동란기>(교통사편찬위원회)에는 "19일에는 (대전에) 약간의 군인과 잔류원이 남았을 뿐이고 20일에 딘 소장과 미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중략) 참혹한 주검을 당한 김재현군과 부상한 현재영, 구사일생한 황남호군..."으로 기재돼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직후 여러 관계자를 인터뷰해 서술됐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높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년 미 육군성 발행)에도 "대전역에 도착했지만 곧바로 옥천으로 되돌아가게 됐고, 그 때가 7월 20일 오후 16시 45분"이라며 "세천터널 부근에서 적의 수류탄 투척과 총격을 받아 기관사가 죽었고, 화부가 기관차를 운행하여 옥천역에 닿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날 임 소장은 이보다 더 결정적인 자료를 제시했다. 작전을 수행한 당시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다. 미 24사단 사령부 정보참모부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에는 "(...)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상처를 입었고...(중략) 기관차가 심하게 총격을 받은 상태로 들어왔다.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보고서에 기재된 보고일시도 '7월 20일 19시 7분'으로 돼 있다. 이 보고서는 작전을 직접 수행한 미 24사단의 현장 보고서라는 점에서 사실관계를 가장 잘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임 소장은 "작전 일과 김재현의 순직일은 기존 알려진 19일이 아닌 20일이 분명해 보인다"며 "19일로 잘못 알려진 것은 1962년 순직비를 세우면서 잘못 기재했고, 당시 언론이 정부 발표자료를 근거 삼아 19일로 보도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작전 목적] 작전 보고서 "장비 실린 화차 끌기 위해 대전으로"
 
작전을 수행한 미 24사단 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 이 보고서에는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목적도 "장비가 실린 화차(화물 객차)를 싣기 위해(끌기 위해)"라고 적혔다.
 작전을 수행한 미 24사단 사령부의 정보참모부(G-2)가 당시 철도운송사령부에 보낸 보고서. 이 보고서에는 "시각은 대략 20일 16시 45분경"이라고 돼 있다. 목적도 "장비가 실린 화차(화물 객차)를 싣기 위해(끌기 위해)"라고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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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목적도 그간 알려진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었다. 작전에 참여한 인원도 30여 명이 아닌 6명으로 추정된다.

<한국교통동란기>에는 "이원에서 미군 30명을 태우고 행방불명된 딘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대전으로 향했으나 가는 길에 총격을 받았고, 되돌아오는 길에 또다시 총격을 받아 김재현이 즉사하고 미군결사대 대부분도 전사했다"고 기록됐다. 

현재영·황남호가 1983년 작성한 경위서에도 "딘 소장 구출을 위해 미군 결사대 30명과 함께 이원역을 출발, 미군 30명을 기관차 탄수차 위에 태우고, 탄수차 위에 기관총을 설치했다"고 밝혔다. 보훈처 등이 밝힌 공적 내용과 같다.

하지만 1954년 뉴욕에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와는 다르다.
 
7월 20일 미군 제24사단 수송 장교 햇필드(Raymond D. Hatfield) 대위는 사단의 보급품이 적재된 대전역의 화물열차를 후방인 영동으로 후송하고자 했으나, 한국인 기관사들이 기관차만 분리해서 도주했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이에 딘 소장은 영동에 있는 사단본부에 연락해 기관차를 다시 보낼 것을 지시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하자마자 되돌아갔다. 딘 소장이 그 이유를 묻기 위해 영동의 사단본부로 연락했을 때 기관사가 저격당해 죽고, 화부(fireman) 혼자 기관차를 몰고 돌아왔다는 회답을 들었다.

미국 육군성(1961) 자료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
국방부(1979) 자료 "분명한 건 '딘 소장 구출'은 사실 아니다"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았다는 얘기다. 이 기록대로라면 작전은 딘 소장이 실종되기 전에 시작됐고,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이 아닌 '군수물품을 실은 화물열차 후송'이었음을 보여준다. 딘 소장은 20일 오후 옥천 방향으로 퇴각 도중 금산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가 북한군 공격으로 차량이 전복돼 실종됐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미국 육군성이 발행한 <남쪽은 낙동강, 북쪽은 압록강>(원제,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961)에도 "20일 16시 전후에 딘 사단장 명령에 따라 16시 20분에 열차가 이원역을 출발했다"며 "호송병들과 함께 대전역으로 갔는데 이는 대전역의 보급화차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딘 소장의 지시에 의해 화차를 끌기 위한 것'이라는 앞의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의 주장과 같다.

특히 한국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역작전기>(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79)에서 한국교통동란기(1953, 교통부 발행)와 당시 보조기관사였던 현재영의 증언과 앞의 미 육군성의 자료를 모두 검토한 후 "내용이 서로 상이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차 작전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536쪽)고 못 박았다.

작전에 직접 참여한 미 24사단 사령부 소속 병참부대원이 20일 정보참모부(G-2)로 보낸 당시 보고서에는 작전의 목적이 더 분명하게 적시돼 있다.
 
16시 30분경 : 우리는 장비가 실린 화차(화물 객차)를 싣기 위해(끌기 위해) 대전으로 가는 기관차를 탔다. 대전에 도착하기 전에 있는 마지막 터널(세천터널 - 기자 주)을 지났을 때 자동화기로 총격을 받았다(...) 기관사가 기관차가 너무 많이 손상을 받아 어떤 화차도 끌 수가 없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 같은 터널(세천터널) 근처에서 심한 총격을 다시 받았다...(중략) 기관차가 손상됐고 주위를 보니 옥천에 도착해 있었다.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부상을 당했다.

작전 목적이 화물열차를 끌어오기 위한 것임을 말해준다.

[참여 인원] 30여 명 아닌 6명?

 
1954년 뉴욕에서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 이 자료에는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54년 뉴욕에서 출판된 <장군 딘 이야기(GENERAL DEAN STORY)>. 이 자료에는 대전역에 기관차를 보내라고 지시한 사람이 딘 소장이고, 김재현 기관사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도 딘 소장이 직접 보고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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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는 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들의 이름도 명시돼 있다. 모두 6명(스몰우드 하사, 르모앙 상병, 맥컬럼 상병, 슈와르츠 상병, 시콜라 일병, 마호니 이병)이다. 보고서에는 "열차 경비병들은 적군의 총에 맞았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스몰우드 하사는 엔지니어가 총에 맞은 후 기관차를 통제했으며, 총알구멍을 통해 배출된 증기로 인해 기관차가 멈춘 곳까지 기관차를 안전하게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관련 보고서에도 "기관사는 사망했고, 화부는 부상을 당했고, 엔진 위에 있던 병사들은 안전하다"고 적혔다.

임 소장은 "작전에 투여된 미군은 30여 명이 아닌 6명이고, 미군 사망자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실제 같은 날 24보병사단 사령부의 의무일지에도 기관사와 화부 사망 외에 미군 사망자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기관차 이름] '미카3-129호' 아닌 '미카3-219호'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에 있는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안내문과 안내 사진. 하지만 당시 작전에 투여된 증기기관차는 129가 아닌 미카형 증기기관차 219호였다.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에 있는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안내문과 안내 사진. 하지만 당시 작전에 투여된 증기기관차는 129가 아닌 미카형 증기기관차 219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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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대전현충원 전시안내물을 비롯해 대부분 자료에 작전에 투여된 기관차가 '미카3-129 증기기관차'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투여된 기관차는 열차번호가 전혀 다른 '미카3-219호'로 확인됐다.

앞의 <한국교통동란기>에도 당시 기관차를 'M3 219호'(미카3-219호)로 기재됐다. 작전에 참여한 황남호 보조기관사 역시 생전 경위서에 "당시 운전했던 기관차 '미카3-219호'는 김천 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전후 수송업무에 한 후 20여 년 사용됐으나 디젤화로 폐차됐다"고 밝혔다. 관련 기관이 작전에 투여된 '미카3-219호'가 폐차돼 전시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편의상 남아 있는 '미카3-129호'로 바꿔 전시·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순직일·작전 목적·기관차 열차명 수정해야"

임 소장은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순직한 김 기관사 등의 공로를 인정해 추모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사망일을 19일에서 20일로 수정하고, 작전 목적도 '딘 소장 구출'에서 '화물열차 후송'으로, 투여된 기관차도 '미카3-219호' 정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기관사 순직과 미카3-129호 관련 조형물로는 기관사 김재현 순직비(1962년), 서울현충원 묘비(1983년), 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2013년), 대전 동광장 앞 '기적을 만드는 사람들' 동상(2015년), 서울현충원 유품전시관(2015년), 대전 역전지하상가 앞(대동천 동서교 인근) 열차 모형(2020년) 등이 있다.

보훈처에 따르면 김 기관사와 함께 철도 종사자로써 당시 교통부의 비상동원령에 따라 피란민, 병력·군수물자 수송이라는 임무로 6.25 전쟁에 참전한 분들은 약 1만9300명이며, 이 중 287명이 전사했다.

태그:#딘 소장 구축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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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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