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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지내다 보니, 그날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네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주말의 비 내리는 오후, 오키나와 출신의 아리메 유우리(有銘佑理)씨는 23일 '위령의 날(慰霊の日)'이 언급되자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6월 23일은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수비대를 지휘했던 우시지마 미츠루(牛島 満) 사령관과 조 이사무(長勇) 참모장이 은신 중이던 동굴에서 할복자결한 날이다. 미군에 대한 일본군 수비대의 조직적 저항이 사실상 종식됐던 이 6월 23일을 오키나와 현에선 공휴일로써 '위령의 날'로 제정하고 전몰자에 대한 추도 사업을 이어왔다.

주민 49만명 중 12만명 희생... 무거운 6월 23일
 
인터뷰에 응한 아리메 유우리 씨가 미군 포탄 파편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포탄들이 주민들에게 쏟아졌던 당시의 비극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철의 폭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의 포탄 파편 인터뷰에 응한 아리메 유우리 씨가 미군 포탄 파편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포탄들이 주민들에게 쏟아졌던 당시의 비극을 오키나와 사람들은 "철의 폭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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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시에 따르면, 전투 직전 오키나와 현의 인구는 약 49만 명으로, 그중 12만 여 명의 주민이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 주민 4명 중 1명이 희생된 것이다.

인터뷰에 응한 아리메 씨 또한 오키나와 전투 희생자 유족이다. 군인으로 동원됐다가 전사한 증조할아버지를 비롯해, 그녀의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아리메 씨뿐 아니라 오늘날의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있어 오키나와 전투는 가족사를 뿌리째 뒤틀어버린 거대한 재앙으로 기억된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있어 오키나와 전투 전몰자를 추도하는 6월 23일 위령의 날의 의미는 형언할 수 없이 무거운 것이리라.

어째서 이토록 많은 주민들이 전투에 휘말려 생명을 잃게 된 것일까. 유혈이 낭자한 이 비극적 사태는, 주민의 안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일본군 수비대의 작전 방침으로부터 초래됐다.    
 
천황은 일본 국체의 핵심이자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우상화되었다. 천황제 유지는 제국 일본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종전 조건이었다.
▲ 쇼와 천황을 우상화하는 전시간행물 천황은 일본 국체의 핵심이자 육해군의 통수권자로서 우상화되었다. 천황제 유지는 제국 일본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종전 조건이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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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태평양 전쟁 말기,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도 제국일본의 지도부는 비합리적인 상황인식 하에서 '본토결전'과 '일억옥쇄'를 부르짖으며 전쟁완수를 결의했다. 그들이 논하던 전쟁완수의 궁극적 목적은 '국체의 보전'이었다. 국체의 보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본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일계'의 천황제(일왕제) 유지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존재에 신성성을 부여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했던 제국 체제는, 천황제 사수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든 치를 심산이었다. 이미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천황과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야 한다고 교육 받았던 일본 국민들은, 이 '국체보전'을 위한 싸움에 동원돼 무의미한 희생을 강요 받았다(관련 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이 사진이 촬영된 다음날, 이들은 오키나와 근해에 전개한 미 함대에 자폭하기 위해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였다. 중앙에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년은 '아라키 유키오' 오장(하사)이다. 향년 17세.
▲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된 육군 특공대원들 이 사진이 촬영된 다음날, 이들은 오키나와 근해에 전개한 미 함대에 자폭하기 위해 전투기를 몰고 출격하였다. 중앙에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년은 "아라키 유키오" 오장(하사)이다. 향년 17세.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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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의 인물이 우시지마 사령관, 중앙에 지휘봉을 들고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조 참모장이다. 이들은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자 미군에게 항복을 거부하고 남은 부하들에게 "마지막까지 싸우라"는 유훈을 남긴 채 자결했다.
▲ 작전회의 중인 오키나와 수비대 사령부 가장 왼쪽의 인물이 우시지마 사령관, 중앙에 지휘봉을 들고 설명하고 있는 인물이 조 참모장이다. 이들은 전투가 막바지로 치닫자 미군에게 항복을 거부하고 남은 부하들에게 "마지막까지 싸우라"는 유훈을 남긴 채 자결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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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제국일본의 지도부는 국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전쟁 완수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미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일본 본토로는 최초로 이오지마가 함락당한 데에 이어, 1945년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도(本島)에 미군이 상륙했다. 대본영(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에서는 오키나와 방어를 위해 전함 야마토(大和)를 출격시키는 한편 2000여 기의 가미카제 특공기를 투입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본영의 무리수는 비극을 더욱 가중시켰을 뿐, 오키나와를 구원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군의 공세로부터 오키나와를 방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처음부터 분명해진 상황에서, 오키나와 수비대를 책임진 우시지마 사령관은 작전의 주안점을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닌 '미군에게 최대한의 출혈을 강요하는 지연전'에 맞췄다.

이 방침에 따라 일본군 수비대는 요새화된 진지들을 중심으로 미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의 저항에 다수의 주민들이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중학생들까지 이등병 계급을 부여받고 군복을 입었다. 여학생들 역시 동원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못했으니, 그것이 그 유명한 '히메유리 학도대'다.

그러나 이 같은 절망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미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나날이 뒤로 밀렸다. 마침내 일본군 수비대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던 슈리 성에서의 결전이 임박하게 된 상황. 그러나 일본군 사령부는 미군과 결전을 벌이는 대신 주력을 오키나와 본도 남부로 옮겨버렸다. 하루라도 더 저항해 미군의 발을 오키나와에 묶어둔다는 지연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피란민들로 가득 차 있던 섬 남쪽으로 일본군 병력들이 물러나고 곧이어 미군의 공격이 쇄도해오자, 재앙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오키나와에서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지의 중학생들까지 '이등병'으로 전투에 동원하였다.
▲ 미군의 포로가 된 오키나와 소년병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지의 중학생들까지 "이등병"으로 전투에 동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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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일본육군 군조(중사)였던 오오바 소우지로씨가 주민들을 동굴에서 쫓아냈던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증언하며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다. 2008년 인터뷰 내용.
▲ 주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던 일본군 병사의 증언 전 일본육군 군조(중사)였던 오오바 소우지로씨가 주민들을 동굴에서 쫓아냈던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 증언하며 죄책감을 드러내고 있다. 2008년 인터뷰 내용.
ⓒ NHK 전쟁증언 아카이브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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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병력들은 동굴에 숨은 주민들을 쫓아내어 그곳을 은신처로 삼고, 필요에 따라서는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살해했다. 어디까지나 '작전'을 위해서였다.

어느 순간부터 일본군 수비대에 있어 주민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작전에 걸리적거리는 의심스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됐다. 일본군 수비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주민들은 대책 없이 전장의 한복판에 내던져져 희생됐다. '국가'에 '국민'은 없었던 시대. 오키나와에서의 참극은 그렇게 연출됐다.

그로부터 76년이 흘렀지만, 당시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던 오키나와 주민들이 품고 있는 상처는 아직 선명하다.

아리메 씨는 "그나마 군인 유족들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의 수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일반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며 오키나와 전투의 뒷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녀는 특히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를 언급하며, 당시의 끔찍했던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이야기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비하면 오키나와에 대한 일본 본토 사람들의 관심은 옅은 편이죠. 그러나 오키나와에서의 전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결과 섬에는 미군기지가 들어섰고, 그곳의 주민들은 터전을 잃었어요. 전쟁으로 상처입은 주민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많은 갈등과 혼란을 겪고 있어요.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미국에 저자세를 취할 뿐, 주민들이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죠. 전쟁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을 버렸던 제국 정부가 연상되지 않나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시간만으로 모든 것이 치유되지는 않는 법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전쟁 이야기를 들으며, 국가의 책무, 평화의 의미, 문장으로 담지 못한 여러 화두들이 슬프게 뒤엉켰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 미군지기로 뒤덮힌 오늘날의 오키나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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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키나와 전투, #일본군, #태평양 전쟁, #미군기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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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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