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저마다 특별한 고유의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스파이더맨은 몸에서 거미줄을 발사하며 공중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헐크는 흥분하면 녹색괴물로 변신해 엄청난 괴력으로 적들을 무찌른다. 이렇다 할 초능력이 없는 아이언맨은 천재적인 두뇌와 무기 팔아 번 막대한 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병기로 만들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돌연변이 집단 엑스맨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꼭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865년에 출간된 아동소설 <한스 브링커>에서는 네덜란드의 한 소년이 댐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고 손가락과 팔뚝, 그리고 온 몸을 이용해 큰 홍수를 막아냈다. 나라를 잃어 꿈도 희망도 없던 시절,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일제에 맞서 싸운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 같은 분도 존경을 받아 마땅한 대한민국의 영웅들이다.

히어로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한국 영화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제작비)으로 영웅들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에 평소엔 시골마을의 청년으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안드로메다별 외계인의 끊임없는 침공에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장준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에 등장하는 병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준환 감독의 재기발랄한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전국 7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 참패했다.

장준환 감독의 재기발랄한 장편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전국 7만 관객에 그치며 흥행 참패했다. ⓒ 싸이더스

 
달인과 사기꾼, 외계인(?)을 넘나드는 연기장인

흔히 노년의 남성 배우들은 주인공의 아버지나 대기업 회장 역을 맡는 경우가 많지만 백윤식은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른 행보로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1970년 KBS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오랜시간 조-단역을 전전하던 무명시절을 보냈다. 1994년 <서울의 달>의 미술 선생님으로 뒤늦게 주목 받기 시작한 백윤식은 1997년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의 사이비 차력선생 백관장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후 <덕이>, <여인천하>, <장희빈> 같은 드라마에 출연하던 백윤식은 2003년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했다. 사실 <지구를 지켜라>의 강사장 역은 머리를 삭발하고 속옷차림으로 어두운 곳을 굴러야 하는 험한 역할이었다. 하지만 백윤식은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몸을 아끼지 않는 열연으로 강사장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청룡영화제와 대종상,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남우조연상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백윤식은 <지구를 지켜라> 이후 본격적인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2004년 <범죄의 재구성>에서 김선생 역, <그때 그사람들>에서 김부장 역, <싸움의 기술>에서 전설적 싸움 고수 오판수 역을 맡은 백윤식은 출연하는 영화마다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특히 2006년 <타짜>의 평경장은 백윤식이 아닌 그 어떤 배우를 떠올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그야말로 캐릭터와 '물아일체'의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에 전념하던 백윤식은 2009년 <히어로>를 통해 드라마에 복귀했고 <위기일발 풍년빌라>, <불후의 명작> 등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드라마는 4회까지만 특별 출연한 <뿌리깊은 나무>였다.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상태의 태종 이방원을 연기한 백윤식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세종 역의 송중기를 여러 차례 좌절시켰다(<뿌나> 세계관에 따르면 <육룡이 나르샤>의 유아인이 나이가 들면 백윤식이 된다).

배우로 활동하는 아들(백도빈)과 며느리(정시아)를 두고 있지만 백윤식은 아들, 며느리보다 더 활발히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 <관상>에서 김종서, <내부자들>에서 대중들을 개, 돼지 취급하던 유명 논설주간 이강희를 연기했던 백윤식은 2016년 허진호 감독의 <덕혜옹주>에서 고종을 연기했다. 칠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2019년 드라마 <배가본드>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을 연기했던 백윤식은 여전히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현역' 배우다.

장난스런 포스터에 낚이지 말자
 
 신하균(왼쪽)과 백윤식의 연기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구를 지켜라>는 충분히 2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신하균(왼쪽)과 백윤식의 연기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구를 지켜라>는 충분히 2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 싸이더스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으로 <살인의 추억>, <괴물>, <기생충> 등을 만든 봉준호 감독과 동기다. 당시 두 감독은 서로의 졸업작품에서 촬영 감독을 해줬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장준환 감독의 노력이 집약된 <지구를 지켜라>는 신선한 영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우스꽝스러운 포스터나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몇몇 유치한 유머코드만 보고 <지구를 지켜라>의 한계를 규정했다면 그 사람은 2000년대 초반, 아니 어쩌면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재기 발랄하면서도 풍자가 가득한 블랙 코미디의 걸작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아쉽게도 <지구를 지켜라>는 개봉 당시 전국 관객 7만에 그쳤다).

<지구를 지켜라>는 강원도 산골에서 양봉을 하는 병구(신하균 분)가 외계인이라 믿는 강사장(백윤식 분)을 납치하면서 일어나는 소동극이다. 이 작품에서는 물파스에 들어 있는 말레인산 클로로페니라민이라는 성분이 외계인 몸 속의 트라스크리산테매이트에 협착해서 외계인들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논리가 나온다. 분명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신하균의 쓸데없이 진지한 연기와 만나 묘한 설득력을 가진다. 

강사장이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지어낸 얘기지만 영화 후반부 그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분별한 유전자 조작과 전쟁, 폭력이 지구를 오염시키고 황폐화시키는 일은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우주 어디에도 네들처럼 같은 종을 학대하고 그걸 즐기는 생물은 없어"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대단히 소름 끼친다(이 때 유인원이 뼈다귀를 내리치는 장면은 신하균이 직접 유인원 분장을 하고 연기했다).

강사장을 죽이기 직전 병구가 경찰의 총에 맞으면서 그는 극적으로 구출된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우주선이 나타나 강사장을 우주선으로 소환한다. 알고 보니 강사장은 병구의 말처럼 진짜 안드로메다별의 왕자였고 그는 멀리서 지구를 바라보며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실험 중단해. 저 행성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결국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지구가 폭발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지구를 지켜라>가 마무리된다.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여성 배우' 황정민
 
 여성배우 황정민(오른쪽)은 천만영화를 두 편이나 보유한 동명의 남성배우보다 먼저 주목 받았다.

여성배우 황정민(오른쪽)은 천만영화를 두 편이나 보유한 동명의 남성배우보다 먼저 주목 받았다. ⓒ 싸이더스

 
대한민국에서 '황정민'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십중팔구는 <국제시장>, <베테랑>, <검사외전>, <곡성> 등에 출연한 현존하는 최고의 흥행배우 황정민을 떠올릴 것이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 중에는 KBS의 황정민 아나운서가 생각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에 출연한 황정민은 흥행보증수표 남자 배우도, 28년 차의 베테랑 아나운서도 아닌 백상예술대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연극배우 출신의 '여성배우' 황정민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를 남몰래 좋아하는 서커스단 출신의 순이를 연기한 황정민은 혼자 장르에 안 맞게 끊임없이 멜로 분위기를 연출하며 관객들에게 의외의 웃음 포인트를 선사한다. 중반부엔 강사장의 폭로(?)에 잠시 병구의 곁을 떠나기도 하는데 이 장면에서 장준환 감독이 대놓고 순이를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순이는 병구가 위기에 빠진 것을 직감하고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온다.

사실 순이는 <지구를 지켜라>에서 가장 순수하고 맑은 캐릭터였는데 병구를 짝사랑했다는 이유로 이용만 당하다가 허무한 최후를 맞는다. 황정민은 <지구를 지켜라>로 춘사영화제 신인여우상과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독립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현재까지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넘나들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 <로스쿨>에서 국민참여재판 승률 100%의 스타검사 역으로 김명민과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이밖에 <친구>의 차상곤으로 유명해진 이재용이 병구를 용의자로 지목한 개코 형사, 형사반장 전문배우 기주봉은 <지구를 지켜라>에서도 어김없이 형사반장 역을 맡아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주현은 명문대 출신의 신참 형사로 출연해 강사장을 죽이려는 병구를 저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일일드라마와 아침드라마를 위주로 활동하던 이주현은 2018년 TV소설 <파도야파도야>를 끝으로 활동이 뜸해졌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지구를 지켜라 장준환 감독 백윤식 신하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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