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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자랐을까.
 아이가 자라는 만큼 엄마도 자랐을까.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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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더디지만 멈추지 않고 흐른다. 우리는 어딘가로 조금씩 옮겨진다. 아이 키를 쟀다. 2주 사이에 1cm가 자라있다. 육안으로도 아이가 자랐다는 느낌이 부쩍 들었다. 내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는 걸 감지했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가 한 뼘 자랐다는 걸 이렇게 확인한다. 이 모든 게 어떤 신호같다. 하나의 챕터가 끝났으니 새로운 장을 시작하라고. 나는 내게 더 다가가고, 아이는 스스로 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우리는 건너가고 있다. 

외출을 하고 돌아와 아이를 씻겨주었다. 갑작스럽게 더워진 날씨에 머리도 감고 샤워도 해야 해서 부담이 컸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만큼 힘들지가 않았다. 아이가 먼저 알려주었다. "엄마, 나 이제 발뒤꿈치 안 들어도 돼. 머리를 들어도 발바닥이 완전히 바닥에 다 닿아." 아이의 목소리는 의기양양했다. 그렇구나,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키가 자랐구나. 그래서 이게 덜 힘들었구나. 

세면대 앞에 서서 뒤로 기대어 머리를 감는 아이는 발뒤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서야 간신히 머리가 세면대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에 힘을 주느라 힘들어 아이는 빨리 해달라고 칭얼거렸고 이쪽 저쪽으로 흔들리기 일쑤였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를 붙잡고 투정부리는 걸 달래가며 머리를 감기느라 나도 힘들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머리를 감기고 허리를 굽혀 샤워까지 시키고 나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으니까. 

키가 자라 바닥에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선 아이가 늠름하게 서 있다. 본인이 힘들지 않아서 그런지 보챔도 덜했다. 며칠 전부터는 혼자 몸에 비누칠을 하겠다고 해서 등에만 비누칠을 해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하게 기다려주고 있다. 그러니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구부리는 시간도 줄었다.

가만히 서서 아이가 씻는 걸 지켜보는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발라주는 마음이 평소와 달랐다. 허리가 아파 서둘러 손을 움직이던 예전과 달리 천천히 아이 몸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 이렇게 수월해지는 거였구나.

생각난 김에 키를 재어보니 2주 사이에 1cm가 자라 있었다. 며칠 사이 아이가 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자라 있었다. 여유가 생겼다고 느꼈던 것도 괜한 게 아니었구나. 아이가 성장한 만큼 엄마 마음에도 여백이 생긴 거였다.

아이의 성장은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더디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간절히 바라기도 했던 성장을 이렇게 현실로 마주할 때면 이상하게 슬프다. 아까워서 먹지 못하고 손에 꼭 쥐고만 있던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걸 보는 마음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사라지는 걸 보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기분. 아이가 자란다는 건 엄마와 분리된다는 뜻이니까. 우리 사이에 공간이 생기고 거리가 멀어지고, 아이는 아이만의 세계로 걸어 들어 갈 거라는 의미다. 그걸 막을 수도 없지만 마냥 놓아주고 싶지도 않은 게 엄마의 마음이다. 

하지만 거기에 엄마의 특권이자 기쁨이 있다.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자기만의 세계를 키워간다. 그러다 기어코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가 자기만의 세계로 완전히 존재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발원해서 성장하고, 완성되어가는 것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하나의 고유한 세계가 탄생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 아이의 성장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설레는 일이다. 

아빠가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사이 아이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머리 감기 전, 머리 말리는 게 제일 싫다고 했는데, 그 싫은 마음을 쫒아내려는지, 드라이어가 뿜어내는 요란한 소리를 이겨볼 심산인지, 씩씩하고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가 집안 구석 구석에 활발한 기운을 불어 넣었다.

"씨씨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하루 밤 이틀 밤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싹이 났어요."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더니 뽀드득 돋아난 싹이 신기한 아이의 마음이 내 마음 같았다. 어느새 이렇게 자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집안의 분위기를 바꿔 놓고 있는 아이가 놀랍고 신기했다. 나도 모르게 그걸 따라 부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내 곁을 파고 들며 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너무 좋아." 그런 아이를 끌어 안고 "엄마도, 너는 온통 좋은 거 뿐이야" 하고 속삭였다. 초롱초롱한 눈도, 생기발랄한 입술도, 볼록한 볼과 배, 보드랍고 따뜻한 손, 몰랑한 팔과 사과 같은 엉덩이, 동글동글한 발가락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좋은 거 뿐인 너.

말랑하고 따스한 아이의 몸을 안고 있으면 생명 자체가 지닌 위로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존재함을 알게 해준다. 존재 자체로 의미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는 우리에게 보내진 선물이다.

오늘은 아이의 다섯 번째 생일이다. 아이가 갖고 싶어했던 선물을 사주었고, 먹고 싶어했던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주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을 받은 건 나다. 아이가 자라왔던 시간이 구불구불한 길처럼 눈 앞에 펼쳐질 것 같다. 아이는 몸으로 그 시간의 의미를 차곡차곡 쌓아 내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만큼 나도 자랐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 속, 어제의 아이, 한 달 전의 아이, 작년, 그 이전의 더 아기였던 아이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리운 마음이 못다한 사랑의 마음을 고백한다. 오늘 더 사랑하겠다고. 오늘 더 길게 우리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내게 와줘서 고맙다는 말이, 하나의 꾸밈도 없이 투명하게 흘러나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아이와함께자라는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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