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21 09:55최종 업데이트 21.04.21 09:55
  • 본문듣기
 

<한국의 역사와 지리> 프랑스의 한국어를 배우는 중고생들에게 주불한국대사관이 배포한 한국 역사-지리 교과서 ⓒ 목수정

 
얼마 전 아이가 <한국 역사-지리(Histoire-Géographie de la Corée)> 교과서를 학교에서 받아왔다. 이 책으로 수업을 하진 않았고, 집에서 읽어보라며 한국어 교사가 한 권씩 나눠줬다고 했다. 파리엔 한국어를 제3외국어로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몇 개 있다. 한국어를 제3외국어로 선택한 아이들은 정규수업이 없는 수요일 오후에 자신이 고른 학교에 가서 한국어 수업을 듣는다.

지난 가을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는 파리 7구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어수업을 듣는다. 말하기는 익숙하지만 읽기와 쓰기가 서툴러 이 수업을 통해 문어적 표현을 익히는 중이다.


중상급반에서 아이는 유일하게 한국계 부모를 둔 학생이다. 흔히 알고 있듯, 케이팝이나 한국드라마에 대한 흥미로 한국어를 배우려는 프랑스 아이들이 다수다.

한국어를 배우는 프랑스 중고생들이 한국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쇼비즈니스가 불러일으킨 청소년기의 일시적 열정이 한국에 대한 폭넓은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늘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다고 느껴왔던 터다. 아이가 받아온 역사-지리 교과서를 보고 비로소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는가 싶었다.

"엄마, 책이 좀 이상해"

아이는 받아온 책을 건네면서 "그런데 책이 좀 이상해"라고 한마디 덧붙였다. 펼쳐 보니, BTS 멤버들의 사진이 초반에 크게 배치되어 있다. 한참 페이지를 넘기니, 후반부에 세종대왕이 나오는데, BTS 사진과 달리 픽셀이 완전히 뭉개진 모습이다. 아이는 두 사진을 비교하며 책을 불신하게 된 듯했다.

BTS로 시작해서 블랙핑크로 끝나는 또래 아이들의 한국에 대한 표피적, 일률적 관심에 아이는 다소 질려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한국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자신의 한국에 대한 지식도 체계적인 것은 아니어서 아이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던 차다.

그 문제를 해결해줄 책이 등장했나 싶었는데, 여기에서마저 케이팝이 등장하는 걸 보고 아이는 급실망한 것이다. 역사책을 받아온 날, 오히려 아이는 한국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이 책부터 읽어보지 그래" 했더니, "이 책으론 한국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설마… 그래도 기본은 갖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책의 하단엔 한국학중앙연구원(The Academy of Korean Studies)과 주불한국대사관이 나란히 책을 펴낸 주체로 표기되어 있고, 상단에 교과서(Manuel Scolaire)라고 적혀 있다.
 

삼성중공업 거제 조선소 한국 역사-지리 교과서 1장에 실린 삼성중공업 사진 ⓒ 목수정

 
총 17개의 단원으로 구성돼 있는 이 책에 처음 등장하는 사진은 삼성중공업의 거제 조선소다. 60-70년대를 거치며 세상에 한국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소위 '한강의 기적'과 박정희 정권의 개발주의 정책을 "세계화의 영토-한국의 용 건설하기"라는 제목으로 소개한다. 삼성, 현대, 엘지 등의 재벌들이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국가 주도의 개발경제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는 설명이다. 2장은 온전히 포스코에 바쳐진다. 박태준 회장을 '철강왕'이라 묘사하며 국가 주도 경제의 대표적 사례로 포항제철의 신화를 다루고 있다.

4장은 한류다. 김대중 정부 이후 지난 20여 년간 국가의 탄탄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한류가 아시아, 유럽, 남미 등지로 퍼져나가며, 한국 소프트파워의 핵심 요소가 됐다는 설명이다. 방탄소년단 멤버들 사진과 '젠틀맨'으로 유튜브 800만 뷰를 기록했을 당시의 싸이의 모습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 
 

한국의 소프트 파워- 한류 교과서 4장에서 다루고 있는 한류 소개에 실린 그룹 BTS의 사진 ⓒ 목수정

  

싸이 유튜브 800만 뷰 한류, 한국의 소프트 파워를 소개하는 장에 실린 가수 싸이의 모습 ⓒ 목수정

 
5장은 송도 신도시를 소개한다. 하이테크 도시 혹은 스마트시티를 지향하는 이 도시가 갖춘 시설과 장점들을 국제비즈니스 구역의 도면과 태양광으로 설계된 유타 대학 송도캠퍼스의 지붕 등을 보여주며 정성스레 알리고 있다.

여기까지 살펴본 후, 난 잠시 길을 잃었다. 이것이 과연,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는 '교과서'가 맞는가? 혹시 다른 목적을 가진 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스쳐갔다.

17개 장 속에서 20세기 이전의 한국역사를 다루는 장은 3개(세종, 한글, 실학)에 불과하다. 111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어디에도 한국의 역사-문화적 뿌리를 느끼게 해주는 오래된 사찰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종교를 다루는 장에서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만나는 교차로로 한국사회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현대에도 번성중인 샤머니즘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의 토속신앙이 신토이즘(shintoïsme-일본의 토속신앙)이라고도 불린다고 기술하는 오류와 함께.

세종에서 시작되는 한국사 

10장까지 주로 정치지리학적 관점의 주제를 다뤘다면 11장부터 본격적인 역사를 다룬다. 몽고제국의 오랜 침략에 시달리던 중세의 한국에서, 이성계가 권력을 차지, 새 왕조 조선을 세우고, 조선의 4번째 왕 세종이 한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말로 한국사의 첫 장이 열린다. 소위 한국사를 다루는 교과서가 세종 시대부터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책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이다.

이전의 한국 역사는 책의 머리말에서 열 줄의 문장 속에 명멸해간 국가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압축되어 있을 뿐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공통 뿌리인 단군신화는 물론, BC 2333년에 세워진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 광활한 만주 땅을 영토로 삼았던 고구려와 일본에 대륙의 문물을 전수하던 백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신라, 통일신라와 발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했던 고려시대도 전면 생략한다. 책은 3개의 장에서 세종과 그의 최대 업적인 한글을 집중 조명하고, 18세기에 등장한 실학을 한국의 계몽주의 시대로 소개하며 20세기 이전의 역사를 마무리한다.

그밖에 국가주도 자본주의의 종말과 신자유주의로의 진입 계기가 된 IMF 외환위기, 서울의 도시계획, K푸드, 한국군의 규모, 한중일 간의 외교관계 등을 다룬다. 특이하게도 예술사(Histoire des Arts)라는 장이 두 번에 걸쳐 등장하는데 한 번은 민요 '아리랑'을, 또 한번은 영화 <집으로>를 다루고 있다. 영화 자체가 갖는 의미를 떠나 '예술사'라는 제목의 장에 한국영화가 지금의 위상을 갖게 된 과정에 대한 그 어떤  개요도 곁들이지 않은 채, 한편의 영화만 소개하는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객관성이 결여된 자의적 선택이다.
 

한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세종 휴머니즘과 왕권 강화의 시기로 명명된 세종의 시대 ⓒ 목수정

 
프랑스 고교 교사들이 저술한 한국역사 교과서 

도대체 이 책의 구성을 누가 기획했고, 저자는 어떻게 선정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책에 소개된 공저자는 7명의 프랑스인이다. 거기에 전 주불한국대사관 교육원장을 비롯한 3명의 한국인이 조력자(Contributeur)로 추가된다. 공저자 7인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역사-지리를 가르치는 전현직 교사들이다. 그들이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해 교과서를 집필할 수 있는 어떤 학문적 배경을 가졌는지 소개되어 있지 않으며, 한국인 조력자들의 역할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주불한국대사관의 송세경 교육원장에 따르면, 한국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 중 하나인 파리 16구의 장송 드 사이 고등학교 역사-지리 교사(세바스티앙 베르트랑)의 제안으로 이 교과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꼭 필요하고 바람직한 책이지만 저자들이 왜 프랑스 역사교사들이었는지에 대해선 언뜻 수긍하기 힘들다.

주불 대사가 외교부를 통해 예산을 마련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책 내용에 대한 자문과 감수를 맡으며, 2018년에 디지털 자료로 처음 제작되었고, 2020년에 책자로 인쇄, 출간돼 프랑스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배포하게 되었다고 송 원장은 설명한다.

세종의 시대를 제외한 수천 년 역사에 대한 서술을 과감히 생략하지만, 포스코와 한류, K푸드, 송도신도시, 한국의 군사력에 대해선 각각 하나의 테마로 배당한 이 역사교과서의 독창적 구성이 누구의 의도인지 묻자 교육원장은 "전임자가 한 것이라서 나는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역사 교과서라고 부르기엔 불균형한 구성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어차피 다 다룰 수 없으니 한국의 발전상을 먼저 알리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라고 답했다. "누가? 한국정부가? 아니면 프랑스 교사들이?"라는 질문에 그는 답하지 못했다.

이 책을 '교과서'라고 명명한 것은 잘못임을 송세경 원장은 시인했다. 그에 따르면 "교과서는 아니고, 참고하라고 만든 책"이라는 것이다.

교과서든 참고도서든 한국정부가 예산을 들여 정부기관 주도로 제작한 한국역사책이므로, 그 내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책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정부가 해외에 전해왔던 오랜 한국 홍보 테마와 거기에 익숙해진 프랑스인들이 포착한 한국에 대한 클리셰(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용, 냉전시대의 산물, 삼성, 케이팝), 집필에 참여한 프랑스 교사들의 개별적 시선이 가미된 결과물로 보였다.

뭘 자문했나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임을 늘 자랑스러워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제대로 세상에 알리는 데는 서툴렀다. 외규장각 도서를 병인양요 때 훔쳐간 프랑스인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분노하지만, 결국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을 뿐, 정작 그 내용에는 우리 스스로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한류의 확산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점에서 한국에 대해 궁금해 하는 외국의 젊은 세대에게 우리가 가장 먼저 알려야 할 한국의 면모가 여전히 한강의 기적이고, 포항제철의 신화일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알게 되는 단 한 사람의 역사 속 인물이 있다면 그는 세종이다. 세계 곳곳에 세워진 한국어 전문 어학원의 이름도 '세종학당'이고, 한국어 교재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 이야기가 어김없이 담겨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 역사 교과서가 유일하게 조명하는 역사 속 인물이 세종 한 사람인 건 곤란하다.

5천년 역사를 관통하며 한국인의 삶에 새겨진 불교의 의미, 팔만대장경으로 대표되는 호국불교의 상징성, 불교를 통해 발전해온 철학과 건축, 미술, 인쇄술 등의 의미를 담지 않는 한국 역사책은 중요한 대목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일제에 억압당했던 시절을 언급하면서 지치지 않고 타올랐던 항일운동의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파리코뮌보다 한층 장대했고 철학적·실천적 측면에서도 대범했던 동학혁명을 말하지 않는 것 또한 역사서로서의 균형을 상실한 대목이다.

자문과 감수 역할을 맡았다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대체 무엇을 자문하고 감수한 것일까. 왜 그들은 최초로 기획된 외국 학생용 한국역사서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이 책에 눈여겨볼 만한 점들도 없지 않다. 책은 "한국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 문자라고 여기며 자랑스러워하는 한글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나,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모순된 현실을 지적한다. 1896년 외세에 둘러싸여 존재적 위협에 직면한 조선에서 민족주의자 지식인들이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했고, 조선인들이 이 신문을 소리 내 읽고 토론하며 주권의식을 고양시키던 모습을 당시 한반도에 머물던 유럽인들이 목격했음을 책은 전하고 있다. 정작 이 신문을 폐간시킨 이는 외세가 아니라 "신문이 민주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을 두려워한 고종"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프랑스의 계몽군주 프랑수아 1세가 출현하던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선 세종이라는 계몽군주가 나왔다는 사실을 비교하는 부분도 프랑스 교사들이 개입하면서 가능했던 흥미로운 지점이다.

"처음엔 교사용 참고 교재로 기획했다"

몇 가지 의문을 안고 기사를 마무리하기 직전, 이 책의 최초 기획자였다는 이부련 전 교육원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 책은 프랑스 역사지리 교사들이 수업 중 케이스 스터디로 한국 사례를 다룰 수 있도록 <교사용 참고 교재>로 기획된 것"이라며 "2015년 시작된 프로젝트는 내가 교육원을 떠난 후인 2018년에야 디지털본으로 완성됐다. 그것을 <한국 역사-지리 교과서>로 명명하며 인쇄하고, 학생들에게 배포한 것은 현 교육원장의 판단인데, 기왕 만들어진 내용이니 널리 활용하는 게 좋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하신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초의 의도가 어떠했건, 프랑스에 있는 수천 명의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갖춰진 <한국 역사-지리> 교재를 만들어 주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데에 그도 적극 동의한다. 그는 "교포 자녀들을 위해 쉬운 한글로 만들어진 한국사 책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한국 역사서를 다양한 언어로 번역 출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적극적으로 앞으로 교육원이 추진해 나가야 사업으로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실수였건 과욕이었건, 교과서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책에 '역사 교과서'란 타이틀이 붙으면서, 오히려 그 부재가 절실한 문제로 드러나게 되었다. 엎질러진 물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이런 형태의 책 발간은 첫 시도라고 했다. 이번 책에서 드러난 문제점과 부족한 점들을 냉철히 바라보고 보완한 두 번째 시도가 나오길 바란다. 아는 만큼 보이고, 또 사랑할 수 있다. 절반의 한국인 정체성을 갖고 먼 나라에 살며 더 많이 한국을 알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BTS나 한국영화로 인해 한국을 연모하게 된 외국 청소년들도, 5천년 동안 한국인들이 빚어온 문화와 역사를 더 잘 알아야 더 다가올 수 있다. 그 첫걸음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역사를 제대로 담은 책을 만들어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문화의 소프트 파워가 세상을 향해 제 힘을 뿌리까지 뻗게 하는 지름길이며, 김구가 말했던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이 발현되는 길일 터이니.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