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가 2020년 말 발주한 '포스트코로나 대비 미래지향적 사회교과군 교육과정 구성 방안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번에는 사회교과군의 과목 구조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회교과군이란 도덕·역사·지리·일반사회(정치·경제·법·사회문화)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과목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포스트코로나 대비'이면서 '미래지향적' 사회교과군 교육과정 구성 방안 연구라고 하니 70년간 거의 변하지 않는 환경에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연구의 중간 결과에 대한 토론회가 지난 3월 24일에 줌(Zoom)을 이용해서 발제자와 토론자만 참가하는 비공개로 열렸다고 합니다.
토론자로 참가한 교사에게서 토론회의 분위기를 대강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사모임 단체의 의견을 묻지 않았고, 교수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부분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보완하는 단계에서도 민주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사회 과목에서 '시민' 과목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전국사회교사모임이 급기야 교육부와 연구책임자에게 항의하는 공문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4월부터는 '사회교과군 재구조화를 위한 연구'를 교육부가 발주하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서 진행한다고 합니다. 사회과학 분과학문 중심인 과목구조로 융합의 시대, 포스트휴먼 시대, 4차산업혁명 시대,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시민으로서의 '독립적이고 비판적 사고 능력'과 '연대적 시민성'을 청소년들이 형성할 수 있도록 연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과목 간 통섭을 이루고 삶의 문제를 다루는 프랑스 교과서
위에서 소개한 프랑스 고등학교 교과서는 역사와 지리와 지리정치학과 정치과학의 내용이 한 권의 교과서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사회현상을 분과 학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측면과 지리적 측면, 지정학적 측면, 정치학적 측면에서 통섭적으로 이해하는 교과서입니다.
표지에는 2021년도 바칼로레아 시험을 위한 교과서라고 적혀 있습니다. 수능 3~4개 선택과목을 프랑스에서는 1개의 과목으로 묶어 종합적으로 논증하는 비판적 사고력을 평가합니다. 논·서술형 시험이니 통섭적으로 수업하고, 통섭적으로 질문하고, 학생들도 통섭적으로 논증하는 답을 쓸 수 있겠지요.
새로운 교육과정에 의한 수학능력시험은 논·서술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경로의존성에 따라 이전처럼 선다형 출제를 전제한 교육과정이나 교과서 집필에 참여한다면 70년의 세월 동안 쌓여온 폐단을 다시 스스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태를 반복하는 일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의 교과서 표지는 프랑스 중학교 3학년 역사·지리·도덕과시민교육 교과서입니다. 초등학교는 학년군별로 교과서가 발행됩니다. 중학교 1~4학년 별로 모두 4권의 교과서 발행됩니다. 고등학교도 계열별로 차이가 있지만 학년별로 교과서가 있습니다.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육선진국들은 기본적으로 교육과정 내용이 대강화되어 있고, 교과서의 자유발행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교과서 내용을 국가가 검증(국정제 혹은 검정제)하여 발행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러니 교육과정 대강화도 어렵고, 교과서 자유 발행제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등에서는 중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평가는 논·서술형이거나 구술시험으로 학생의 생각을 묻는 문제를 출제합니다. 질문에 대해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답을 쓴다고 합니다. 대강화와 자유발행제라서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자연스럽게 학교 수업에서 준비하게 됩니다.
한국 청소년들의 교실 토론 시 개방성 정도
2016년 '국제 시민 및 시민권 연구(ICCS)' 조사에서 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교실 토론 시 개방성'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생각을 고취하도록 격려하는가.
- 교사들은 학생들이 그들의 의견을 표현하도록 용기를 주는가.
- 교사들은 학생들이 다른 의견을 가진 학생들과 토론하도록 격려하는가.
- 교사는 사회적 현안을 설명할 때 여러 관점을 제시하는가.
- 학생들은 수업에서의 토론을 위해 최근의 정치적 사건을 예로 드는가.
- 학생들은 자신의 견해가 대부분의 학생들과 다를 때라도 수업에서 의견을 표명하는가.
24개 조사 대상국들의 '교실 토론 시 개방성' 평균값을 50으로 했을 때, 인간개발지수가 18위인 한국은 개방성 정도가 42점인데 비해 인간개발지수가 99위인 도미니카 공화국은 우리보다 더 높은 48점입니다. 대체로 평균값 50에 가까이 나타나는데 한국만 현격한 격차로 교실 내 토론의 개방성 수준이 낮습니다.
인간개발지수 150위권의 국가까지 이 조사 대상국에 포함 시킨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교과군의 교과내용과 생활세계의 불일치, 지식과 태도의 불일치, 체제 유지의 도구화의 특징을 학생들의 응답이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유럽의 계속되는 '시민문화 만들기' 노력 - '시민' 과목 제도화
유럽에서 1985년 이후 청소년들의 폭력이 증가하고 공교육 중요성이 재론되면서 사회통합을 위한 시민교육 담론이 부활하였습니다. 독일은 1970년대부터 '탈나치화'를 위한 반권위주의 교육, 비판교육, 저항권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교양 교육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는 1985년에 초중학교에서 '시민' 과목을 제도화했고, 영국은 증가하는 학교 폭력 문제뿐만 아니라 1997년 총선 투표율을 통해 드러난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극복하기 위해 1998년부터 '시민성' 과목을 제도화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유럽은 젊은 인구가 감소하고, 경제위기로 이전의 공공 부문 지출을 국가가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현실화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원을 둘러싼 세대 갈등이 심화되면서 합의적 민주주의와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해졌습니다. 결국 통합적 관점에서 시민교육의 제도화가 더욱 절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시민사회가 잘 발달해 왔다는 유럽에서도 아래와 같은 '시민문화 만들기' 노력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 자료는 유럽 국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유리디스(Eurydice)가 2017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유럽연합 국가 중 20개국이 '의무적이고 분리된 과목'으로 시민교육 과목을 두고 있습니다. 이 발표 이후인 2018년 스웨덴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까지 의무 과정으로 시민교육 과목을 둔다고 교육과정을 확정했습니다. 18개국에서 시민교육 과목에 대한 국가 단위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 '학교교육' 분야가 가장 보수적이고, 변화가 더디다고 평합니다. 지금의 사회교과군의 과목 구조는 농경시대라고 할 수 있는 70년 전에 형성되었습니다. 사회교과군 안에서 교과목 간 융합이 이루어지고, 유럽처럼 연대적 시민성을 위한 '시민' 과목이 만들어지려면 시민들의 뜻을 대신 집행하는 입법자들이 이전의 모순을 바로 잡아주는 입법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시민' 과목을 의무화하는 학교시민교육법이 70년 동안 누누이 쌓여오고 견고해진 폐해에 조금씩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시민 과목을 '연대의 끈(The ties that bind)'이라 부른답니다. 이 과목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기로 결정하고 실제 학교 시민교육 효과는 8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22개정교육과정에 이 과목이 반영된다고 하더라도 그 교육적 효과는 2030년경에나 나타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