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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어쩌다 제보자가 됐다. 라디오피디로 안정된 삶을 살던 나는 지난 2019년 불매운동을 비하하는 친일막말에 맞서 내부고발을 했다. 많은 분들이 격려해주셨지만, 객관적 자료에 따르면 내 인생은 거기서 X된 거다. 부당해고를 당했고 복직 후 또 해고됐다. 아예 방송국이 없어졌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왔다. 그렇게 일 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일기를 쓴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만큼 고마운 분들이 많았고 배운 것도 많아서다. 입증하고픈 것도 있다. 제보자에 대한 편견들,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지나간 이야기임을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었다.

수원 남문시장에는 라디오 스타들이 살고 있다

방송국이 사라진 지 7개월째,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다시 방송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마다 난 그곳에 가고 싶었다. 수원 남문시장... 진정한 라디오스타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다.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3년 전인 2017년 11월경이다. 방송국으로 교육의뢰가 들어왔다.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수원의 남문시장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라디오방송을 만들었는데 방송국에서 전문교육을 시켜줄 수 있느냐는. 나와 윤종화(당시 기자)는 성심성의껏 교육에 임했다. 기획력 좋은 윤종화가 전반적인 커리큘럼을 짰고 그중에서 나는 제작실무를 맡았다.

교육은 상인들 일정을 고려해 주로 밤에 이뤄졌다. 그런데 교육생(상인DJ들)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했다. 피곤함이나 삶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잘마른 스펀지가 물을 쫙 빨아드리듯 빛나는 눈빛으로 내가 말하는 거의 모든 내용을 받아 들였다. 그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서 교육이 다 끝난 뒤 저녁 시사프로그램에 그분들을 모셨다. 그런데, 한마디 한마디 멘트가 살아있었다. 너무 진솔하고 인간적이었다. 청취자들의 문자가 쏟아졌다.

"혹시, 지금 말씀하시는 상인DJ님, 제가 단골로 가는 **떡집 사장님 아니신가요? 목소리 너무 좋아요^^"

맞았다. 떡집 사장님이 말하고 동네 고객들이 응원하는 인간적인 방송, 나는 이것이 지역방송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생방송이 끝난 뒤 나는 그분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이래서 난 지역방송이 너무 좋다고.
 
2017년 11월 24일 경기방송 스튜디오에서.
▲ 라디오 생방송이 끝난 뒤 상인DJ들과 2017년 11월 24일 경기방송 스튜디오에서.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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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3개월이 지난 뒤 떨리는 통화

그로부터 3년하고도 3개월이 지났다. 그 새 너무 많은 게 변했다. 우선 나와 윤종화는 제보자가 됐고 부당해고를 당했다. (당시 상황은 과거기사 참조 : 경기방송 간부 '친일' 막말, 기억하십니까 http://omn.kr/1load)

FM 99.9 경기방송은 이사회의 폐업결정으로 2020년 3월 30일 자정을 끝으로 방송을 중단했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쓰나미가 온 세상을 덮쳤다. 거리두기, 거리두기, 또 거리두기... 그 속에 시장 상인들은 어떻게 살고 계실지 궁금했다. 걱정됐다. 전화라도 드려볼까 하다가, 누가 누구 걱정을 하나 싶어서 말았다.

그러던 지난 수요일, 나와 윤종화는 한결 가벼워졌다. 그동안 우리를 옥죄던 형사소송이 마무리된 것이다. 제보 이후 그들은 우리를 '허위제보로 인한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로 검찰에 고발했다. 수원 남부경찰서가 수사했고 수원지검이 최종판단을 내렸다. 혐의없음, 불기소 처분. 그러자 그들은 수원지검의 결정이 잘못됐다며 고등검찰에 항고했고, 고검이 항고를 기각하자 다시 고등법원으로 재정신청을 했다.

전산자료를 열람해보니 그들은 20년 경력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를 우리 소송에 투입했다. 전관의 수임료는 얼마일까? 그러나 고등법원 역시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결국 그들의 줄소송은 오히려 우리의 제보가 허위가 아니며 공공의 이익을 위했음을 검찰과 고등법원을 통해 확인시켜준 꼴이 됐다.

나는 남문시장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나를 기억하실지,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는데...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경기방송... 노광준입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뜻밖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아이쿠, 기억하고 말고요. 실장님. 아이쿠...."

그분들은 다 알고 계셨다. 숨죽여 지켜보고 계셨다. 다음날 우린 시장에 갔다.

DJ는 치킨집 사장님이, 엔지니어는 공방 디자이너가

4일 목요일 오전 11시 40분경, 수원 못골시장에 도착했다. 주차타워에서 내려오니 정겨운 시장냄새가 코끝을 휘감았다. 그리고 눈 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사람이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다. 코로나로 위축됐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시장안에는 카트를 끌고 장을 보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곳곳에 젊은 엄마들도 눈에 띄었다.
 
2021년 3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40분경,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고있었다.
▲ 수원 못골시장 2021년 3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40분경, 많은 사람들이 장을 보고있었다.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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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못골시장에서 라디오가 시작됐다. 10여 년 전 몇 몇의 상인DJ들이 라디오방송을 시작했는데 이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면서 주변 9개 시장을 하나의 방송 네트워크로 묶으려는 노력이 시작됐고 마침내 지난 2017년 전국에서 최초로 수원 남문 지역의 9개 시장을 통합한 시장 방송국이 만들어졌다.

SNBC 수원남문방송국. 9개 시장 12명의 상인DJ들이 100% 자체인력만으로 방송을 운영한다. 라디오방송은 시장내에 설치된 450개의 스피커를 통해 9개 시장 곳곳에 울려퍼지고, 최근에는 보이는 라디오 시스템을 갖춰 5개 대형 전광판과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영상이 송출된다.
 
상인DJ들의 방송은 9개 시장에 설치된 450개 스피커와 5개 대형전광판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 수원 남문시장에 설치된 대형전광판 상인DJ들의 방송은 9개 시장에 설치된 450개 스피커와 5개 대형전광판을 통해 방송되고 있다.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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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시장은 220년 전 정조대왕이 직접 설치를 지시한 '왕의 시장'이에요. 화성을 쌓아 신도시를 만들고 거기에 한양의 거상들을 이전시켜 종로거리와 남문시장을 만들었죠. 지금도 수원 전체에 22개 전통시장이 있는데, 그중 9개가 남문 주변에 있습니다. 1600개 점포에 4500여 명의 상인가족이 있고 하루 유동인구는 2만여 명이죠." (이준재 수원남문방송국장)

우리를 맞아준 이준재 국장은 우리에게 현장 상황을 하나라도 더 알려주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팔달문 시장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며 자신도 직접 '불패DJ'라는 예명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그는 9개 시장에 사는 12명의 DJ들을 하나로 묶어 5년째 방송을 이끌어온 라디오스타들의 산증인이다. 그가 우리와 함께 방송스튜디오로 들어서자 DJ들이 벌떡 일어서며 인사 한다. 우리 국장님 오셨다고...

"평소에 얼굴 보기 힘드니까...여기있는 DJ들도 다 얼굴 보기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낮 12시부터 2시까지 방송을 하는데 다들 가게를 비워두고 와야하잖아요... 그래서 자기 방송하는 시간에 이렇게 얼굴 보면 그렇게 반가와요." (박노철 상인DJ)

박노철 DJ는 패션1번가시장에서 곰탕집을 운영한다. '사람향기 물씬나는 시장에서 곰탕처럼 진국으로 방송하겠습니다'는 홍보문구를 내걸고 '철이DJ'라는 예명으로 '은하철도 999'라는 방송을 하고 있다.

이날의 방송은 '낭만DJ' 한창석씨가 하고 있었다. 그는 천만영화 <극한직업> 이후 '수원왕갈비치킨'으로 유명한 수원의 통닭거리, 요즘 애들말로 치킨스트리트에서 용성통닭을 운영하고 있다. 시와 소설을 좋아해 평소 눈여겨본 시구절을 휴대폰에 저장해놨다가 방송으로 읽어주는 그는 오프닝 시그널 뮤직인 이미자의 <수원처녀>에 맞춰 흥을 타고 있었다.

"철쭉꽃 할미꽃이 초원에 피면은 타네요 수원 처녀 가슴이 타네요."
 
DJ는 치킨집 사장님, PD는 공방 디자이너 (2021. 3.4. 낮 12시~2시)
▲ 남문방송 생방송 스튜디오 DJ는 치킨집 사장님, PD는 공방 디자이너 (2021. 3.4. 낮 12시~2시)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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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흥타는 사이 옆에서 바삐 움직이는 손길이 있었다. 마음씨 착하기로 소문난 '춘우' DJ였다. 작은 공방도 운영하며 못골시장에서 동태포를 파는 이하나씨는 자기 방송시간이 아닌데도 낭만DJ의 방송을 돕고 있었다. 혼자서 방송하는 게 얼마나 정신없는지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보이는 라디오까지 하다보니 채팅창으로 사연 올라오고, 선곡하고, 멘트 신경쓰는 걸 혼자 하려면 정신없어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른 분들 방송시간에 이렇게 나와서 돕고 있는데, 정작 제 시간에는 혼자 하네요^^" (춘우DJ 이하나씨)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약속했다. 춘우DJ 방송시간에는 제가 도와드리겠다고.

해직 언론인과 시장상인들의 즉석 콜라보 방송 "99.9 응원합니다"

그렇게 생방송을 즐기고 있는데, 이준재 국장이 갑작스러운 제의를 했다. 즉석 게스트로 출연하라는 것이다. 이런. 윤종화와 나는 그렇게 몇 년만에 방송출연을 했다. 너무나 뜻깊은 방송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99.9 경기방송의 전직 제작팀장 노광준 팀장님과 윤종화 전 보도팀장님이 자리해주고 있습니다. 두 분을 모셔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솔직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민폐만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 윤종화는 기자 출신 답게 또박또박 정제된 톤으로 지난 일을 설명했다. 그렇게 방송하는데 채팅창으로 글이 올라왔다. 우리를 환영하는 상인들의 마음이었다.

"반갑습니다."
"노광준 PD님, 윤종화 기자님, 오늘의 SNBC 방송이 있기까지 뿌리가 되어주셨습니다. 열매 맺고 꽃피우는 것은 방송국의 몫인데, 중간 점검 차 오신 듯하셔서 감개무량합니다."
"99.9 응원합니다."

 
화면 왼쪽부터 윤종화 전 경기방송 보도2팀장, 노광준 전 경기방송 제작팀장, 이준재 수원남문방송국장.
▲ 남문방송 생방송 유튜브 채팅창 갈무리 (2021.3.4) 화면 왼쪽부터 윤종화 전 경기방송 보도2팀장, 노광준 전 경기방송 제작팀장, 이준재 수원남문방송국장.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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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미디어와 상생하는 경기공영방송의 꿈

현재 수도권 FM 99.9 MHz는 주인없이 비어있다. 23년간 99.9 전파를 받아 운영해오던 민영사업자(경기방송)가 돌연 폐업결정 후 송출권을 반납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30일이었으니 곧 1년이 되어간다. 새 사업자를 선정하려면 방송통신위원회의 공모절차를 거쳐야하는데, 방통위는 지난 1월 20일, 올해 사업계획으로 지역 라디오 사업자 신규허가 절차를 추진하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한편 경기도는 '경기교통방송 설립'에 대한 타당성 용역결과를 통해,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기 위해 경기도와 31개 시군이 참여하는 '비영리 출연재단' 형태로 경기지역 공영방송 설립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고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소식을 전하며 특히 눈여겨보고 있는 내용을 상인DJ들에게 말해줬다.

"경기도 용역 보고서에서 비중있게 할애된 부분인데, 방송제작을 내부 인력만으로 하지 않고 경기도 31개 시군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을미디어, 소출력라디오, 그리고 이렇게 시장에서 방송하는 수많은 민초 방송인들과 함께 상생하는 구조로 만들겠다는 지점입니다. 한마디로 관이 주도하는 관영방송이 아니라 주민이 주도하는 풀뿌리 자치방송으로 만들어간다는 거죠. 저희는 그런 방송이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상인DJ들이 맞장구를 쳤다. 정말 그런 방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저희가 지금 남문시장 근처 9개 시장을 연합해서 방송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수원 시내에 22개 전통시장 전체를 하나의 방송네트워크로 연결하려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상인들이 똘똘 뭉쳐야겠지만, 젊은 세대들이 재래시장에 올 수 있게 하는 참신한 아이디어나 지상파 방송의 관심도 큰 힘이 될 겁니다." (이준재 수원남문방송국장)

수원시 22개 전통시장을 이으려는 상인DJ들의 꿈

놀라운 것은 9개 시장에 살고 있는 12명의 DJ들이 5년간 한 사람의 이탈도 없이 제시간에 방송을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어제까지 방송국에 모여 회의를 함께했던 DJ가 갑자기 작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늘 밝은 표정으로 영상까지 담당하던 '아이쿠 DJ' 정지원씨가 심장질환으로 고인이 된 것이다. 너무 놀란 시장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영안실에 모였는데 거기서 또 한번 놀랐다. 가족들이 고인의 영정사진으로 '방송 프로필 사진'을 모셔둔 것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인사하고 있는 '아이쿠 DJ'의 영정 사진 앞에서 상인 DJ들은 부둥켜앉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9개 시장에서 모인 12명의 DJ들은 바쁜 생업 속에서도 라디오방송을 성심성의껏 준비하고 있다.
▲ 수원남문시장의 12명의 상인DJ들 9개 시장에서 모인 12명의 DJ들은 바쁜 생업 속에서도 라디오방송을 성심성의껏 준비하고 있다.
ⓒ 노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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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본다. 불패 DJ 이준재, 아이쿠 DJ 정지원, 춘우 DJ 이하나, 올리버 DJ 김찬미, 낭만 DJ 한창석, DJ 이은정, DJ 서윤서, 철이 DJ 박노철, 공이 DJ 김종택, 친절 DJ 김수철, 별 DJ 강희수, 마윈 DJ 임경민...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방송은 이제 302회를 넘어섰다.

스튜디오를 나서자 시장 전체에 윤도현 밴드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춘우 DJ가 선곡한 <나는 나비>였다.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나와 윤종화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려 한다. 그동안 고마운 분들 덕분에 코로나 시국에서도 든든한 삶의 벙커를 마련할 수 있었고 줄소송도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99.9가 채웠어야 할 경기도 곳곳의 삶의 이슈들을 하나씩 둘씩 다루고자 한다. 첫 방송은 수원 남문시장에서,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고자 한다. 

태그:#수원남문시장, #라디오스타, #해직언론인, #제보자, #내부고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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