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시그널 시즌3> 화면 갈무리

<하트시그널 시즌3> 화면 갈무리 ⓒ 채널A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세 시즌이 제작된 채널A 연애 예능 프로그램 <하트시그널>. '시그널 하우스'에 입주한 일반인 청춘남녀의 '썸'을 리얼하게 다뤘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출연자들도 연예인 못지않게 화제를 모았다.

<하트시그널>은 기존 연애 리얼리티와 같은 듯 다른 신선한 매력으로 사랑받았지만 그럼에도 탄식이 절로 나오는 클리셰를 잃지 않았다. '남성은 운전석–여성은 조수석'이 바로 그것이다.

여성 출연자들은 운전하지 않았다. 면허가 없어서인지, 장롱 면허인지, 그냥 운전을 안 하고 싶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시청자 입장에서 포착한 사실은 하나, 여성들은 쭉 조수석에 앉았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 방영된 시즌3에서 차량 내 촬영 장면은 총 41회였지만 여성이 운전석에 앉은 장면은 단 한 번도 없었다.

41회 동안 단 한 번도

첫 등장부터 여성과 남성은 확연히 대비됐다. 하이힐을 신고 힘들게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박지현과 이가흔, 택시를 타고 온 서민재. 반면 남성 출연자는 모두 제작진으로부터 제공(협찬)받은 차량을 운전해서 도착했다.

'시그널 하우스' 입주 첫날, "태워 드릴까요?" 천인우가 먼저 나서서 박지현에게 카풀을 제안한다. 시즌2에선 여성 출연자가 카풀을 구하는 장면이 있었다. 제작진은 여성에게 차키를 주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타인(남성)에게 의존해서 이동하게끔 했다. 의존하는 여성은 언제나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하이힐은 운전하기엔 다소 적합하지 않은 신발 종류다.
 
 〈하트시그널 시즌 3〉, 〈하트시그널 시즌2〉 화면 갈무리 ⓒ 채널A

〈하트시그널 시즌 3〉, 〈하트시그널 시즌2〉 화면 갈무리 ⓒ 채널A ⓒ 채널A

 
여성이 위태로운 하이힐 위에 발을 맡긴 한편, 액셀러레이터 위에 편히 발을 댄 남성은 자연스럽게 목적지를 결정한다. 조수석에 앉은 여성은 어디로 가는지 묻고, 운전자에게 "내비게이션을 잘 본다"며 사소한 것을 칭찬하고, 귤도 까주고 생수병도 따서 건넨다. 이 구도는 전통적인 남녀관계의 은유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남성과 그를 성심껏 격려하고 따르는 여성'.
 
출연진은 모두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었고 제작진도 초반에는 그 매력을 어필했다. 그러나 '썸' 단계에 들어서자 점점 개성과 무관하게 여자친구/남자친구에 기대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일정한 역할 수행은 고정되어 있고, 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가 다시 이성적 매력과 직결됐다. 그래서 'H자동차 여성 최초 대졸 공채 정비사'라는 서민재도 운전대 한 번 직접 잡지 못하고 차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는 여성이 된 것이다.

시즌 1~3 출연진을 통틀어 유일하게 운전한 여성이 딱 한 명 있다. 시즌2의 오영주는 김현우와 데이트 중 자신이 운전하겠다며 스포츠카 핸들을 잡았다. 사우디아라비아적 세계관을 구축한 <하트시그널>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무서운데, 우리 살아서 갈 수 있는 거지?" 김현우가 차에 타기도 전에 농담을 던졌다. 그러면서 스포츠카 기어 변속을 낯설어하는 오영주를 도왔다. 그는 조수석에 앉았음에도 운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했다. 자리가 달라졌을 뿐 액셀러레이터 놓인 발은 여전히 여성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오영주가 유일하게 운전한 여성이었다면, 유일하게 운전하지 않은 남성은 시즌3 김강열이었다. 김강열과 박지현은 제주도 데이트를 하며 자동차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하트시그널>의 모든 여성이 운전하지 않는 건 당연히 여겼으면서, 단 한 명의 남성이 운전하지 않자 의아하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여성이 절대 차를 몰지 않는 이상한 세계관, 사실 TV 밖에서 살아가는 대중도 그 일원이었다.
 
여성들의 유능함 소거해버린 '시그널 하우스'
 
 ⓒ 채널A〈하트시그널 시즌2〉 화면 갈무리

ⓒ 채널A〈하트시그널 시즌2〉 화면 갈무리 ⓒ 채널A

 
남성 출연자가 비싼 승용차를 협찬받아 자신의 남성성을 뽐낼 때, 여성 출연자 손에는 미용도구가 쥐어졌다. 협찬 물품이 성별에 따라 달랐고, 이는 각각 '운전'과 '꾸밈'이라는 양식으로 연출됐다. 

출연자들은 대부분 고학력에 전문직을 가진 신세대 여성이었건만 '시그널 하우스'에 들어서자 유능함이 사라진 것이다. <하트시그널>이 정의한 21세기 '정상연애'를 따르자면, 자고로 여성은 차키를 가진 남성의 호혜에 기대야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미용도구로 자신의 '여성성'을 어필해서. 

그저 운전, 그저 자동차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남에게 의탁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힘으로 자동차를 통제하며 내 갈 길은 내가 정하는 것, 바로 '자유'와 연결된다.

지난 17일, <하트시그널> 시즌2와 시즌3 출연진의 우정과 일상, 연애를 다루는 관찰 예능 <프렌즈>가 방영됐다. 연애 대상 찾기가 소거된 기획에서조차 여성들은 남성 옆 조수석에 앉게 될까? 아니면 하이힐을 벗어 던지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될까? 기획 의도가 달라진 만큼 세계관의 방향도 바뀌었을지 지켜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 청년언론 <고함20>에도 실립니다.
하트시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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