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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한국 SF 영화 <승리호>는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우주선 '승리호'에 탑승한 4명의 승무원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이들 캐릭터는 각자 다른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는데, 그중 로봇 '업동이(유해진 분)'는 돈을 모아서 인공피부 이식 등을 시술받아 인간의 외형을 갖추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 <승리호> 스틸 컷. 로봇 업동이(오른쪽)는 돈을 모아 인공피부 이식 시술 등을 받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승리호> 스틸 컷. 로봇 업동이(오른쪽)는 돈을 모아 인공피부 이식 시술 등을 받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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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가 진행될수록 업동이가 인공피부나 모발을 이식받으려는 이유가 조금씩 드러난다. 극 중에서 승리호 탑승자 이외의 인물이 로봇이라는 이유로 업동이를 마치 '인간 이하의 존재'인 것처럼 대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또한 남성형 목소리를 내는 로봇이라서 남성인 것으로 인식되는데, 자아를 가진 로봇 업동이가 영화 후반부에서 선택한 외형은 여성의 모습이었다(이 부분에서 관객들에게 익숙한 여성 배우의 깜짝 출연을 볼 수 있다).

특히 군용 로봇이었던 업동이를 장 선장(김태리 분)이 '폐기장에서 주워왔다'는 대사를 듣게 된 이후에는 업동이 캐릭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말하자면 업동이는 여러 이유로 차별받던 신세였고, 이에 자신의 정체성에 맞는 외형을 찾으려는 '트랜스 젠더' 또는 '트랜스 휴먼' 캐릭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 아동 캐릭터로부터 '언니'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달라진 업동이의 태도, 전투 기능이 발전되지 않는데도 굳이 여성 인간의 외형을 갖추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쓴 그의 시도를 보면.

정체성 찾아가는 영화 캐릭터? 이미 한국 사회의 구성원

업동이는 영화 <승리호> 속 캐릭터이지만, 한국 사회의 구성원 중에서 그처럼 차별에 맞서는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2020년 12월 출간된 책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는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2명의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담았다. 
 
꿈꾼문고에서 출간된 2권의 책 <내 이름은 말랑/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표지 사진
 꿈꾼문고에서 출간된 2권의 책 <내 이름은 말랑/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표지 사진
ⓒ 꿈꾼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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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트랜스젠더 말랑과 샤이앤이 직접 자신의 삶을 만화로 그려냈다. 책에서는 흔히 '남성에서 여성으로, 또는 반대로 성별을 바꾸는' 사람들로 오해하곤 하지만, 사실 트랜스젠더는 그저 자신의 성별 정체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짚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한 저자들은 자신의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다를 때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의 괴로움을 설명하기도 한다.

시스젠더(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같은 사람)라면 잘 알지 못할 개념 중에는 '패싱'도 있다. 외모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보이는 것을 '패싱'이라고 하는데, 만약 누군가가 외모상 남성으로 보이면 남성으로 패싱 된 것이라고 한다.
 
"치마와 화장, 인형 놀이를 좋아한다고 다 여자가 아냐. 바지와 운동, 짧은 머리를 좋아한다고 다 남자가 아냐. 젠더라는 건 그런 기준으로 누가 정해주는 게 아냐. 네가 너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가 가장 중요해." -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24쪽 중에서

시스젠더도 성별 관념에서 벗어나는 외모로 고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패싱 되든 되지 않든 이중고를 겪게 된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성별 정체성과 다른 외모를 한 트랜스젠더를 향해 "네가 남자(여자)라고?" 같이 성별을 잘못 받아들이는 '미스젠더링'이 일어나는 경우도 잦다.

이를 피하기 위해 외모를 꾸며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맞게 패싱 되더라도 '그런 외모 꾸미기를 하고 싶어서 트랜스젠더가 된 거야?' 같은 의문이 따라붙기도 한다. 맨박스나 외모 코르셋은 대부분 성별 이분법에 의한 편견에서 기인한 것인데, 피해자 중 한 집단인 트랜스젠더에게 문제가 제기되는 셈이다.
 
"애초에 단지 인형 놀이가 좋다는 이유로, 부모와 연 끊을 각오를 하고, 학력·경력 단절을 겪고, 엄청난 돈을 들이고, 친구들을 다 잃는 것을 감수하고, 힘들게 트랜스젠더로 살기로 결심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142쪽 중에서

변희수 하사, 숙명여대 합격자 A씨 사례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본문 중 한 부분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본문 중 한 부분
ⓒ 꿈꾼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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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권의 책은 트랜스젠더를 향한 많은 오해와 편견을 하나씩 차근차근 짚어나가며 실제로 이들의 삶이 어떤지 보여준다. 저자들이 직접 자신이 겪은 디스포리아와 고민, 커밍아웃을 하려는 사람과 트랜스젠더의 친구, 가족을 위한 조언 등도 담겼다. 호르몬 치료와 트랜지션 수술, 이후 성별 정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트랜스젠더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게 필요하지 않다. 그저 어떤 상황이든 날 받아주고 곁에서 안아줄 몇 명이면 된다. 그게 가족이면 더 바랄 게 없다." -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68쪽 중에서

각각 트랜스젠더 남성, 여성이 쓴 이 책은 트랜스젠더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읽더라도 이해하기 쉽게 차근차근 하나씩 독자에게 대화를 건네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또한 논바이너리, 인터섹스 등 기존 '남-여'로만 나뉘던 성별 구분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서술도 기억해둘 만한 지점이다.

이미 한국에서는 지난 2020년 트랜스젠더가 차별을 겪은 사례를 많은 사람이 목격한 바 있다. 군 복무 중이던 변희수 하사는 성전환 수술 후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군 생활을 마쳐야 했으며, 성별 정정까지 끝낸 숙명여대 합격자 A씨는 쏟아지는 혐오발언에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최근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이 학교, 직장, 고용,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차별을 겪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관련 기사 : 시선 두려워 공중화장실 이용조차 포기... "트랜스젠더 혐오 심각" http://omn.kr/1s0sd).
 
"누군가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누군가는 직장에서 해고되며, 누군가는 친구를 잃고, 누군가는 생명을 버린다. (중략)

용기 있는 두 작가의 펜이 혐오자들의 낡고 녹슨 칼날을 부러뜨리길 기원하며, 이 책을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 변희수, 책 추천사 중에서

지난 200여 년간 인류 문명은 '백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비장애인 남성'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좁은 울타리를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흑인이 노예이던 시절은 과거가 됐고,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이 알려지는 중이고,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대한 이해도 점점 더 깊고 넓어지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아직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차별이 남아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말이다. 

<승리호>를 보면서 업동이의 사연에 공감했던 사람이라면, 현실의 차별이 잘못됐다는 사실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많은 혐오와 차별이 누군가를 바라볼 때 '내가 잘 모르기에 나와 멀어 보이는 대상'이라고 생각해서 벌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가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내 이름은 샤이앤,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를 읽고 조금 더 알아가려는 노력을 하며 대화를 시도한다면, 아마 업동이도 무척 반가워할 것 같다.

[세트] 내 이름은 샤이앤 + 내 이름은 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 전2권

말랑, 샤이앤 (지은이), 꿈꾼문고(2020)


태그:#트랜스젠더, #성소수자, #차별없는_세상을_위하여, #내이름은샤이앤_트랜스젠더입니다, #내이름은말랑_트랜스젠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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