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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이기주의 네팔 이름으로 '새순'이라는 뜻)를 처음 본 것은 지인의 결혼식이었다. 한국 사람이 네팔어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했다. 네팔이 너무 좋아 여행 왔다가 눌러살게 된 무나는 낯설고 열악한 생활환경에도 "전생에 네팔인이었나 싶을 정도로 영혼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고 말했다.
네팔 문학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도 좋았다. 한국어 선생님인 무나를 네팔 학생들도 좋아했다. 무나와 함께한 시간은 숱한 인연들로 얽히고설키며 부부의 연으로 단단하게 이어졌다."

"네팔에서 크고 작은 도움이 필요할 때면 모헌은 언제나 손길을 내밀었다.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 다 있나?' 생각했다. 성품 자체가 부드럽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그의 모습에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네팔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부부로 살 때도 모헌은 다른 이들을 먼저 생각했다. 한국에 와서도 늦은 퇴근 후 저녁밥도 미뤄둔 채 친구의 부탁을 먼저 처리하는 모습이 때론 나를 속상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해 라디오, 신문 등에 기고를 많이 한 모헌은 네팔인 작가이자 번역가다."


국내 이주노동자들의 시를 묶은 첫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가 최근 발간됐다. 69편의 시를 쓴 35명의 시인은 모두 네팔 출신 노동자로, 한국-네팔인 부부인 이기주·모헌 까르끼가 번역을 맡았다. 지난달 11일 이들 번역가를 직접 만나 출간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69편의 시를 쓴 35명의 시인은 모두 네팔 출신 노동자다.
 사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69편의 시를 쓴 35명의 시인은 모두 네팔 출신 노동자다.
ⓒ 삶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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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2017년 한국과 네팔의 문인들은 양국을 서로 방문하며 문학·학술대회를 열었다. 명지대에서 열린 국제문학인대회에 네팔에서 이름 있는 시인인 스러원이 방문했고, 그 소식을 들은 한국에 있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이 만남을 요청했다.

이기주 : "행사가 늦은 시간에 끝났는데 동대문에 모여 있다는 연락이 와서 가보니 그곳에 모인 분들이 한국에서 문학을 매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시를 쓰는 분들이었죠. 즉석에서 시 낭송회를 하고 이야기도 나누며 '책으로 출판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과 문학·예술로 교류하며 후원해 온 정대기 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 총장대행의 지원과 시 모임 중 하나인 '잇떨 아와즈'에 참여하고 있는 뻐라짓 뽀무가 중간역할을 했다.

뻐라짓 뽀무는 네팔 이주노동자 시 모임들과 에스엔에스(SNS) 대화방으로 소통하며 시를 모았다. 시를 모으기까지 3년여의 시간이 걸렸고, 지난해 2월 중순부터 학술대회 통역을 맡았던 이기주에게 메일로 전달됐다.

"작가들의 감정, 정서까지 담고 싶었어요"
 
이기주씨는 "노동이라는 고된 시간 속에서도 문학을 매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창작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몇십 년 전 우리의 노동문학이 떠올랐다"라며 "네팔의 노동문학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번역한 이기주씨 이기주씨는 "노동이라는 고된 시간 속에서도 문학을 매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창작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몇십 년 전 우리의 노동문학이 떠올랐다"라며 "네팔의 노동문학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 김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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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은 100개 넘는 종족이 각자의 언어를 가진 국가다. 시는 공용어인 네팔어로 쓰였지만, 번역은 '머리가 깨질 만큼' 힘든 작업이었다. 시인들이 속한 종족어가 섞여 번역에 애를 먹기도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모를 만큼 난해한 작품들을 만날 때면 후회가 밀려왔다.

"시에 쓰인 단어와 표현은 그 나라의 문화, 역사를 비롯해 모든 배경을 내포하고 있어요. 단락이나 행간에서, 전체적인 맥락에서 느껴지는 작가들의 감정이나 정서를 번역하는 데 중점을 두었죠. 수없이 소리 내 읽으며 같은 단어라도 시어나 운율에서 느껴지는 맛이 다른 부분들까지 신경 썼지요."

이기주는 "모헌은 '단어 하나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만, 작가들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단어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챙기는 등 한국어의 문맥에 맞도록 작업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모헌이 뜻의 이해를 돕고 맥락을 풀어주는 네팔어 사전 역할을 했지만, 서로 이견이 생길 때면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번역을 끝낸 후에도 '과연 이 시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이 앞섰다. 하지만 번역 과정이 너무 힘들어 원고를 넘길 때는 아쉬움보다 시원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 번역은 의역할 수밖에 없기에 내가 그분들이 표현한 것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나? 다른 것을 담아내는 것은 아닌가?' 고민이 많아 때론 안을 갈라서 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넘기고 나서는 걱정도 됐는데, 첫 독자인 정대기 선생님이 '소리 내서 읽어봤는데 너무 가슴에 와닿고 눈물이 났다'고 전화해 주셔서 안도했죠."

이기주는 "번역은 제2의 창작물이라 생각한다. 시 번역은 매 순간 영혼을 녹여낼 만큼 힘든 작업이기도 하지만 그 시에 딱 맞는 시어나 문장을 찾아냈을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한때 시인을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다시 쓰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란 틀에 가려진 내면 들여다봤으면"
  
이번 시집에 힘입어 2021년에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소설을 모아 번역,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있으며, 소설 <상록수> 번역도 마무리하여 네팔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번역한 모헌 까르끼씨 이번 시집에 힘입어 2021년에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소설을 모아 번역,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있으며, 소설 <상록수> 번역도 마무리하여 네팔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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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숨을 담보 삼아/한 뼘의 땅을 담보 삼아/죽음의 계약서에 서명하고/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고향을 떠나 사람을 사고파는 도시에서/전쟁에 이기려고 용감한 군인이 되어/삶이 전쟁터에서/ 페인트를 칠하고/전선을 당기면서/용접을 하고/연마를 하면서/ 나는 배를 만들고 있다" - 수레스싱 썸바항페이 '나는 배를 만들고 있다' 중

"친구야,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여기는 재스민과 천일홍들이 애정을 뿌리며 웃지 않는다/새들도 평화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여기는 사람들이/ 기계의 거친 소음과 함께 깨어난다/하루 종일 기계와 함께 기계의 속도로 움직인다" - 서로즈 서르버하라 '기계' 중
 
이기주, 모헌은 시집을 통해 이주노동자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길 바란다.

이기주 : "이번 시집을 번역하며 노동이라는 고된 시간 속에서도 문학을 매개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창작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몇 십년 전 우리의 노동문학이 떠올랐어요. 네팔의 노동문학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시집으로 한국사회가 바라보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이나 인식이 조금은 달라졌으면 좋겠어요."
모헌 : "열악한 인권, 고된 노동 등 이주노동자란 틀에 갇혀 가려진 그들의 영혼과 내면을 바라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눈부신 발전을 해도 가난과 결핍은/ 어디에나 넘쳐난다/길거리에도 사거리에도 골목 구석구석에도/하여/할머니의 구루마는/매일 저녁마다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수스마 라나허마 '할머니의 구루마' 중
 
"번역 중인 <상록수> 네팔에서 출간하고 싶어"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를 번역한 모헌 까르끼, 이기주씨는 시집을 통해 이주노동자란 틀에 갇혀 가려진 그들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 모헌 까르끼, 이기주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를 번역한 모헌 까르끼, 이기주씨는 시집을 통해 이주노동자란 틀에 갇혀 가려진 그들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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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주·모헌의 마음이 독자들에게 닿았는지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는 출간과 함께 큰 관심을 받았다. 이번 시집에 힘입어 2021년에는 네팔 이주노동자들의 소설을 모아 번역, 출판할 계획을 하고 있다. 몇 해 전 제안받고 시작한 소설 <상록수> 번역도 올해 마무리하여 네팔에서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김선향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 모헌은 "2003년부터 몇 년간 한국에서 살 때 한국 작가들과 함께 한국 동화와 동시를 번역했는데 그때는 한국어를 잘 몰라도 열정 하나로 해냈던 것 같다. 한국의 문학과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도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나중에 안양에서 배울 기회가 생겼는데 그때 만난 선생님과 공지영 작가의 작품 번역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키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라며 "한국에 와서 다시 연락했지만 안 됐다. 그분이 혹시라도 기사를 보신다면 연락 달라"고 부탁했다.

·모헌 까르끼
네팔의 중학교 교사를 거쳐 수년간 NGO 활동을 하다 2003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일하며 동화와 동시 등 한국의 문학작품을 번역했고, 귀국 후에는 출판사를 운영하며 한국의 전래동화 등 다수를 번역 출판했다. 현재 한국에서 창작 활동을 하며 안산시 계간지인 <안산하모니> 네팔어 번역을 하고 있다.

·이기주
한국에 온 네팔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네팔과 인연을 맺었다. 네팔 여행 후 코이카(KOICA) 봉사단으로 파견돼 네팔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임기 후에는 네팔EPS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담당했으며 현재는 다문화센터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며 통역 및 문학작품 번역을 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경기다문화뉴스에도 게재됩니다


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뻐라짓 뽀무 (지은이), 모헌 까르끼, 이기주 (옮긴이), 삶창(삶이보이는창)(2020)


태그:#여기는 기계의 도시란다, #네팔 이주노동자 시집, #이주노동자, #노동문학, #번역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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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다문화뉴스 등에 기사를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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