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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은 ‘절대 평등’의 산.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단순히 자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태곳적부터 역사가 숱하게 바뀌었어도 한결같이 광주를 굽어 살펴 왔다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은 ‘절대 평등’의 산.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단순히 자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태곳적부터 역사가 숱하게 바뀌었어도 한결같이 광주를 굽어 살펴 왔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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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토의 등줄기,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를 이루며 힘차게 남쪽으로 내달리다가 전라도와 경상남도의 경계지점에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지리산을 치솟게 했다. 지리산에서 빠져나온 한 줄기의 산맥이 광주에 이르러 한번 더 크게 용트림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무등산(無等山). 무유등등(無有等等). 무등등(無等等).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 높고 낮음이 존재하지 않은 '절대 평등'의 산. 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단순히 자연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광주를 품에 안은 무등은 먼 옛날부터 광주의 수호신, 곧 '진산(鎭山)'으로 여겨져 왔다.

1977년 봄, 무등은 결코 '평등' 하지 않았다

무등산은 산세가 유순하고 사방 어느 곳에서 보아도 모나지 않고 둥그스름하여 '광주의 어머니 산'으로 불리며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태곳적부터 역사가 숱하게 바뀌었어도 한결같이 광주를 굽어 살펴 왔다. 그런 '무등의 품'에서 불과 43년 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차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77년 4월 21일 자 경향신문 보도. 사건의 원인이 된 방화에 대한 내용은 없고 사제총·해머·낫 등 자극적인 내용으로 제목을 뽑았다
 1977년 4월 21일 자 경향신문 보도. 사건의 원인이 된 방화에 대한 내용은 없고 사제총·해머·낫 등 자극적인 내용으로 제목을 뽑았다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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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발생한 지 28년이 지난 2005년에 한 방송사 탐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다뤘었고 43년이 지난 올해 11월 모 공중파 방송에서 다시 한 번 조명한 바 있는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이다.

1977년 4월 20일. 유신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던 봄날의 오후였다. 광주시 동구청의 무허가 건축물 철거반원 7명이 무등산에서도 풍광이 수려한 증심사 뒤쪽 계곡인 덕산골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덕산 계곡에는 약 20여 채의 무허가 건물이 있었다. 건물이라기보다는 돈이 없어 오갈 데 없는 도시 빈민들이 산속으로 들어와 살기 위해 판자를 덧대 지은 움막이었다. 그들 중에는 전남 영광에서 광주로 올라와 낮에는 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고시공부를 하던 박흥숙(1957~1980)의 가족도 있었다.
   
무등산 증심교에서 좌측으로 가면 덕산계곡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무등산 증심교에서 좌측으로 가면 덕산계곡으로 가는 입구가 나온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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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던 박흥숙은 영광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폐결핵을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여동생은 내장산의 절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어렵게 연명하였다. 가난 때문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박흥숙은 홀로 광주로 올라와 양동에 있는 철공소에서 열쇠수리공 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학업에 정진하여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헤어진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에 밟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연속되었다. 다시 가족들이 모여 살기로 했다. 그러나 시내에서 다 함께 살 만한 집을 구할 수 없었다.

박흥숙은 무등산 덕산계곡으로 들어와 직접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60여 일 동안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해 겨우 방 1개와 부엌이 달린 집을 완성했다.

"돼지 움막보다 못한 토막집이었으나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맨손으로 집을 짓느라 손발이 부르텄으나 연고도 바를 처지가 못 됐다. 조그맣고 보잘것없는 집이었으나 어머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라고 박흥숙은 그때의 심정을 소회했다.
 
1970~80년대 속칭 ‘무당골’로 불렸던 덕산계곡은 무등산에서도 경관이 좋아 시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와 종종 굿을 하기도 했다
 1970~80년대 속칭 ‘무당골’로 불렸던 덕산계곡은 무등산에서도 경관이 좋아 시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와 종종 굿을 하기도 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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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칭 무당골로 불렸던 덕산계곡은 무등산에서도 경관이 좋아서 시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올라와 종종 굿을 하기도 했다. 덕산골에 '무당촌'이라는 왜곡된 이름이 덧씌워진 까닭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박흥숙 일가를 포함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굿을 하러 온 사람들에게 제물과 편의를 제공하고 사례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며 궁핍하게 살았지만 결코 무당은 아니었다.

야만의 시대, 유신정권의 개발독재가 낳은 비극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 살았던 박흥숙 일가는 잠시나마 행복했다. 낮에는 철공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했다. 가난을 극복하고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법관이 되기로 결심하며 캄캄한 산골짜기에서 '형설지공'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21살 청년 박흥숙에게 이런 최소한의 행복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무허가로 지은 건물을 철거하라는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박흥숙은 당장 이사 갈 곳도 없고 맨손으로 고생 고생해서 지은 집을 스스로 부술 수는 없었다.
   
무등산 덕산계곡에는 아직도 여기저기에 오래전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무등산 덕산계곡에는 아직도 여기저기에 오래전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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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1977년 4월 20일 오후, 동구청 소속 철거반원 이른바 '망치 부대' 7명이 덕산골에 들이닥쳤다. 이미 구청에서 여러 차례 강제 철거를 했기에 20여 채의 무허가 건물 중 박흥숙 일가를 포함해 4집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몇 번의 계고장을 받았던 터라 박흥숙은 철거반원들이 나오자 살림살이를 꺼내놓고 순순히 철거에 응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철거반원들은 건물을 부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폐자재를 이용해 다시 집을 짓지 못하도록 불을 질러 버렸다.

불길이 치솟자 박흥숙의 어머니가 갑자기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려 했다. 집안 천장에 온 가족들이 생고생해서 번 돈 30만 원을 보관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들에게 30만 원은 어머어마한 거금으로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철거반원들이 밀치는 바람에 어머니는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박흥숙이 고시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한 것을 두고도 마치 철거반원들과 싸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한 것처럼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박흥숙이 고시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체력 단련을 한 것을 두고도 마치 철거반원들과 싸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한 것처럼 ‘무등산 타잔’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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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경을 지켜본 박흥숙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박흥숙의 집을 불태운 철거반원들은 몇십 미터 떨어진 다른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동조차 못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처하고 있었기에 '제발 불은 지르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했다. 그러나 잠시 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환자들의 집마저 불타오르는 것을 본 박흥숙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분노한 박흥숙은 철공소 다니던 시절에 만들었던 사제총을 꺼내 들었다. 총이라 해봤자 산속에 짐승들이 많아 이들을 쫓기 위해 만들어 뒀던 호신용 딱총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무등산에는 멧돼지와 늑대 등 사나운 짐승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겁에 질린 철거반원 7명 중 5명을 위협해 전깃줄로 묶어서 구덩이에 이들을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가난한 사람은 이 나라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절규하며 쇠망치로 철거반원들의 뒤통수를 내리쳐 4명을 살해했다.
  
1980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형장의 이슬로...

유신 정권이 마침표를 향해 가던 1977년 4월, 그들은 왜 그렇게 무자비한 철거를 하게 됐을까. 그해 10월 광주에서는 제58회 전국체전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회식에 참석한 뒤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을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에 대비해 광주시에서는 대대적인 무등산 정화 사업으로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고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도록 불까지 지른 것이다.

유신 권력과 결탁한 언론에서는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사건의 본질은 '무자비한 강제철거와 방화'가 원인이었음에도 무당촌을 사수하려는 집념에 사로잡힌 '무당의 아들'이 제단을 차려둔 집을 부수려 하자 난동을 부린 것처럼 왜곡 보도하였다.
 
기자들과 경찰에 둘러싸인 채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박흥숙. 박흥숙은 사건 직후 서울로 가던 중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하고 본인도 자수했다. 박흥숙이 신고한 사람은 진짜 간첩으로 밝혀졌다
 기자들과 경찰에 둘러싸인 채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박흥숙. 박흥숙은 사건 직후 서울로 가던 중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하고 본인도 자수했다. 박흥숙이 신고한 사람은 진짜 간첩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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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숙이 고시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체력 단련한 것을 두고도 마치 철거반원들과 싸우기 위해 무술을 연마한 것처럼 '무등산 타잔'이니 '무등산 이소룡'이니 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

유신정권 말기, 아무런 대책 없이 밀어붙인 강제 철거라는 국가폭력에 맞서 저항하던 21살 가난한 청년은 사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YWCA를 비롯한 사회단체와 유명 인사들이 참여한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그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도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청년의 삶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1980년 12월 24일. 무등의 피를 먹고 탄생한 유신정권의 계승자, 제5 공화국은 박흥숙의 사형을 집행했다. 죽음 직전, 박흥숙은 자신을 무등산에 묻어 달라 했지만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고 광주시 외곽 한 기독교 묘지에 묻혔다.
 
가죽 수갑으로 양손과 몸이 묶인 채 재판을 받고 있는 박흥숙. 박흥숙은 재판 중 최후진술을 통해 “형제를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라고 참회했다
 가죽 수갑으로 양손과 몸이 묶인 채 재판을 받고 있는 박흥숙. 박흥숙은 재판 중 최후진술을 통해 “형제를 잃고 애통해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이 자나 깨나 눈앞에 어른거려 날이 갈수록 괴롭고 괴롭다. 나의 죄는 백번 죽어도 사죄할 길이 없다”라고 참회했다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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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입니까!"

40년 전 야만의 시대. 개발독재가 낳은 '강제철거'라는 극단적 국가 폭력에 맞서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난한 청년 박흥숙의 절규가 아직도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공허하게만 들리는 2020년의 세밑이다.

태그:#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 #무등산 박흥숙, #도시빈민, #강제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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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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