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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 일행 앞으로 여객선이 보인다.
피해자 일행 앞으로 여객선이 보인다. ⓒ 한톨
 

제주의 '만들어진' 간첩들 역시 제주만의 특징이 있다. 많은 제주도민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중 상당수가 일본에서 애써 모은 돈을 제주의 학교 건립이나 마을 발전을 위해 기부했다. 그러나 공안기관에서는 교포들의 애향심을 북한의 공작금이라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간첩 사건에 평범한 도민부터 유명 인사들까지 많은 사람이 연루됐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사건이 있다.

첫째는 1965년에 발생한 소위 민족민주혁명당(오진영 사건) 사건이다.

과거 제주 시내에는 고택수 의원(현 제주공항게스트하우스 자리)이라는 병원이 있었다. 제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운영하던 고택수씨는 1964년 일본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에는 외국 유학으로 박삭 학위 이상을 받은 의사가 드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사 학위 취득 그 자체로 큰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고택수씨의 박사 학위 취득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고택수씨와 함께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개 한림읍 명월리 사람들이었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64년 도쿄올림픽을 구경하고 온 사람들이다. 공안당국은 이들 중 오진영씨가 일본에서 만난 친척이 조총련 관련자이고 이 사람으로부터 받은 용돈이 공작금이라며 고택수씨 포함해 함께 만났던 지역인들을 간첩으로 조작했다.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나왔다.

둘째는 1971년에 김녕중학교 교장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이다. 어릴 적 잘 알던 재일교포가 오랜만에 제주도를 방문해 김녕중학교 건물 증축비를 지원해 주었는데 이 돈이 북한의 공작비로 둔갑한 것이다.

셋째는 1977년 강우규 사건으로 재일교포 사업가를 비롯한 제주교대 학장과 국회의원 비서 등 11명이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대규모 사건이다. 고 강우규씨를 비롯한 6명은 복역 후 자신들의 사건이 조작되었다며 재심을 신청하였고, 사건 발생 38년이 지난 2016년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제주교육대학 김문규 학장과 그의 친구인 재일교포사업가가 차 한 잔 함께 마신 것이 포섭과 회합으로 둔갑해 졸지에 간첩까지 된 억울한 사건이었다.

이 외에도 1968년 일명 만년필 간첩 조작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지난 2019년 8월 4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김태주씨와 동생들의 삼 남매 사건도 있다. 일본에 살고 있는 사촌 동생으로부터 만년필을 선물 받았을 뿐인데, 이 만년필이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찬양하기 위해 제작한 김일성의 하사품으로 둔갑해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아쉽게도 김태주씨는 무죄 선고를 19일 앞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 사법부의 사죄를 듣지 못했다.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 34%가 제주 출신

제주사람이 연루된 조작간첩 사건은 적지 않다. 지금까지 제주에서 간첩으로 조작되었다가 무죄가 선고된 사람들은 확인된 사람만 김평강·허간회·양한병·양동우·오재선·오성재·김태주·강광보·임문준·허두복·김용담·강희철·이장형·오경대·고남일 등 십여 명이다. 이들은 모두 만들어진 간첩이었다.

2006년 천주교인권위원회 자료를 보면 전체 조작 간첩 사건 109건 가운데 34%인 37건의 당사자가 제주 출신으로 집계되었다. 제주도 인구가 전국 인구의 1%가량이라고 보면 인구 대비 두 세 배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조작간첩 사건에 유독 많은 제주사람이 연루된 이유는 무엇일까?

강광보의 구술 = "(생가가 없어진 것은) 내가 일본에서 와가지고 한 82년도인가 없어졌을 거야... 기억이 다 떠오르지. 건물이 두 채였거든. 다른 집은 방이 두 개였는데 우리 집은 방이 세 개, 집이 컸어. 소하고 말을 길렀어. 할머니도 살아계시고. 일본에 있을 때 집 생각 많이 났지. 옛날 내가 살던 곳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고향 생각이 없었으면 난 일본에 살았을 거야. 친구들은 다 거기 살고 있거든.

그런데 나는 일본 갈 적부터 일본에서 오래 살 마음이 없더라고. 그래서 상대방(아내)도 그런 사람을 골랐고. 내가 가자하면 올 수 있는 사람을. 그래서 내가 한국 들어온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고 왜 옛날 살아봤는데 또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그런데 왠지 난 일본에 정착할 마음이 안 생기더라고. 언젠간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그런 생각만 들었지. 그래서 저번에 (일본에) 갔을 때 그 친구가 나에게 말하더라고. 지금 영주권 주면 일본에서 살 수 있겠느냐고. 웃으면서 나는 말을 안 했지만 제주에 돌아온 것을 후회는 안 해."


강광보씨처럼 제주 조작 간첩은 돈을 벌려고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해 건너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건너간 일본 교포사회에는 다양한 국적과 이념이 있었다. 

특히 4.3사건 이후 살아남으려고 제주를 떠나 일본에 와 오래도록 남한과 북한 어느 국적도 선택하지 않고 무국적으로 사는 '조선적'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일본 해상의 태극기와 인공기  북한 청진항 소속 어로감시선 50t급 청진호를 타고 탈북한 김만철 일가족 11명이 정박해 있는 일본 쓰루가항에서 재일거류민단은 환영한다며 태극기를, 재일조총련은 북한으로 송환시키라며 인공기를 흔들며 해상시위를 하고 있다.
일본 해상의 태극기와 인공기 북한 청진항 소속 어로감시선 50t급 청진호를 타고 탈북한 김만철 일가족 11명이 정박해 있는 일본 쓰루가항에서 재일거류민단은 환영한다며 태극기를, 재일조총련은 북한으로 송환시키라며 인공기를 흔들며 해상시위를 하고 있다. ⓒ 재일본거류민단회보
 
제주도민을 비롯한 많은 한국인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거주하며 교포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처음으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 결성되어 재일동포의 귀국과 생활 돕기, 우리말 강습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후 조련의 좌경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주축으로 1946년 10월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민단)이 뒤늦게 결성되었다. 조련은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으로 재결성되었다. 당시 60만 명의 재일동포 가운데 80%가 조총련에 가입할 정도로 1970년대까지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 이유는 한국 정부에 비해 민족 교육에 적극적이었던 북한의 정책 때문이다. 또 4.3사건 등의 피해에 대한 반감으로 조총련에 가입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제주 사람들의 특징이 공안기관으로부터 조작 간첩 사건을 만드는 중요한 소재로 악용되었던 것이다. 4.3 당시 국가폭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이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한 조작 간첩 사건의 소재가 된 것이다.

 김용담의 구술 = "내가 일본에 64년도에 갔다가 잡혀 온 다음에 67년도에 또 갔지. 일본은 왜 갔느냐 하면 우리 형님도 있었고 누님도 있었거든. 그분들이 일본 오지 마라 했지만, 돈이라도 벌까 해서 갔었지. 갔다 오니까 71년도인가? 보안대에서 와서 물어볼 일이 있다고 해서 갔지. 보안대에서 일본 다녀온 우리 친척에게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친척이 일본 다녀온 내용을 아느냐고 해서 모른다고 했지. 친척이라도 먼 친척이니 잘 모르거든. 그 친척이 일본에서 무슨 기계를 가져왔다는 소식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하니까 '그러면 돌아가 있으라. 우리가 필요하면 다시 부르겠다' 그래.

아, 며칠 뒤에 다시 불러서 보안대에 가니까 일본 간 내용을 취조하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일본에서 왔을 때 친구들 누구누구 왔다 갔냐고 물어. 아, 누구누구였다고 하니까, 그다음에는 무슨 얘기했냐고 물어. 일본 공장에서는 무슨 일을 했냐고 해서 다 대답했지. 그랬더니 보안대 수사관이 갑자기 내가 그 친구들에게 무슨 교육을 시켰다는 거야. 나는 그런 거 없다 하니 일본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불러다가 조사한 거야. '너 용담이한테 무슨 교육을 받았냐'라고 물었대. 그래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하니 고문을 하면서 '용담이는 교육을 시켰다는데 너는 왜 안 받았다고 하냐'. 그래도 안 했다고 하니 매를 두드리고 해가니까 매에 못 이겨서 거짓으로 '아 그러면 너네가 알아서 다 하라'라고 하니 수사관들이 조사서를 꾸며가지고..."


사실 일본 교포사회에서 사상이나 이념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념보다 혈연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누가 민단이냐, 누가 총련이냐를 크게 구분 짓지 않았다. 제사, 명절이 다가오면 한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눴고, 행사가 있거나 결혼식이 있다면 모두 모여 축하했다. 그곳에 이념은 없었다. 정작 일본 교포사회에는 없었던 이념, 분단을 만든 것은 바로 한국 정부와 공안 기관이었다.

간첩으로 만들기에 제격인 사람들
  
 밀항시절 일본에서 함께 만났던 고 오재선, 김평강, 강광보씨가 식사 후 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제주로 돌아와 모두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밀항시절 일본에서 함께 만났던 고 오재선, 김평강, 강광보씨가 식사 후 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제주로 돌아와 모두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 변상철
 
일본에 다녀온 제주인들은 공안기관의 조사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다녀온 사람 중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이 없었고 그 가족과 친척 중 총련계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공안기관은 일본 친인척 중 총련 가입자들을 조사해 그들에게 포섭되어 활동한 것으로 조작해 간첩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패턴이었다.

강광보의 구술= "내 수사 기록을 보니 김철중이라는 사람이 내 사건을 고발한 걸로 돼 있더라고. 그분(김철중)이 먼저 보안대에 끌려가서 조사받았는데 조사받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정보를 달라고 하니까 자기 아는 대로 일본에 간 사람들 삼양에 누구, 화북에 누구, 조천에 누구, 어디 누구 이렇게 갔다고 한 모양이야. 그러니까 수사관들이 도저히 저걸로는 기소가 안 되겠으니 내보내줘 한 거야.

그러면서 조건을 걸었는데 그 조건이 뭐냐면 주변에 일본 갔다 온 사람들 다 확인해서 알아오라고 한 거야. 그래서 제보한 사람들 잡아다가 일단 조지는 거야. 나도 그런 사람 봤거든. 김철중이라는 사람 나는 모르고 이 형님(김평강)은 알아. 같은 삼양이니까. 삼양일동 사람이거든. 초등학교 후배. 지금은 죽었어. 그런데 그렇게 협조하던 김철중도 나중에 다시 조사를 받았어. 조사받을 때 죽도록 맞아가지고 결국 먼저 죽었지."


김평강의 구술= "그 사람이 본래가 아이들 가르치는 걸로 총련학교를 다녔주게... 그걸 자기가 캄프라치(협상) 하기 위해서 와서 (경찰에서) 불어버린 거지. (김철중에 관한 감정은?) 미워 미워 (웃음)"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이름, 용서하지 못할 기억이 있다. 강광보, 김평강씨는 여전히 자신을 음해하고 모함했던 삼양의 김철중이라는 사람이 밉다고 했다. 김철중은 제주 밀항 경력자 여러 명의 정보를 경찰과 수사기관에 제보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강광보씨였다.

그러나 김철중도 엄밀하게 보면 피해자였다. 김철중은 일본에 있을 때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민족학교에 잠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제주에 돌아왔을 때 공안기관에서 그 사실을 알고 그를 간첩으로 몰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그를 프락치로 활용했던 것이다. 권력이 안보라는 이름의 공명심에 사로잡혀 실적의 노예가 되어버린 전형적인 예다.

강광보씨는 1979년 일본 경찰에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도 셋이나 있었다. 아이들이 이미 민단 학교에 다니고 있던 중이라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일본 생활이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영주권을 신청하면 일본에 계속 살 수 있었지만 한시도 고향을 잊지 못한 그는 갈등했다.

그렇지만 일본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그동안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집안의 독자(獨子)였던 그는 부모와 조상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한국행이 그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바로 같은 밀항자 출신의 제보 때문이었다.
 
 강광보씨 부모와 조상들을 모셔놓은 가족묘지. 그는 가족을 위해 귀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강광보씨 부모와 조상들을 모셔놓은 가족묘지. 그는 가족을 위해 귀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 변상철
   
강광보의 구술 = "간첩 사건 나고 많이 놀랐지. 마을이 작잖아요. 마을이 작으니까 나중에 들은 얘긴데 그땐 자동차가 흔히 없잖아요. 자동차가 나와가면(나타나면) 동네 사람이 이번에는 나를 잡아갈까, 나를 잡아갈까, 동네가 작으니까 나랑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다 심어(잡아)간 거야. 강광보가 간첩을 했다고 하는데 너는 왜 대답을 안 했냐고 하니까 그러니까 차만 왔다하면 동네 사람들이 막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고 나중에 나와서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마을이 작은 동네라서 가족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간첩이 아니더라도 자기에게 불이익이 돌아올까 해가지고 솔직히 말해 교도소에서 나와도 동창이나 친구들은 날 보면 멀리서 피하더라고. 일본에 사촌이 둘 있거든 내가 한국 들어온다고 하니까 사촌들이 왜 하필 일본 나올 때 어려워서 나왔는데 왜 다시 들어가려고 하냐니까 (내가) 내가 한국 안 돌아가면 조상님 산소들도 그렇고..."


그렇게 간첩으로 몰렸던 피해자와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같은 제주인, 같은 마을 사람,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야 할 사람, 멀리해야 할 사람, 조심해야 할 사람, 경계해야 할 사람 그리고 위험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조작간첩피해자다. 

#수상한집#평화박물관#지금여기에#간첩조작#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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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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